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헤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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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알아가는데 선입견만큼 방해되는건 없지 싶다. 내가 비교적 유명한 여류 작가인 아이리스 머독을 이제서야 읽게 된데는 그녀의 말년을 다룬 영화인 <아이리스>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탁월한 지성을 자랑하던 그녀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급속하게 기억을 잃어가는 영화를 보면서 머독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하기란 어려웠었다. 아니, 그보단 그녀의 남편으로 나오는 존 베일리에게 매력을 찾지 못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젊었을때는 아내의 빛나는 재능에, 늙어서는 치매 간병에 절절매던 그가 한없이 무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인데, 아마도 그건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기 보이게 하기 위한 트릭이었지 싶다. 이런 소설을 쓸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런 소설을 쓰는 여자랑 살았던 남자라면 그렇게 무능하게 상황에 끌려갈리 없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왜 사람들이 아이리스 머독을 가르켜 시대의 지성 ,지성하는지 이해할 수 있던 알토란같이 탄탄한 소설이었다. 줄거리를 들여다보면...

 

재능은 있지만 게으른 탓에 여자친구집에 얹혀 살고 있던 제이크는 여자친구에게 결혼할 상대가 생기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 앉고 만다. 그런 그에게 기생하고 있던 친구 핀과 함께 짐을 싸들고 나온 제이크는 할 수 없이 옛 애인 애너를 찾아간다. 오랜만에 애너를 만난 제이크는 그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갈 곳이 없다는 제이크의 하소연에 애너는 동생 새디에게 가보라고 일러준다. 유명 영화배우가 되어 있는 새디는 제이크에게 치근대고 있는 남자를 막아 달라는 조건으로 집에 머물게 해준다. 새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던 제이크는 그 스토커가 그의 옛 친구인 휴고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란다. 감기 시약 실험실 병동에서 휴고를 알게 된 제이크는 특이한 사상을 갖고 있던 그의 인간성에 반했었다. 별 생각없이 그와의 대화를 기록했던 제이크는 어물쩍 그것을 책으로 출간해 버렸고, 그 뒤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양 책으로 냈다는 죄책감에 휴고와  연락을 끊고 말았다. 이 참에 자신의 과오를 휴고에게 고백해야 겠다고 마음 굳게 다진 제이크, 하지만 휴고를 만나는 것은 힘들기만 하다. 제이크는 일련을 사건들을 쉴새없이 겪으면서 점차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적당히 살아가는데 적응이 된 이 뻔뻔한 주인공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게 될것인가?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현란한 개성이 살아있던 소설이었다. 나는 나를 사실주의 작가로 본다. 나는 진짜 사람들과 진짜 살아있는 일상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라고 머독이 말했다는데, 정확하게 이 책의 성격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다. 어찌나 실제 같은지, 상상력으로 그려낸 허구가 아니라 마치 머독이 제이크라는 사내를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면서 핸드 헬드 기법으로 찍은 영화같았으니 말이다. 게으른 탓에 열심히 일하기 보단 기둥 서방으로 대충 사는 것에 만족하는 제이크, 그런 제이크에게 얹혀 사는 친구 핀, 자신이 얼마나 틀에 박히지 않는 사고를 하는지 전혀 모르는, 한마디로 자신의 가치에 대해 무지하기만 한 휴고, 그런 휴고를 싫어하는 영악한 새디, 침묵으로도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 구멍가게 주인 팅컴 부인등...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얽히고 설힌 이야기들이 너무도 매끄럽게 머독에 의해 이끌려 나오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머독이 단 한 순간도, 단 하나의 등장인물도 낭비하는 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다가 허튼 소리도 좀 하고, 객쩍 말도 좀 날리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로 쉬어 갈 법도 한데, 그녀는 내처 핵심 주제들로만 내달리고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농담 한 마디 없이 일사천리로 진도만 나가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되려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겠다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꺼냈다간 당장 험악한 눈초리가 날라올  것 같은 선생님, 그녀가 바로 그랬다. 자신도 헛소리를 하지 않지만, 남에게도 헛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대단한 집중력의 작가,  과연 사람들이 경외할 만한 지성이란  생각이 든다. 뭐, 그렇다고 팍팍하고 어려운 소설인갑다 생각하시진 마시길... 영리한 선생님답게 일목 요연하고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깊이있는 통찰력에 그 어두움의 희극성을 캐치할 줄 아는 유연함, 그리고 자신의 자아 탐구에 시간과 장면을 다 할애하는 작가들과 달리 본질을 캐내는데 무게 중심을 둘 줄 아는 균형 감각과 사태를 여러 각도로 해석하는 영리함 덕에 간만에 탄탄한 소설을 읽은 듯 너무 반가웠다. 이 책이 머독의 데뷰작이라고 하던데,  정말 신이 내린 작가는 따로 있지 싶다. 무게있는 소설이 그리운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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