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 최신 언어로 읽기 쉽게 번역한 뉴에디트 완역판, 책 읽어드립니다
혜경궁 홍씨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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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 헤경궁 홍씨 /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마음에 화가 있어 사람이나 닭이나 짐승을 죽여야 기분이 나아집니다."

"자살해야겠다."





혜경궁 홍씨는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빈, 정조의 친모로 홍봉한의 차녀이다. 임오년(1762년 정조38)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을 겪고 부친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죄목으로 부친과 작은 아버지 그리고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정조 재위 19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순조 1년에는 자신의 친정 집안이 홍국영의 모함으로 당한 억울함과 부당함을 밝히고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일기를 작성했다. 이름하여 <한중록>이다.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동갑으로 10살에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와 영조와 정성왕후, 선희궁을 모시며 이쁨을 가득 받는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병증이 깊어지고 영조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임오년에 화변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시집에서 시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남편이 죽임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의 사건을 겪는 것이다. 과부가 되어 자신과 아들마저 생사를 부지하기 힘들 상황을 맞이한 것.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영조의 친모는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로 궁녀중 최하위 무수리출신이다. 이 때문에 영조는 평생 태생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노론의 힘을 입어 경종의 세제로 책봉되고 경종이 죽고나서 즉위한다. 그러므로 재위 내내 노론으로 힘이 실어진다. 영조는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내리 딸만 낳다가 어렵게 얻은 사도세자를 보통 7~8세에 세자로 책봉하는 반면 1세에 세자로 책봉한다. 그만큼 기다렸고 사랑한다는 뜻. 그런데 후궁의 아들로서 어린시절을 궐 밖에서 지낸 영조는 백성들의 삶을 잘 알았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다스리고자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노력파인 반면 사도세자는 글보다는 무예에 더 타고난 자질이 있었던 것. 모든 것이 맞지 않는 부자간이었다.



사도세자가 성장하면서 영조는 세자를 직접 교육시키지만 그럴수록 사도세자는 움츠려들어 영조 앞에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게 된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는데 부담이 컸던 사도세자는 병증이 생긴다. 영조 재위 동안 총 다섯 번의 양위를 하겠다는 영조때문에 석고대죄를 하고 사도세자는 물론 궐을 발칵 뒤집어 놓는 영조. 사도세자의 말을 들으면 귀를 씻고 자식 편애가 심했던 영조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 명을 내린 것. 죄인의 자식은 왕이 될 수없으므로 세손(정조)을 생각해서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고 뒤주에 가둔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세손(정조)을 보호했던 홍봉한은 성균관 유생들과 관료들로부터 탄핵과 비난을 받는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비난과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를 영조에게 바쳤고 권력을 남용했으며 정조대신 다른 이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는 비난을 받고 동생 홍인한은 사약을 받고 그는 2년 후 사망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혜경훙 홍씨는 정조 재위 당시 이 <한중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탄핵했던 이들, 그리고 끊임없이 모함했던 화완옹주와 그의 아들 후겸과 정순왕후의 동생 김귀주, 홍국영 등의 일화가 기록되어있다. 정조로부터 외할아버지의 충절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고 친정 집안의 신원을 약속했다는 점도 언급한다. 당시 왕이 약속을 했으므로 혜경궁 홍씨는 세간에 두루 읽혀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250년이 훌쩍 넘는 지금까지 기록이 남아 후손들이 보고 있으니 혜경궁 홍씨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한중록>은 실록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 이외에 야사로 가치가 있으며 궁궐에서 살며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만한 사람이 썼고 궁중용어나 궁중풍속을 알 수있는 궁중문학으로 손꼽힌다. 또한 혜경궁 홍씨를 통해 조선시대 여인의 생활상과 그녀의 구구절절한 심정과 아픔이 전해지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어찌 보면 한 여인을 통해 그 가족사가 정치적으로 결부되어 슬픈 역사가 된 <한중록>. 다시한 번 자식사랑에 대해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기록이다.



읽는 내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데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들이 탄생했는데 그아들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 키우려했던 자식편애가 심한 영조의 사랑이 너무 씁쓸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데 어찌 저리했을까 싶고. 그러나 보통의 사람이 아닌 나라의 국본인 세자를 왕으로 키워야했던 영조의 심정을 헤아려보기로 한다. 병증을 앓고 있는 이가 왕이 되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었을까 고민의 고민을 했을 터. 결국 세손(정조)를 위해 그를 죽일 수는 없었던 던고로, 그러나 그는 그렇게 기다렸고 사랑했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매정한 아버지로 그의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들로 역사에 남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중록>이 남았다.




"지금 나의 이 말이 사람의 도리로선 해선 안 될 말이겠지만

세상에 없는 일을 겪으시니, 차라리 그 병환으로 

돌아가셨더라면

여읜 아픔만 있지 않겠는가.

당신의 설움과 처자의 지극한 원이 이 정도이며,

사건의 망극함과 사람의 상함과 내 집이 원통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하늘의 도리를 알지 못할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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