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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없는 토끼 - Rabbit Without Ea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내 20대 한때 훤칠한 키에 자타공인 잘 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남자와 몇 번 데이트를 한적이 있다. 잘 생기기만 했나? 주변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과 함께 선후배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사람이었다. 하니 내가 드디어 완벽한 짝을 발견한 모양이라며 쾌재를 부른 것도 이해가 되실 것이다. 더군다나 동아리 모임에선 어쩜 그렇게 말도 후덕하게 잘 하던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인격이 팍팍 느껴지곤 했다. 하여 전화 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다 전화를 받자마자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가곤 했던 데이트 현장, 그곳에서 난 기대와 달리 늘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이야기를 나누어야 (?) 했다.< 주제--그는 얼마나 잘 생겼으며 사랑받아 마땅한 인간인가? 왜 모든 여자들은 그를 귀찮게 하는가? > 신기한 것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 놓아도 결국엔 그 주제로 흘러 가더라는 놀라운 귀소본능이었다. 내 말하지만 그런 본능이 내재한 사람과 어떻게든 대화를 하려 시도한다는건 우산 들고 쓰나미를 막겠다고 나선 것과 대략 비슷하다. 끝없이 흘러 나오는 그의 찬가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난다. "와, 빨래 집게로 저 입을 꽉 다물게 할 수 없을까? 입만 다물고 있으면 비주얼은 딱 그만인데 말이야. 이 무신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입에서 하도 쓰레기만 뱉다보니 이젠 얼굴이 쥐처럼 보이는군, 아깝다...쩝;;;;" 적어도 인간하고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내 소망은 그리하여 그와의 만남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으니... 하지만 결별의 이유를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떤 설득력으로도 그가 쥐처럼 보인다는 것을 그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나 조차도 비주얼과 내면의 불일치가 들려주는 충격스런 파열음을 처음 경험했던지라, 그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 못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 오래전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이 영화가 그 당시를 생각나게 해서일 것이다. 완벽한 비주얼의 주인공에 감탄하고 있는데, 정작 그가 입만 열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지는 난감함이 교차하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그렇다. 사진속의 저 남자 틸 슈바이거... 그 멋진 독일 남자가 이 영화를 감독하고 주연까지 했다한다. 아마 각본까지 썼을걸? 싶어 확인해 보니 것도 맞다. 놀랍지도 않다. 곳곳에 틸 슈바이거표라고 도장이라도 찍어 놓은듯 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감독이나 각본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낯 부끄런 유치찬란함이 중화라도 될 수 있었으련만, 아마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하다. 단지 돈을 아끼자는 차원이 아니라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타협이 좀체 안 됐을 것이다. 아니 하고 싶었을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긴 칸느상에 빛나는 예술 영화를 찍는것도 아닌데, 좀 유치하면 어떤가? 감독 맘에 들면 그만이지, 안 그래?
< 멋진 외모의 틸 슈바이거와 이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던 것 중 하나인 귀없는 토끼 인형>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십 전문인 파파라치 기자 루도는 유명 스타의 약혼식을 망친 댓가로 300시간의 봉사명령을 받게 된다. 그가 근무해야 하는 곳은 유치원, 도살장에 끌려가듯 그곳에 간 루도는 그곳을 운영하는 원장이 그가 어렸을적에 놀리곤 했던 안나라는 것을 알게된다. 루도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안나는 루도를 골탕 먹이느라 동분서주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너무 착한 여자, 루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곧바로 드러난다. 자칭 원 나잇 스탠드의 달인인 루도는 안나에게 연애에 대해 조언을 해주지만, 정작 안나는 육체만의 관계는 사절이라면서 루도를 비난한다. 생각지도 않게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루도를 보면서 마음이 움직인 안나는 결국 루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여자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루도는 우린 친구사이라면서 안나의 말을 일축해 버리는데...
뭐,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될 지는 안 보신 분이라해도 충분히 짐작이 되실 거라 본다. 다만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가 영화를 살리고 죽이는 주안점이 될텐데, 이 영화는 참담할 정도로 어설펐다는 점이 문제겠다.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조차 당최 이해 안가는 스토리였지만 어쩌겠는가? 로맨스 영화 주인공인데, 맞건 안 맞건 간에 사랑에 빠져야 함이 공식 아니겠나? 그것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치자. 계면쩍도록 안스러운 것은 이 틸 슈바이거라는 배우,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인간 같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떤 멘트를 날려도 여자들은 자신에게 정신을 못 차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정말이지 못 말리는 자기애지 싶다. 그렇다보니 생각없이 무지막지 날려주는 그 어색한 멘트를 소화해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고민끝에 음을 아예 없애 버리고 영화를 봤더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 물론 자막이라는 복병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무시하고 보니 그래도 한결 나았다. 하여, 이 영화의 장점만 열거하자면 바로 이렇다.
1. 독일산 자동차는 넘 깜찍했다. 노란 택시 조차도 명품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주인공보다 더 자주 나오길 기대하며 본 소품이 되겠다. 누가 독일 자동차만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든다고 해도 넉근히 1시간 정도는 열중해서 보겠는데 말이지. 독일은 자동차만으로도 멋진 배경이 되는구나 부럽기 한량 없었다. 물론 그들은 전혀 그걸 알지 못하겠지 라면서...그나저나 우린 언제 저렇게 예쁜 차들을 만들어 낼꼬....
2. 주인공이 만든 귀없는 토끼가 귀엽다. & 독일어 억양이 그렇게 귀에 멋지게 들리는 언어라는걸 이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3. 영화속 유아원에 다니는 아가들이 귀여웠다.
4.셋을 합하면 내가 왜 이 영화가 비주얼이 볼만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실 것이다.
5.그래도 초반 성형 중독에 걸린 인기스타 인터뷰 장면 정도는 괜찮았다. 하여간 좋은 장면과 어색한 장면과 튀는 장면과 귀여운 장면등으로 줄곧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불안하기만 한 영화였다. 내가 보기엔 틸 슈바이거 이 감독, 여자와 엮이는 장면 외엔 그래도 꽤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말이지... 연기도 잘하고 말이다. 앞으로 그가 사회성이 강한 영화를 혹시 만들었다고 하면 한번 볼 생각이다. 의외의 영화가 나올 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 것이 내가 그에게 해줄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한다. 그나저나 난 이 리뷰를 왜 이리도 길게 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