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작가와비평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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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흔히 (서양) 중세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역시나 그 '개인'의 삶 가운데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종교의 구속력... 특히 사실상 학문적 개념과 이념을 넘어서, 생활방식에 있어서도 그 그림자를 드리웠던 실질적인 모습과 (그것이 만들어낸)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였다. 때문에 이루 르네상스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의 영향력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한 시대' '고대. 그리스 로마문명의 부흥' '보다 자유로운 철학과 예술의 형태가 표현되기 시작한 시대' 로 이해하고 있는데, 물론 나 또한 그러한 설명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이 책 속에서 발견한 '한 개인의 기록'을 통해서, 보다 세세한 르네상스인의 정서?를 알 수있게 되였다는 계기를 통해 결국 내가 나름대로 이해한 르네상스인에 대하여 한번쯤 글을 쓰고 싶었다.

젊은시절 문법학자 프리스키아누스를 읽고, 나중에는 (대) 플리니우스를 읽고, 또 최근에는 노니우스 마르켈루스를 읽고 얼마나 많은 알지 못하는 책 이름을 알게되고 얼마나 자주 군침을 흘렸던가. 그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는 끝이 없을 겁니다.

328쪽

이처럼 페트라르카 서간문의 내용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르네상스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또는 공화주의자?) 저자는 흔히 '중세인'이라 생각해온 많은 인식들과 비교하여 다른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개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목표를 부지런함과 성실함 그리고 끝없는 학문의 탐구라 정의했고, 특히 고대 로마의 인상적인 위인과 국가관을 사랑한 나머지 '아프리카' (스키피오)의 이야기를 집필했다. 또한 이에 지식인이자 문학인으로 성공하는 명예를 자랑스러워 했기에, 이에 보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면면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데. 바로 그러한 조화?야 말로 이미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가 지닌 가장 큰 개성이 아니였는가? 하는 생각이 미친다.

그야말로 종교와 (고대)문화가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는 시대. 그리고 그 현상이 크게 박해받고 외면받으며, 또한 바쁜것이라 배척받는 것이 아닌, 예의 예술가들과 문학가 그리고 지성의 이름으로 녹아들어가 보다 자연스러운 융화과정을 겪어낸 것이야 말로 보다 그 시대를 보다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서간문 뿐만이 아니라 '칸초니에레'와 같은 사랑의 시, 인간의 삶 가운데서 가장 역동적인 감정의 표현일 수 있는 어느 것에 대한 많은 기록을 접한 기억이 있다. 물론 이러한 많은 것을 접하였을때, 오늘날의 현대인은 그것이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것이며,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발전해온 '자유'의 영역 아래의 역사라 그저 이해하고 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전환점' 또는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이 모든것이 어느 소수의 선지자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닌, 첨차 구축되어가는 기술과 사회발전의 진행...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변화하는 필요성과 그 실현이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다 더 나은 내일' 을 희망하는 현대인들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사회의 안정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축척하고 계승되고, 발전되어가는 의료와 다른 많은(농업.물류.산업) 서비스가 그 바탕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서간문에서, 어째서 그가 성실함을 미덕으로 생각했는가? 고대 로마의 많은 장점을 추구하였는가? 에 대한 그 많은 부분에 대한 이유를 따진다면, 결국 그것이 '인간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 (저자) 그가 믿어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갈리아인에게 이탈리아가 신하로 조롱당하는 시대'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하여 보다 더 안전한 또다른 장소인 '데카메론' 이 표현되면 시대 또한 앞서 찬란하다 언급했던 페트라르카의 삶에 비추어진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결국 저자가 그토록 원했던 '로마'란 보다 인간에 의해 질서와 안정을 완성한 시대. 그리고 그 바탕아래서 로마의 문화를 꽃피운 시대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담겨있기도 하나는 감상 또한 받는다.

이처럼 그의 서간문에서는 개인의 목표, 후대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가 원하는 (실질적) 세계의 안정과 번영에 대한 많은 부분에 대한 르네상스적 가치가 녹아있다. 휴머니즘, 그리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추구한 한 지성인의 한 목표를 엿보고 싶다면 나는 분명 이 책을 권할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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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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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철학과는 다르게,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나름 인류사 모든것을 포괄한 것 뿐만이 아니라, 무언가 현실의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필요한 (어느) 실질적인 가르침을 얻기 수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들여다보았을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모습은 앞서 기록한 것과는 반대로, 각각의 현실에 있어서 이용당한 인문학의 모습을 들추고, 지적하고, 보다 올바른 모습의 인문학이 어떻게 정의되고 활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 나름의 믿음이 굳게 자리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이처럼 나 개인의 학습과 인식에 있어서도, 흔히 지성을 마주하려는 시도에 비추어 흔히 '대세'를 따르려고 했다. 그야말로 학교의 필독서로 그리스.로마신화가 추천되고, 정작 조국의 역사와 철학을 마주하기보다 서양의 고대철학을 접하려고 했으며, 더욱이 고대 이집트 등의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서양세계의 정복과 전쟁과 같은 소위 영광의 시대라 포장되어 온 서양사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결국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리 될 수 없었던 다른 문화권(문명)에 대한 비판의 눈초리를 보내며, 이른바 '학문의 권장'에 고개를 끄덕이던 때가 젊은날의 나의 모습이였다. (아니,그것이 세상의 상식으로 통할 때가 있었다.)

물론 저자 등이 그 흐름을... 역사를 부정하라는 메시지를 위해서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 그리고 더 나아간 미래의 인류를 생각하며, 이른바 인문학은 보다 참된 인간의 가치를 빛낼 더 높은 인식을 주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학문이 되어야 마땅하다. 는 것이 어쩌면 이 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감상이 든다.

서양 고대가 그리스.로마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의 역사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기보다는 위대한 역사로 숭상해왔다.

159쪽

때문에 점차 비평을 넘어서 드러나는 주장에 따르면, 저자 개인의 삶 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주장에 이르는 많은 것이 매우 진보적인 것으로도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강대국의 논리와 승자의 논리가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 속에서 결국 인문학의 가치 또한 그에 따른 변명거리를 제공해 왔다. 예를 들어 '제국의 길'을 언급한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의 인식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애써 외면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게다가 흔한 역사가 아닌, 그 결과가 낳은 인식에 있어서도, 인문학은 계급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문명간의 선진과 야만을 나누는데 쓰이며, 세상에 갈등과 차별을 낳았고 또 그것이 폭발한 전쟁을 정당화하는데도 쓰인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 저자는 이 모든것을 시대의 흐름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 오롯이 인문학의 거짓과 타락?이라 주장하는 것 같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느낀 진보의 메시지 또한 지금까지 의심치 않았던 많은 교훈과 가치에 대한 비평과 지양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였다. 그렇기에 이에 그 메시지를 마주하는 독자들 특히! 국가의 존재와 사회를 결집시키는데 있어서 활용된 (상식이라 생각되어진) 현실 속의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나는 그 감상이 사뭇 궁금해졌다. "희망하는 모든 민족이 독립의 길을 걸어야 평화와 인권이 보장된다"는 말을 혹 중국 등에 넌지시 던져보면 어떠한 반응을 할까? 물론 개인적으로 그 주장이 오롯이 어리석다,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은 힘의 논리 위에 드리워진 불평등, 번영을 위한 희생과 강요, 그리고 자칫 최악으로 흘러갈 상황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정의론의 하나로서, 이를 인문학이란 더 높은 것을 향하는 추진체가 아닌, 최악을 막는 브레이크로서 생각하는 '나'는 분명 저자와는 다른 생각과 정의를 가지고 있다. 새삼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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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 겸산 홍치유 선생 권학가, 2020년 지역출판활성화 사업 선정 도서
홍치유 지음, 전병수 옮김 / 수류화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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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듯 펼쳐보았을때 그 주제를 알 수 없었던 책... 그러나 의외로 (그 내용을) 접하다 보면 오늘날에도 끝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속의 학문의 흐름이 그 바탕에 깔려있지 않은가? 하는 감상을 받는다. 각설하고 처음 주자학을 더해 퇴계 이황의 계보를 따른다는 것과 같이 옛 정통성?을 드러내는 서문에 있어서는 솔직히 나 스스로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였다. 특히 이미 대세를 떠난 '한학'의 지위와 그 가치에서도 오늘날 바쁜시대에 걸맞지 않는 낡은 학문, 더욱이 아주 오래전의 가치를 되내어, 보다 보편적인 도덕을 강조해 온 것이 바로 한학의 존재이자, 그 한계라고 생각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 책 또한 그 옛 가치의 계승을 위한 책에 그칠 수 있다는 예상을 했지만, 의외로 더욱 더 깊이 읽어내려가다보면, 과거 근.현대의 한반도... 예를 들어 성리학의 마지막 지식인? 로서 마주한 세상의 흐름과 해석 그리고 이후 암울한 미래의 불확실함을 마주하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가치'는 무엇이었나? 에 대한 나름의 기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데 있어서​, 나는 이에 큰 의미를 발견하였다.

물론 책 속의 주제는 '학문이 천성을(옳은 방향으로) 바꾼다'는 본래 성리학의 골자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이에 '공자 왈' 태평성대와 존귀한 인품을 향한 끝없는 주문과 필요성에 대한 주장에서, 예나 지금이나 이를 배우는 학생들은 쉽게 지치고 또 지루해하지만, 때문에 이 책에서의 '노하우'를 전하자면 예로부터 이를 노래로 지어 부르면 더 재미있고 쉽게 마주하고 학습 할 수 있단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여 태평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기에, 늙은이의 한마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시오.

278쪽

안타깝게도 역시 문자와 활자의 연속인 책을 통해서, 그 노래의 음율을 이떻게 되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암기를 하려고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나라 조선, 그리고 그 조선의 마지막과 병탄의 과정, 이후 일본의 항복과 군정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있어서, 이 책의 글은 분명 그 시대속의 저자가 이 각각의 사건을 마주하고, 또한 저마다의 학문적 잣대를 통해 이를 비판하고 또 해석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이를 기록하는 활동(또는 전파하려는) 을 활발히 벌였다는 것을 증명한다는데 있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성리학이... 그 골자가 근.현대사의 흐름을 따르지 못한 '못난 학문'이라 여기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닌가 하는 감상이 미친다. 흔히 사람이 선.악을 판단하고, 보다 예의를 차리고 상대를 마주하는 개인의 영역에서 지금도 한학의 가치는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세계의 정세와 국가의 국방,정치,사회의 건강함을 측정하고, 마주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과연 오늘날에도 한학은 그 얼마까지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에 적어도 이 책은 그 어느 순간의 '시대'에서 활약한 한학의 역활 '한학을 바탕으로 본 세계 눈'을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독자는 적어도 옛 학문과 지성, 그리고 그에 따른 사고방식이 그저 낡고 고루하고, 답답한 것이 아니였음을 알고 또 나름의 한학의 역활에 대한 재인식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감상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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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여왕
가와조에 아이 지음, 김정환 옮김 / 청미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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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 책을 마주할때, 분명 어떤이는 '어느 교육적 목적을 위해 지어진 책' 그야말로 교육만화나 이야기책 과 같은 눈높이로 이를 마주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순전히 재미와 가독성... 특히 등장인물의 매력과 함께 드러나는 저자의 창의성 등이 오롯이 발현되는 소설은 결국 그 (소설) 자체만으로 평가되기에, 보다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지만, 반대로 이와 같은 소설은 먼저 내용 뿐만이 아닌, 다른 목적까지 충족시켜야 하기에, 일반적으로 이 두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지만, (나의 경험에 따르면) 그 성공의 예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이 소설의 교육적 목표는 '컴퓨터의 연산' 그리고 '수학의 영역에서의 연산'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기에, 흔히 수포자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나로서는 흔히 줄거리를 떠나, 그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도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물론 어느 가상의 세상 속에서, 운명의 수가 창조되는 서사적 표현 그리고 결국 그 수를 독점하며, 함부로 남용하기 시작한 여왕의 존재와 함께 서서히 대중과 인간 사이에서 잊혀져가는 운명수의 존재와 그 접근법을 사이에 두고 '운명의 구원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주인공 나쟈의 이야기까지의 그 광범위한 줄거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저자 스스로가 보다 정교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옛 고전과 현대적 감성과 창의성을 배경으로 한... 그야말로 또 다른'오리지널'을 낳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본다.

인간이나 요정이 (최고신의 수) '1'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삶을 마치고 존재 그자체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야

384쪽

그러나 그 노력이 최종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수학의 입문'을 이끌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안타깝게도 나는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다. 아니! 본래 교육을 목표로한 수 많은 창작물의 한계가 역시나 이 책에서도 오롯이 드러났다고 표현해야 하나? 역시나 이 소설 또한 보다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흔히 줄거리 속에서 왕비의 목적과 야망을 이해해도, 이를 위한 수단과 방법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는 이 소설을 온전히 즐겼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이처럼 줄거리의 뼈대를 이루는 운명수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계모인 여왕과, 그 여왕을 두려워하고 때론 부정하려고 하는 나쟈 사이의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줄거리만 남는다. 그렇기에 독자는 최종적으로 이 책을 두고, 백설공주의 아류작으로서 읽어 넘길 것인지, 아니면 보다 정교한 메시지의 판타지로 읽어 소화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길은 어렵고 머리가 제법? 아프겠지만 그래도 이를 창조한 저자의 노력을 생각하면 응당 독자 역시도 도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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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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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주하자 든 생각이 있다. 실제로 나 스스로가 '수집'이라는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이후 남겨질 그 많은 물품 중에 (특히) 어떠한 것이 나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줄까? 예를 들어 지금도 높은 가치를 지니는 물건이 이후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투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나의 메모와 장서인(도장)이 찍힌 낡고 닳은 책 한권, 그리고 그 한켠에 끼워져 있는 네잎클로버 하나에 이르기까지 이에 어쩌면 그 책 한권이 여느 금화보다 더 '나'로서의 색을 더 잘 간직하고 또 전해줄 수 있는 아이템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문제는 나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정의를 내리고, 또 준비하는 과정을 겪은 것과는 달리, 세상에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 스스로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또 숨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에 있다. 그야말로 죽음 이후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에 더해 어쩔 수 없는 사고와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계승할 무언가를 후대에 전하지 못하고 차츰 망각 속에서 스러진다.

이처럼 이 책 속의 '침묵 박물관' 에도 그 소설 배경속의 인물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죽음 이후의 '유산'을 수집하고 전시하려는 목적을 공유하며, 차츰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박물관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것을 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어쩌면 이 둘은 같은 '외지인'의 경계에 서서 침묵 박물관이 만즐어져야 하는 이유와 목적에 있어, 그 많은 부분에 대한 의문과 정당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공통점은 유품이라는 단어뿐이였다.

299쪽

그도 그럴것이 배경이 된 마을은 단순히 폐쇄적이기도 하지만, 최근까지도 공동체의 관습법이 남아 '역사적으로' 독특하고 끔찍한? 행태의 기억이(또는 그 잔재가) 남아 있다. 때문에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뢰인'은 그 역사를 보존하는 시도를 넘어서, 보다 더 광적이고 집착적인 모습... 예를 들어 (해당)모든 죽음의 상징을 수집하고 전시하려는 열망을 강요?하며, 심지어 주인공에게 침입과 절도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이에 정상적인 인물이라면, 그 강요를 거절하고 또 그 박물관의 존재의의 또한 부정하는것이 옳을 것이나, 어째서인지 주인공은 그 주인과 소녀, 그리고 주변인물의 묘한 열정과 목표에 감화되며, 삶의 증거물을 수집하고 또 정리하려한다.

그렇기에 결국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서 보다 많은 죽음의 형태를 엿보게 된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에서도 스스로 죽음 이후를 대비하고 또 정리한 깨끗한 죽음따위는 극 소수에 불과하다. 반대로 바로 어제까지 최선과 최하의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 그야말로 마을의 명사로서 죽은 사람과, 뒷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스러지듯 사라진 죽음의 모습은 분명 그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드러나지만, 반대로 죽음 앞에서는 같을 수 있다는 감상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일까? 결국 매춘부의 피임링에서, (표면적으로)존경받던 의사의 수술도구, 그리고 어느 살인사건 속 죽음을 상징 할 수 있는 증거물에 이르기까지 그 수집과 전시 그리고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개요는 곧 '삶의 증명'으로 압축 될 수 있다. 말 그대로 망자가 살았던 증거물로서의 유품으로서, 그리고 그 유품을 모아서, 정리하고 전시함을 삶의 목표로 전환한 주인공의 행동 이 이모저모의 최종적 종착지는 결국 죽음을 망각 속에 던져넣지 않겠다는 산 자들의 집념과 집착 그리고 삐뚤어진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

때문에 이 집착이 만들어낸 박물관의 모습은 분명 (전시품으로 판단하면) 초라함의 극치 이겠지만, 반대로 그 스토리와 정신적 가치로 접근해보자면 간신히 고대 이집트의 정신세계와, 근.현대의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예술미의 경계를 오고가는 형태를 지닐 것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것이 침묵 박물관이란 흔히 죽음에 대한 의문과 탐구, 그리고 망자에 대한 예의와 추억의 장으로 만들어진 학술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반대로 그 박물관은 그저 '인양선'에 가깝다. 흔히 죽음의 바다에 침몰한 인생의 배... 그 표류물을 탐욕스럽게? 모아온 것에 대하여, 어쩌면 주인공은 그 탐욕에 번호을 붙이고, 장부를 정리하고, 보기좋게 나열한 단순한 실행자이자 (나름의) 이해자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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