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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과 책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재작년, 비교적 뒤늦게 보르헤스를 알게 된 나는 허겁지겁 그의 책을 몽땅 다 해치웠다. 한 작가의 책을 한꺼번에 몰아 치웠을때의 장점이 그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힌 다는 것이라면 단점은 한동안 그의 책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어진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랬다. 보르헤스라면 물려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심드렁했었다. 뭐, 책이 어디 가나, 지금 읽어봤자 전에 읽었던 것과 별 다르지 않을거야. 그렇게 어엉 부영 망각의 세월이 흘러갔고, 올해 우연히 이 책이 서가에 꽂혀 있는걸 본 순간 다시 호기심이 일었다. 음, 보르헤스네, 무슨 말이 쓰여져 있을까? 다시 보르헤스를 읽어도 되는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흠, 이젠 읽어도 되겠군, 적어도 질린 나머지 한 소리를 또 한다고는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진짜로 그랬다. 보르헤스의 말이 새롭게 들려 왔으니 말이다. 더불어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그의 사상에 대해 생각할 기회마저 얻었으니 일석이조다. 그런면에서 보면 책이란 것도 인연이 닿았을 때 제 값어치를 하게 되지 싶다. 감상할 준비가 안 되어 있거나, 받아들인 여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책도 의미가 없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해독할 능력이 되지 못할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서도...
보르헤스의 대표적 에세이만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오랜만에 읽은 보르헤스의 음성은 무척 다정하게 느껴졌는데, 그건 아마도 전에 좋아했던 작가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 때문도 있었을 거다. 비록 같은 음성이긴 했으나 소설에서 들려준 것과는 다른 느낌이 났는데, 어느정도는 직접적인 어투라서 그렇지 않는가 한다. 이 책에서도 그가 일흔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세상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읽고 숙고하고 써내려 갔음을 볼 수 있었다. 문학과 정치, 나치즘과 위선, 우연히 재발견되는 천재들, 시대의 흐름을 뛰어 넘는 문학성, 장자의 나비와 콜리지의 꿈에서 드러난 나는 누군인가에 대한 질문, 다양한 문인들을 분석하던 비평가로써의 보르헤스등... 눈이 멀었음에도 그의 엄청난 독서력과 기억력엔 악 소리가 날 정도였는데,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다 외우고 이해하고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멀쩡한 눈을 갖고 있는 나는 어제 읽은 것도 벌써 잊어버리고 사는데 말이다. 천재란 우리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 넘는 사람들이구나 싶어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논하는 작가들 중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해가 팍팍 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말하려 하는 바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에세이라 그가 쉽게 쓴 탓도 있지만, 다른 전작들에서 그가 집착하던 주제들이 반복되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냉철한 지성과 애정이 담긴 삐딱한 유머, 과거와 현재에 대한 그의 견해들 모두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특히 그가 말년에 고심하던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뭐랄까, 그의 머리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가 자아와 나라는 간극 사이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모습엔 놀라웠고, 인간이라는 위선 덩어리들이 잘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궁리하는 모습에선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인간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순진하거나 이상에 빠지거나 마냥 유토피아를 꿈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그의 혜안에도,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셈에 넣으려는 그의 통찰력에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때론 예언자적으로 들려 오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의 통찰은 먹혀 들어가는 소리니 말이다. 더군다나 일흔의 나이에도 여전히 나는 누구일까로 궁싯대는 그의 모습, 적어도 난 나다. 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어찌나 귀엽던지, 웃음이 나왔다. 허영기라곤 조금도 없는 그의 모습에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마침 이 책을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와 같이 읽었는데, 비교가 되는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책 모두 작가가 일흔이 넘어 쓴 책들임에도 깊이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보였으니 말이다. 쿳시의 책을 보면서 늙는다는 것에 대해 추함과 서글픔을 느꼈는데, 그 분노와 두려움을 보르헤스의 책을 읽으며 달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혜로운 할아버지 같던 그. 늙는다는게 단지 젊음을 상실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주어 그가 참 좋았다. 그가 한때 지구에 존재했었다는 것, 그를 통해 다양한 늙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 가운데서 좋고 싫음을 골라낼 수 있음을 알게 해준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축복일지 모른다. 이 시대의 마지막 현자인 보르헤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맛 보기로 몇 문장 옮겨 적어본다. 내가 백마디를 주절대는 것보다 그게 더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밑줄 그은 말>
이 시대에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느덧 잊혀 가고 있지만 한때 스펜서가 그의 명철한 예지력이 힘입어 지적하고 있듯이)국가가 점차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침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공산주의라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나치즘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런 사회악과 싸워 나가는 속에서, 지금까지는 거의 무용지물이었거나 유해한 것으로 여겨지던 아르헨티나의 개인주의가 그 정당성과 당위성을 취득하게 될 것이다. 크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향수에 젖어 나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우리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친화적 면이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다시 말해,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있도록 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74 <서글픈 우리 개인주의>
1859년 마침내 피츠제랄드는 <루비야트> 초판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 후 많은 수정을 거쳐 조바심 어린 마음으로 새로운 판본을 소개한다. 그러던 중 기적이 일어난다. 어쩌다 시를 창작하게 된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와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동방의 책과 스페인의 책을 탐독한 영국 출신의 괴짜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 둘 모두 닮지 않은 기이한 시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146
웰스의 마지막 작품인 <신세계 입문>은 얼핏 보면 순전히 험담으로 일관한 백과사전같다. 쭉쭉 읽히는 이 책에서 그는 히틀러는 <어디 한 군데부러진 토끼 새끼> 같다고 비난하고, 괴링은 <밤새도록 온 도시의 깨진 파편을 쓸어 담고는 또 다시 파괴하는 도시의 학살자>라 비난하고, 이든을 <도저히 달랠길 없는 국제연맨의 핵심 홀아비>라 비난하고, 스탈린을 <심지어 프롤레타리아가 무엇인지, 어떻게 어디를 지해해야 할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무조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변호한답시고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어리석은 <철기병>을 비난하고, 프랑스군의 장군들을 <무능력과 체코슬로바티아산 탱크과 무전기를 통해 흘러든 풍문과 자전거를 타고 돌아 다니면 낭설을 퍼뜨리고 다니는 몇몇 사람들에게 패하고 만 주인공들>이라고 비난하며, 영국 귀족사회를 <패배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소유자>라 ...새뮤엘 호레어 경을 <정신적 도덕적 바보>라 비난하며, 영국인과 미국인을 스페인의 자유정신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고,이 전쟁이 이념을 위한 전쟁일뿐 <당대의 무질서>가 빚어낸 하나의 범죄 행외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괴링이나 히틀러 같은 악마들만 퇴치하거나 제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이들을 비난한다....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웰스는 나치가 아니었다. 이 일이 믿기 어려운 것은 나와 동시대를 산 모든 이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 거의 모두 나치였기 때문이다.--226
< 나는 사람을 두고 어느 인종에 속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저 그가 한 인간인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다른 이보다 열등하지 않다.>같은 마크 트웨인의 지혜로운 언급을 들이대봤자 아무 소용 없을 뿐이다.--227
작가는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을 창조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이런 부정 속에는 지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이 모두 포함된다. 나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전성기 때보다 더 명석하고 고매한 창조물들이 생겨날 수없다고 생각한다.--285
사람들은 곧잘 절망과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이는 허영심에 대한 아무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때 사람들은 비윤리적이다. 반면에 버나드 쇼의 작품은 해방의 운치를 남긴다. 스토아 학파나 북유럽의 무훈 신화 같은 운치를--288
쇼펜하우어는 사상가가 된다는 것 역시 환자나 여자에게 무시당한 남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참으로 허망한 일이며, 본질적으로는 그는 자신이 또 다른 무엇임을 잘 알고 있었다.--296
나는 사랑이나 우정의 상실 때문에 슬퍼질 때면 잃은 것은 단지 원래부터 내가 소유하지 않았던 것들뿐이라고 생각해본다.--317
내 나이 일흔이 훌쩍 넘었다. 이 나이가 되면 우연이나 새로움 같은 것이 진실이라 믿는 것보다 중요할 수 없다.--339
난 우상타파주의적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이 서른 무렵, 마세오니오 페르난데스의 영향하에 나는 미美라는 것이 몇몇 소수 작가의 특권이라고 믿었었는데, 이제는 아름다움이 모두의 것이며 우연히 뒤적이던 책 어느 페이지나 길거리에서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숨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다시 말하거니와 고전은 무슨 대단한 정점을 지닌 책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온갖 이유 때문에 열의와 알 수없는 공경심을 갖고 읽게 되는 그런 책이다.---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