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
가브리엘 마르케스 외 지음, 김훈 옮김 / 푸른숲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한동안 딱히 맘에 드는 책을 만나지 못해 우울해 있던 내게 " 할렐루야! "를 외치게 만든 책이다. 이렇게 이상한 제목의 책에 내가 환호를 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리요. 더군다나 여기 나온 10편의 단편들은 < 플레이 보이 >지에 수록된 것들이란다. 왜 내가 이 책을 안 집어 들었을지 이해가 되면서--아마도 맨 앞에 실린 편집자의 한마디에 흠칫해서 내려 놨을 것이다.--고작 선입견때문에 이런 수작을 외면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세상에, 그동안 난 내가 독서 무감증이 걸린 줄 알았다. 남들은 좋다고 난리를 치는 책들에 딱지 놓는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냥 삐딱한 시선으로 봐지는 책들을 보면서 어쩜 오히려 이상한건 내가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염려는 이 책의 첫장을 읽는 순간 싹 달아났으니... 독해력이나 감동을 느끼는 것이나 좋은 책에 집중하는 능력에는 전혀 이상이 없더라. 어쨌거나 < 플레이 보이 >지가 무감증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더라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끼면서 책의 내용을 분석해보자면...

 

맨처음 수록된 단편은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익사체>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20가구 남짓 되는 해변 마을에 익사체 한 구가 떠밀려 온다. 시체를 보려 몰려든 사람들 머릿수 셈으로도 그 익사체가 마을 사람이 아니란 것이 판명난다는 좁은 마을, 주민들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각자 역활을 나눈다. 남자들이 이웃 마을에 실종자가 없는 지 알아보러 가는 사이 여자들은 시체를 씻는 일을 담당하는데, 마을 남정네들에 비해 너무도 잘 생긴 익사체를 마주한 아낙네들은 그만 그에게 홀딱 반하고 만다. 익사체가 살아있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을 환상속에 그리면서 몽환에 젖는 여자들은 서둘러 옷까지 만들어 입히고, 그런 여자들을 보면서 남자들은 알길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는데... 파도에 떠밀려온 시체가 너무 잘 생겼던 나머지 조용하던 마을에 파문이 일게 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진짜같이 생생하게 그려내던 마르께스의 입담이 돋보이던 작품이다. 익사체를 가지고도 불쾌하거나 엽기적이 아닌 유쾌하고 익살맞은 글을 써대는 마르께스는 보면서 깨달았다. 그의 상상력은 탁월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 다음편인 로리 콜린의 < 정부 >는 눈이 확 떠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개성적인 여 주인공에 반했던 단편이다. 매력적인 아내와 장성한 두 아들,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누려온 나에게 정부가 생긴다. 그것도 영화속에 그려진 정부의 모습과는 하나도 닮아있지 않는 여인과... 기고하던 잡지사 파티에서 만난 둘은 나이차와 성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서서히 빠져들어간다. 무뚝뚝하고 냉철하며 인테리나 요리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는, 한마디로 여자다운 데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에게 하릴없이 빠져든 나와 이렇게 늙다리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그녀, 밀회가 거듭되어질수록 둘의 두려움은 커져만 가는데...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을 냉철하게 견뎌내는 연인의 모습이 신선했다. 특히 둘이 주고받는 대사가 압권이었는데, 영화속 불륜과는 거리가 먼 장면들이었지만 어쩜 가장 실제적인 불륜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내 애인은 전혀 정부답지 않은 여자라고 불평하던 남자의 말이 실은 그녀에 대한 사랑 고백임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어울리지 않는 연인들의 사랑에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으니, " 사랑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작가의 한마디에 고개를 끄떡여 본다.

 

그외 늙은 보르헤스가 젊은 날의 자신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다룬 <타인>(보르헤스 작)는 다시 읽어도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으로, 젊은 날의 자신을 안스럽지만 대견하게 바라보는 보르헤스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세월이 그냥 지나가는 것만은 아니더라고 말하는 보르헤스야말로 이 시대의 마지막 현자가 아닐까 싶다. 기막힌 반전에 재치있는 전개가 돋보이는 <매춘부 전성시대>(리처드 매디슨 작)는 이 책에서 가장 재밌던 작품으로 남녀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볼만한 단편이다. 기행 작가로 명성이 자자한 폴 써로의 <하얀 거짓말>은 소설에도 그의 글발과 통찰력이 먹힌다는걸 알게 해 줬고, 작년에서야 <에브리 맨>으로 겨우 우리나라에 이름을 알린 필립 로스는 그만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인의 결혼 불안 & 불륜 심리를 <이웃집 남자>를 통해 신랄하고 정신 사납게 풀어놓고 있었다. 헤어날 길 없는 권태기로 숨 막혀하던 부부가 우연히 과거의 열정을 되찾아 가게 된다는 <머멀레이드 좀 주시겠어요?> 나,  당하는 주인공은 황당하겠지만 독자들은 기막힌 웃음을 짓게 되는 톰 보일의 <안전한 사랑>등도 놓칠 수 없는 수작이다. 그에 비하면 <섬> 과 <혼란스런 여행>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후반부에 배치된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니 오해는 마시길... 하여간 작품마다 다 재밌어서, 10편이라는 사실이 안 믿겨질 정도였다. 작품수를 잊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이란 뜻이다. 다양한 이야깃 거리들을 새롭고 신선한 시선과 그들만의 독창적인 솜씨로 맛깔나게 쓰던 작가들은 어찌나 존경스럽던지 백 번이라도 안아주고 싶더라. 내가 본 단편집 중에선 가장 완벽한 작품집이 아닌가 한다. 현재까지 본 것들만 셈한다면 말이다. 완성도가 높은 수작 단편들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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