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이런. 이런 일도 있다니...믿을 수 없을 만큼 글을 잘 쓰는데 그것이 저주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가를 만나서,"흠,인생은 역시 공평한 것이었군." 이라면서 읽어 내려간 책이다.
내용이 아닌 작가때문에 공평을 운운해보긴 또 처음이다.
줄거리는 오스카란 8살짜리 소년이 9.11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다가 ,어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죽음도 비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는 성장소설이다.
뛰어난 상상력,주저함이나 막힘이 전혀 없는 문장 구사,마치 살아 있는 듯한 등장 인물들,아귀가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가는 구성, 9.11사건을 당하는 가족들의 긴박함과 두려움을 세련되게 묘사하는 방식에 시의 적절한 감상까지 덧붙여서 그야말로 휙하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그 완벽함에 놀라웠어야 했다.
그런데 그보단( 글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써,사악한 의미에서) 안도감이 드는 책이었다.
헛점으로 보이는 것들을 열거 하자면,
1.우선 말이 너무 많아서 수다스러울 정도다. 8살짜리 아이 오스카가 한가지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이 철학자가 죽음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것보다 많다는 것은 좀 억지가 아닌가? 그래서 오스카는 8살짜리 아이라기 보단 작가의 분신처럼 보였다.
거기다 상상력이 넘쳐나서 머리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다 쓰기로 한 것인지 아님 뭘 빼야 할지 감을 못잡아서인지, 그도 아님 한가지 사건에 하나만 써내려 간다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불안에 시달려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이 제목 그대로 엄청나게 시끄러웠다.언제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열거 되던데,이건 시험 답안지가 아니지 않는가?
적확하게 쓰는 단어 하나가 오히려 명확성을 살려 주었을텐데...
다다익선이 다 좋은 건 아니란 것과 절제, 군더더기 없음의 미학을 알려주는 사람이 작가의 주변에 없었나 보다.
2.울림이 없었다.공감이 되서 밑줄을 그을 말이 하나도 없다니, 신기록감이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에 대해서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통렬히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있었다.제 5도살장을 쓴 커트 보거네트와 얼마나 비교되던지.격이 달랐다.
글쓰는 재주는 타고 났을 지도 모르지만, 깊이의 차이는 현저했다.
걸러진 감정,억눌러지고 순화된 고통이라고는 조금도 없는,TV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감상적인 아픔만이 있을 뿐었다.그러니 고통마저 아름답고,내려 꽂히는 폭탄세례도 우아하기 그지 없다.
고통을 먹어야 좋은 책이 나온다더니 ,풍요속에서 자란 현재 미국의 젊은 작가들의 한계를 보는 듯해서 샘통인 기분이 든다.
3. 등장인물들이 줄곧 감상적이라는 점도 눈살을 찌프리게 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나른한 감상을 공유한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지성적인 면도 별로 없는 단지 빛나는 글 재주 솜씨를 자랑하는 책이었다.
경박성을 간신히 벗어난 고급 대중소설이라고 하면 딱 알맞는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글 솜씨는 찬란하기에 별점을 4개로 한다.어쩜 폴 오스터처럼 그도 나이가 들어 가면서 무게가 실린 책을 쓸게 될지도 모르겠다.그가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풀어 나갈 지 다음 작품이 자못 기대된다.
전쟁통에 사랑을 잃고 무너진 사람이 다시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는 장면이 나오던데,읽어 가면서 이 작가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쓴 것일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그저 독자들에게 감동을 받으라고 던져준 미끼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너무 냉소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