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재정 적자로 허덕이는 동물원으로부터 분양받은 펭귄 마샤와 함께 살고 있는 빅토르는 딱히 내세울 것 없는서른 중반의 소설가다.마지막 애인이 떠나간 뒤 펭귄과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거절하기 힘든 멋진 제의가 들어온다.바로 신문의 부고난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들어온 것,당신보다 잘 쓸 작가는 없다는 편집장의 말에 우쭐해진 그는 덥썩 제의를 받아들인다.하지만 그가 써야 하는 부고엔 이상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라는 것,어차피 우리 모두 죽는거 아니겠느냐며 미리 조문을 써둔다고 생각하자던 빅토르는 그 고객들이 진짜로 줄줄이 <고인>이 되버리자 당황하고 만다.더군다나 자료 수집을 위해 간 지방에선 안내인이 살해되지 않나,편집장은 위험이 사라지면 돌아올거라며 외국으로 갑작스럽게 떠나질 않나,조문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한 독자는 돈과 함께 딸 소냐를 맡기고 사라지지 않나,연이어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그의 인생도 복잡해지기 시작한다.그렇게 설명하기 힘든 일들 몇번에 펭귄과 고즈넉히 살아왔던 빅토르는 난데없이 어린 소녀를 거둬야 하는 가장에 생명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 신세가 되고,그런 소동 끝에 늘 그를 위로하던 펭귄마저 죽을 병에 걸리자 빅토르는 그를 남극으로 데려갈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이야기가 저절로 술술 풀려나가듯 펼쳐지던 매력적인 블랙 코메디다.소련 붕괴후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절망적이고 암울한 현실을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그려내던지...부패한 정치가,사업가,그리고 그의 정부들과 무소불위의 갱단과 그의친구들...평생 타락을 향해 내달리던 사람들의 일생을 몇줄의 부고문으로 작성해내던 그는 그것이 어떤 모종의 음모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하지만 펭귄을 분양받아 살고 있던 빅토르,그의 엉뚱함과 낙천성은 어려운 일 앞에서 진짜 힘을 발휘하게 된다.그는 그것들을 "뭐,그게 어때서?"라고 어깨를 으쓱하는 선에서 받아 들이고 넘기고 마는 것이었다.다른 영화나 책에서라면 음모론을 들이밀면서 편집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행동하고도 남을 만한 상황임에도,될되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극히 낙척적으로 대처하고 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포복절도하게 귀여웠다.모르는 사람이 딸을 맡겨도 그만,갱단들이 펭귄을 장례절차에 동원해도 그만,귀찮을법한 펭귄학자의 임종도 그만,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한번도 외면하지 않는다.어떻게 해서든 상황에 대처하려는 그의 인간미가 한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는데,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건 간에 여전히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 동유럽인들의 느긋한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 들어 흐믓했다.참신한 상상력과 짜낸 흔적 없이 자연스러운 전개,앙징맞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등장 인물들,그들이 나누는 매력적인 대화들로 지루할 새 없이 읽은 책이었지만,무엇보다 심장병에 걸린 펭귄이라던지,늘 우울한 펭귄이라던지,부고문을 쓰면 당사자가 죽는다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설정들을 너무도 그럴 듯하게 그려냈다는 점이 멋졌다.작가의 으뭉스런 필력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봤던 책,얼마 전에 후속작 <펭귄의 실종>도 번역되어 나왔다는데 어떤 내용일지 자못 기대된다.빅토르는 무사할지,그리고 어쩌다 펭귄을 잃어버린 것일지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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