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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소중한 것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림픽만큼 지루한 것이 또 있을까? 하루키의 질문이다.평소 올림픽을 지루한 제전이라고 생각하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드디어 그의 생각을 시험대에 올릴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호주 시드니 올림픽을 직접 취재해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것,마침 자신이 좋아하는 마라톤에 일본 기대주자들이 대거 참가한다는걸 알게 된 그는 새로운 경험 삼아 흔쾌히 수락한다.그렇게 시작한 호주 올림픽 3주간 관람기,TV에서가 아닌 현장에서 맞딱뜨린 올림픽은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과연 올림픽은 지루하다는 그의 생각이 이참에 파삭하고 깨졌을까?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한마디로 하루키의 호주 올림픽 취재기다. 물론 더 복잡하게 보자면 취재기에 여행기이며 수필집도 되고 스포츠 평론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서도...하루키 자신이 제막전서부터 폐막식까지 기나긴 대장정을 열심히 쏘삭거리고 다니며 쓴 글로,그가 좋아하는 육상경기는 물론이고,내가 왜 이걸 돈 내고 봐야 하냐며 투덜대던 러시아와 스웨덴의 핸드볼 경기,한일 야구전에서의 맹렬한 한국인의 응원과 철인 삼종 경기의 지상 중계,능력 천차만별이던 경기장의 풍경,호주 원주민 최초 금메달리스트인 캐시 프리먼의 감동적인 등장과 그녀의 존재의 의미,동물원 답사,웸벳을 만난 사연,코가 불에 타도 열심히 먹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코알라,선수 입장에 지루해 몸을 비트는 그의 모습과 살인적인 마라톤 코스,그리고 마라톤 주자들의 뒷이야기와 그 중간 중간 마주친 호주인들의 괴팍한 면면까지...확실히 그가 쓰니 올림픽도 달라 보였다.약간 삐딱하고,딱 매력적일 정도로 짓굳으며,까칠하고 입체적인 진실을 바라던 지성과 넘치지 않는 유머감각,적확한 표현력에 보태고 뺄 것도 없는 예민한 감성, 그리고 타고난 그만의 감각에 잡힌 올림픽이니,뭐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는가?
재밌냐고? 재밌다.작가 자신은 올림픽만큼 지루한 것은 없다고 엄살을 떨긴 하지만,그 여정이 지루했다면 이 책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었을지,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뭐,하루키가 김치 냉장고 메뉴얼을 써도 재밌다는 희대의 유머 작가도 아니고 말이다.물론 필력이야 따를 사람이 없긴 하지만서도...지나간 호주 올림픽을 추억하면서 책을 봐야 한다는 점이 좀 아쉽긴 했지만,그럼에도 하루키의 재치에 힘입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다.히루키의 어깨에 힘 뺀 듯 자연스러운 수필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매우 반가울 듯...올림픽은 매우 지루하다고 말하면서도 호주 취재 온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고 말하는 하루키.그는 브루스 채트윈이 쓴 은자와 왈라비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내가 인생을 지루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 이런 문장을 읽었을 때라고..." 더할나위 없이 동감이다.(참고로 브루스 채트윈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장난기 넘치는 하루키의 눈에 잡힌 호주 신문 기사의 한 단락,지나치기 아까워 베껴본다.올림픽이 끝이 난 뒤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호주 사람들을 위한 마음 가짐을 소개한 것이다.
1.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아도 됩니다.다 끝났으니까요.(모든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친절한 미소를 짓자는 캠페인이 있었다.)
2.4만 6천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일상 생활로의 복귀가 어려울 겁니다.누군가에게 길을 안내하고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발견하거든 당국에 신고 하세요.보호해야죠.
3.지도를 거꾸로 든 여행객을 목격해도 내버려 두세요.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요.
4.노숙자를 발견하면 미소 지어 주셔요.그들도 이젠 거리로 나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정말로 그랬다.)
5.셔츠를 다려놓고 빨리 침대로 들어갑시다.내일부터 업무가 시작되니까요.--기타등등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