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로폴리스
아냐 울리니치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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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촌구석에서 살고 있던 사샤 골드베르크는 어느날 아버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어리둥절해 한다. 아버지의 실종 못지 않게 수상쩍은 것은 엄마의 태도, 그녀는 마치 아버지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흔적 자체를 없애 버린다. 영문을 알 길 없는 아버지의 부재와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한 엄마, 과거에 잠겨 사는 할머니, 학교에서도 적응을 잘하지 못했던 사샤는 불행하기만 하다. 미술 학원에서 만난 친구의 집에 놀러 간 사샤는 친구의 오빠를 알게 되고 열 넷의 나이에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가난했지만 인텔리겐차로써의 자부심만은 대단했던 엄마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낀다. 낙태를 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기, 사샤가 딸을 낳자 엄마는 손녀를 자신의 아이로 입적시킨다. 손녀를 키우기 위해 사서였던 직장을 때려 치운 뒤 공장에 취직한 엄마는 사샤에게 공부하러 대도시로 나갈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미 사샤의 마음은 공부에서 멀어진 상태, 사샤는 큐피드 코너라는 결혼상담소를 통해 얼마전까지만해도 전혀 알지못했던 남자와 약혼을 하고는 미국으로 날아간다. 마지못해 늙은 남편과 살던 사샤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을 감행하고, 이리저리 떠돌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초청비자로 미국에 왔다 아예 눌러 앉아버린 아버지는 과거의 삶은 깡그리 잊고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졸지에 새 엄마와 이복동생이 생긴 사샤는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실망하지만, 그나마 미국 영주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에 안도한다.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손에 넣게 된 사샤는 딸을 만나러 고향으로 향는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가족의 초상을 그린 소설이다.  유대계 흑백 혼혈로 아웃 사이더로 살 운명으로 태어난 아빠 빅토르는 평생 자신의 의지로 생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으로 운명에 끌려 다니던 그는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사샤의 엄마와 결혼하고, 또 미국으로의 탈출 기회라는 이유로 사샤 모녀를 버린다. 그런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의 삶을 혼돈과 절망속으로 밀어 넣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한편 자살미수로 병원에 입원한 빅토르를 만난 사샤의 엄마는 단지 그가 "페트로폴리스"란 시를 안다는 이유로 사랑에 빠지고 말 정도로 낭만적인 여성이다. 어찌보면 대책없는 여자기도 하지만...남편이 그녀를 버린 뒤, 남은 거라곤 지적 허영심이 전부인 그녀는 사샤의 성공을 강요하다 결국 딸과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 엄마에 대한 반발로 어린 나이에 미국 신부로 미국으로 건너간 사샤는 별별 사람들을 다 겪으면서 타국에서 홀로 서기의 설움을 겪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등장인물이 출연해 주로 험악한 인생 역정을 줄줄이 나열하던 정신 사나운 책이었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던데,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 것인지를 알아나가는 것이 요즘 성장소설의 정의라면 모를까, 한 인간의 성장이라고 볼만한건 없지 않는가 하는게 내 감상이었다. 성장? 아무렇게나 되는데로 살아가는게 성장이던가? 그렇다보니 성장 소설에서 기대하는 감동은 커녕 비극으로 점철된, 아니 비극이 예정된 사람들의 인생 역정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짜증이 났다. 자신이 태어난 소련에 대한 경멸과 연민, 새로 적응해야 하는 나라인 미국의 풍요와 기괴함에 대한 경악, 자신의 삶이 실패라는 사실을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주인공의 엄마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딸과의 어긋난 관계, 그리고 부재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발휘하는 아빠, 부富를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부부등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없이 쓸쓸하고 비관적이며 초라하고 비극적이었고, 그녀는 이를 줄곤 비판적인 시선으로 해부하고 있었다. 문장력 하나만은 데뷔작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힘이 있었으나, 흥미롭지 않는 등장인물들, 그보다 더 흥미롭지 않던 그 등장인물들의 행보들, 거기에 아예 궁금하지도 않던 그들의 말로등 줄거리가 칙칙하다보니 읽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든 의문인데, 왜 이민 세대 작가들의 책은 이리도 우울한걸까? 어느 한쪽을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양가감정이 그들을 이렇게 분열시켜 놓는 것일까? 아님 이민이라는 자체가 작가에겐 어마어마한 중압감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생래적으로 어디에도 끼이지 못한다는 소외감이 그들을 그렇게 우울하게 만드는 것일지 궁금했다. 어느책에서나 여지없이 보여지던 그들의 짜부러지고 일그러진 세계관, 그건 그들의 눈에는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뜻일텐데, 결국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이 그들을 정서불안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제목인 <페트로폴리스>는  러시아에서 추방된 시인의 시 제목으로 사샤의 부모를 엮어주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원래 시인이 그 시를 썼을 때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으나, 이 작품속에선 인텔리겐차의 지적 허영을 나타내는 장치로 쓰인다. 작가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나 배부른 돼지나 바보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우리 모두는 불쌍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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