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나 감상적인 내용의 꿈을 꾸다 깼는데, 깨어서도 배경으로 울려 퍼지던 곡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꿈속에서조차 대놓고 우울한 곡이란 생각이 들던 멜로디였다. 한참을 흥얼대다 그 곡이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이란걸 깨달았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란 영화에 나오던 바로 그 곡, 평소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다분히 감상적이란 이유로 내게 별 점수를 얻지 못했던 음악이었다. 무의식 속에서 브람스가 떠오르다니, 아, 정말로 가을이 왔지 싶다. 이상하게도 브람스의 곡은 가을이 아니면 생각나지 않는다. 가을만큼 그의 음악이 절절하게 들려오는 계절도 없고... 하여 일부러는 절대 찾아서 듣지 않는 브람스가  갑자기 생각난 기념으로 같은 제목의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어릴적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를 잠시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땐 어떤 내용인지 감 잡지도 못했었다. 이 책을 보고 깨달았다. 그 영화를 감상하려면 적어도 내 나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는 것을. 영화 하나를 감상하는데 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이 우습긴 하지만 사실인걸 어쩌겠는가. 그러고보면 어린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본인 입장에서도 아까운 일이지 싶다. 이해의 싹을 제대로 튀워 보기도 전에 죽는 것이니 말이다. 하니 세상을 많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되도록이면 오래 사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겠는가 추천하는 바다.

 

헛소리가 길었다. 이 책의 장점을 들자면 우선 생각보다 얇다는 것이다. 저자인 프랑스와즈 사강이 25살에 쓴 책이라고 하는데, 건조하고 담담하며 톡 쏘는 듯 냉소적인 문체, 책이 두꺼워질 일이 없는 문체다. 문득 깡 마른데다 난센스는 질색할 듯 보이던 저자가 생각난다. 자신을 그대로 닮은 글을 쓰다니 그런 면에서 사강은 천부적인 작가라는 말을 들어도 무리는 없지 싶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니까.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사강, 어쩜 그것이 너무 쉬었던 탓에 훗날 더 성장을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욕망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거나...  내용은 이혼녀인 서른 아홉의 폴이 스물 다섯의 시몬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남자 친구인 로제와의 삐걱대는 동거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감내하고 있었던 폴은 미국 부잣집 마나님의 인테리어를 맡다가 그녀의 아들인 시몬을 만난다. 자신이 대단한 미남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자의식 없는 시몬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바라보던 폴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쫓아다니자 당황한다. 그녀가 결혼을 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상관없이 무작정 폴에게 달려드는 시몬, 그런 그의 무모함을 부잣집 철부지 아들의 불장난 정도로만 생각하던 폴은 점차 그의 진심을 다시 보게 된다. 로제마저 영화배우 지망생이라는 천박한 여자와 바람이 나자 한층 더 외로워진 폴은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시몬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만을 바라보는 시몬의 열정에 취해 잠시 나이마저 잊고 살던 폴은 로제가 다시 찾아와 돌아올 것을 호소하자 결단을 내려야 함을 깨닫게 되는데...

 

아마도 스물 다섯살의 사강은 폴& 시몬과 비슷한 커플을 주변에서 목격했을 것이다. 상상력만으로 썼다고 보기엔 너무 사실적이다. 나도 이십대 시절 비슷한 커플을 본 적이 있어 잘 안다. ( 다만 내 경우는 남녀 나이가 정 반대였다. ) 그렇다고 그녀를 폄하자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이 비슷한 쌍을 봤다고 해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우니 말이다. 스물 다섯이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관찰력, 놀라웠다. 하지만 그 놀라움도 잠시, 그녀가 내린 결론을 보면서 다행스럽게도(?) 딱 스물 다섯에 걸맞는 통찰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나이엔 이들의 만남을 이렇게 밖엔 설명할 수 없었을테지...최대한 좋게 보려해도 그렇게 밖엔 보이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언젠가 사랑보다 삶이, 일상이 크게 다가 올때가 있다는걸 스물 다섯에 어찌 알겠는가? 절대 모른다. 시몬의 순도 100% 사랑을 바람둥이에 철면피 배신남 로제와 맞 바꾸는 폴을 보면서 사강은 그녀의 소심함과 비겁함, 그리고 바보스러움에 대해 넌지시 언급한다. 그녀가 고독한 것도, 외로운 것도, 결국 배신을 당하는 것도 다 그녀 탓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을 저버리는 그녀의 선택이 저자인 사강의 추측처럼 비겁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일까?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44

 

폴의 관심에 목말라 하던 시몬은 간신히 만난 그녀에게 이런 멘트를 던진다. 로제와의 간당거리는 사랑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폴은 이 말에 정처없이 흔들리게 된다. 이미 고독할 대로 고독했던 그녀의 눈엔 이제  자신이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음에도 세간의 눈이 두려워서 사랑을 외면하고 있는 겁쟁이로 비춰진 것이다. 연하인 시몬이 그녀를 순응주의자라고 부르자 평생 비 관습주의자로 살아왔던 폴이 반발하고 싶어졌을 거라는 것은 안 봐도 뻔 한 일,  하여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나이 차를 뛰어 넘어 그 둘의 낭만적인 연애는 그렇게 시작된다. 난 시몬의 저 문장을 읽는데 살짝 신경이 거슬렸었다. 이거 딱 바람둥이 멘튼데 싶어서다. 물론 이 책속에서 폴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은 아닐거라 생각되지만, 사실 폴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었을 것이다. 비극으로 끝난 수 많은 연애를 목격하면서 난 이상하게도 많은 남자들이 저 비슷한 멘트는 날린다는 사실에 주목한 적이 있었다. 여자들의 아킬레스 건을 어찌 그리 잘 아는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여자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덴 직방이지 싶다.  죄책감에 약한 여자들의 심리에 정통한건 아마 바람둥이들의 본능같은 것일 것이다. 어쨌든 사정이 어찌되었건간에 그렇게 시작된 둘의 사랑은 과연 행복했을까? 행복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용감하게 사랑을 택했으니 행복해야 하는데 마땅하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사가 그렇게만 풀려 나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사랑이 쉽게 풀려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난생 처음 사랑을 하는 남자와 사랑이라면 시작에서 끝까지 훤한 여자의 사랑이라... 비유를 하자면 그건 마치 놀이 공원에 막 입장한 사람과 놀다 지쳐 집에 가려는 사람이 한 팀이 된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이 재밌고 신기해 보이겠지만 다른 사람은  다 별로고 흥미가 없다. 한 사람은 펄펄 날지만 한 사람은 지쳐서 쉬고 싶을 뿐이다. 둘 다 진심이고 둘 다 진실이다. 둘 다 경험이 근거한 것이고 둘 다 절박하다는 점까지 똑같다. 단지 방향만 다를 뿐이다. 그런 악 조건 속에서도 우린  사랑했기에 행복했답니다라는 말을 그 둘은 하고 싶겠지만, 진심으로 그 말이 나오기란 정말로 어렵다. 거짓말이 아닌한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지 싶다. 이제 남은 문제라면 그 둘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라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둘은 사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제, 즉 살아간다는 문제로 헤어지기 마련이다. 미지와 기지, 둘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관계란 부모 -자식 간이거나 사제지간에서일뿐이라, 동등함이 정상인 연인 사이에서 갈등의 원인이 될 수밖엔 없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그 둘의 이별이 사랑의 부재와 얄팍함과 변심과 배신때문으로 보일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건 사랑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걸 사강은 제대로 짚지 못하는걸 보면서 역시나 나이는 못 속이는군 싶었다. 만일 저자가 중년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면 같은 결론이라도 다른 뉘앙스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물론 젊은 시절과 똑같은 열정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가졌을때에나 가능한 일이었겠지만서도... 어쨌거나 그녀는 스물 다섯에 이 책을 썼고, 그 약간의 단점만 빼곤 여전히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사강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단 생각은 들진 않았으니 그녀가 내 취향은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그녀의 나머지 책을 읽으려면 꿈속에서 다른 계시를 받아야나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