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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ㅣ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암스텔담의 한 술집에서 과거 파리의 변호사였다는 한 사내가 옆에 앉은 취객(?)을 상대로 자신의 과거를 우울하게 읊조린다.한때 잘 나가던 인권 변호사로 고매한 인품을 만방에 떨치며 뭇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는 그가 어찌된 영문으로 타국의 외로운 술집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넋두리를 늘어놓게 된 것일까?
타고난 언변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성공 가도를 걷고 있던 그는 어느날 밤,다리 위를 지나가다 묘령의 여인과 마주치게 된다.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들려오는 풍덩하는 소리,그는 그녀를 구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가던 길을 간다.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그녀가 누구인지,진짜 그녀가 자살을 한 것인지조차 알아보지 않았던 그는 점차 자신의 내면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과연 나는 남들이 말하는 대로 가치 있는 인물일까? 내가 한 모든 행동들은 다 연기가 아니었을까? 더 이상 자신의 거짓을 지탱하지 못한 그는 고통을 피해 암스텔담으로 숨어든다.그곳에서 무명인이자 야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를 구하려 하지 않은 자신을 비난하고 심판하지만 자신의 몰락이 자초된 것이었으며 고통을 피할 길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벌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데...
조울증에 걸린 사내의 우울한 넋두리가 주사처럼 펼쳐지고 있던 소설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을 간단히 적어 보자면..
1.카뮈는 정말 글을 잘 쓴다.내 인생 어느 시절에 읽건 그의 책은 감탄의 대상었는데,이번에도 여지 없었다.군더더기 없이,횡설수설 하는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주제에서 한치의 벗어남도 없는 구성에 ,풍부한 상상력과 철학적인 주제,그걸 무리없이 풀어가는 능력과 통찰력,진지함,솔직함,신랄한 비판 의식,자아비판,신선함,그리고 고통을 직시하는 남다른 태도등등...짧지만 완벽했다. 이 정도의 완벽함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영원한 남편>이나 카프카의 <변신>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물론 카뮈의 <이방인>이나 <페스트>도 마찬가지지만...
2.이 책을 보면서 난 처음으로 카뮈가 조울증에 고통 받았을거란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게 됐다.그가 자살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니,<시지프의 신화>속에서 그토록 삶의 의지를 다잡던 것도 실은 이를 악물고 살아 보겠다는그의 의지의 천명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병이 주는 고통이 컸다는 것인데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아마 그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그걸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3.왜 그는 자살한 여자를 구하지 않았을까? 내 경험상 가장 쉽게 나오는 대답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였을거라는 것이다.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구해낸다고 해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하니 굳이 영웅적인 행동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그는 본문에서 자신의 삶이 한편의 연기였음을 열심히 설명한다.사랑도,봉사도,인류애 넘치는 행동도,거지를 도와주려는 마음도...그 모든 것이 가식이고 위선이었음을 자신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들 속아 넘어간다.드물게 민감한 여자를 제외하고는...그러다 그 어떤것도 뚫지 못할 것 같던 그의 양심이 다리위의 여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구멍이 난 것이다.그보단 우울의 고통이 심해지자 자신의 양심을 들여다 보게 된 것일거라는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지만...어쨌거나 그의 우울한 고백을 들으면서 난 무척 통쾌했다.드러난 진실의 통찰력이나 그럼에도 양심이 살아있게 하려는 작가의 선량함에 공감 되어서...
현실로 말하자면,이렇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끝내 자신의 양심을 고백하는 경우는 난 거의 보지 못했다.아마도 카뮈의 인간성이 어느정도 반영되서 이런 작품이 나온게 아닐까 싶다.
4.이 책의 마지막 단락을 읽으면서 카뮈란 작가를 다시 보게 됐다.이 사람은 도무지 인간 정신의 어디까지 이해하고 탐구하며 알아낸 것일까? 나와 자아를 분리하는 고찰은 어디서 얻은 것일지 소름이 끼쳤다.덧붙일 것도 없이 탁월한 지성이다.철학자요 문학가라는 말이 어디서 왔을지 이 책만으로도 충분했다.어떻게 한 책속에 두가지를 이렇게 모순없이 녹아낼 수 있는 지 카뮈의 재능에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프랑스 문학은 죽지 않았다고 올해 노벨상 받으신 르 클레지오가 말씀하셨다던데,글쎄.카뮈에 비하면 현재 프랑스 문학은 죽지는 않았어도 절음 발이상태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까 한다.고전에 버금가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던 완벽한 소설,프랑스에서는 카뮈가 잊혀지고 있다는 말을 얼마전 책에서 읽었다.안타까운 일이다.이런 작품은 되풀이해 읽어도 부족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