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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열 네살 소년이 가출을 한다.이름도 모르는 엄마에 알콜 중독자 아빠...과거건 가족이건 고향이건 그를 묶어 두는 것 하나 없던 그는 정처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때는 1850년대 미국,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인 시대,총에 맞고,싸움도 하고,술 먹고,끝내 살인을 저지르며 점차 어른의 세계에 적응하던 소년은 우연히 글랜턴 대위가 이끄는 무리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마치 그가 떠난 목적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무리에 녹아들던 그는 난생 처음 소속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미쳤지만 상황 판단 빠른 전직 대위 글랜턴,전진 신부 토빈,싸우다 친구가 된 토드빈,흑인 존슨과 천재 싸이코 패스 홀든 판사...주정부로부터 인디언 학살 허가를 받아 머리가죽 사냥을 떠난 그들은 살육이 계속되면서 피맛에 굶주린 광기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가는 도중 만나는 이가 누구건 ,그들이 인디언이건,멕시코 원주민이건,이민자들이건, 미국인이건 거침없이 닥치는대로 죽이고 강간하는 글랜턴 일당들,하지만 정작 그들을 끔찍스럽게 만드는것은 살인 자체에 있지 않았다.그 학살의 잔인함에 있지. 다음을 보자.
"산 자나 죽은 자나 가릴 것 없이 머리채를 움켜쥐고 두개골에 칼날을 박아 피투성이 머리 가죽을 하늘 높이 쳐들고", "벌거벗은 몸을 조각조각 썰어 팔다리와 머리를 떼어 내"거나 "벌거벗은 아기 발꿈치를 차례로 쥐고 머리를 돌덩이로 짓이겨…… 아기의 정수리 숨구멍으로 시뻘건 구토물 같은 뇌수가 콸콸 쏟아"지게 하며 "죽은 갓난 아기들을 나무에 매달아 놓는" 등 차마 읽기가 버거울 정도의 섬뜩한 묘사가 문단을 가득 메운다.그렇게 가는 곳마다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던 홀든 판사 무리는 강의 이권을 독차지 하려다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이 살해되면서 와해된다.그리고 30여년이 흐른 뒤,학살의 과거를 뒤로한 채 떠돌던 소년은 우연히 판사와 조우하게 되는데...
정처없이 떠돌던 소년이 묵시록적인 예언을 실현하듯 설치고 다니는 용병 무리에 합류하게 되면서 목격하게 된 학살을 나직한 목소리로 그려낸 소설이다.건조하면서도 유려한 문체,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만치 세심하게 박혀있던 어휘의 향연,섬뜩한 폭력마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의 서늘하고 격정적인 묘사,지성적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는 냉정하고 이지적인 서술태도,개성 뚜렷한 등장인물들,숨이 턱턱 막힐 듯 다가오는 사막의 정경,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매끄럽고 담담하게 쏟아내는 풍부한 이야기거리..이 작품의 명성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책이었다.85년에 쓴 작품이라는데 탄탄한 구성과 깊이 면에서는 오히려 최신작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로드>가 소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다만 보도 듣도 못한 섬뜩한 폭력을 읽어 낼 만한 강심장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싶을 만치 폭력 수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런데 문젠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이자 차별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왜냐면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학살들이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우린 잊고 살았지만,미국은 실은 학살이 남긴 피웅덩이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작가는 이 작품 하나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지구상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대량 학살이 없던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피해자가 아닌 당사자에 의해 그 역사가 이처럼 처절하게 고발되는걸 본 것이 있던가? 없다.코맥 매카시,그가 처음이지 않는가 한다.자신의 치부를 고발할 정도의 객관적인 지성이라니,거기다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탁월함까지...씁쓸함과 함께 존경스러운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미국의 문학이 경박스럽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한번 이 책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마음에 안 들지는 모르지만,적어도 그 깊이에는 고개를 숙이게 될 터이니 말이다.
<추신>
1.이 책의 백미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의 전신이라고 할만한 홀든 판사의 개성에 있다.혹 전쟁이 시작되면 강간이나 연쇄살인이 사라진다는걸 알고 계시는지? 이 책을 보면 단박에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실 것이다.연쇄살인범,소아 강간범,엽기적인 살인마가 각광받는, 그들이 타인보다 월등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장이 마련되기 때문이다.책 중반이 되어서야 위의 모든 것을 갖춘 홀든 판사가 슬그머니 등장하는데,그때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책에 활력이 붙는다.그러니 초반에 지루하다고 책을 내던지진 마시길...작가가 조금씩 살을 붙여나가는 판사의 모습을 천천히 따라가보면 작가가 창조해낸 희대의 캐릭터를 만나는 희열을 만끽할 수 있으실 테니 말이다.그 과정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악이란 것이 얼마나 치졸했는가도 알게 될텐데 그건 말하자면 덤이다.
2.홀든판사와 (타락한)전직 신부의 대립구도를 눈여겨 보시길.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여기에 담겨져 있다.
3.끔찍하게도,홀든 판사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그리고 그가 그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아무런 판결도 받지 않은 채 유유히 사라진 것도 사실이라고...이 책의 결말을 가지고 독자들이 매카시는 도통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던데,그가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 아니다.다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것 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