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걸 - 노벨 평화상 수상자 나디아 무라드의 전쟁, 폭력 그리고 여성 이야기
나디아 무라드 지음, 제나 크라제스키 엮음, 공경희 옮김, 아말 클루니 서문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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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정부는 이슬람 국가 IS의 붕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IS는 여전히 위협적' 이라며, 계속하여 그 영향력과 폐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물론 나 스스로 또한 이슬람 무장단체를 우호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슬람의 종교적 교리를 멋대로 해석해 폭력과 점령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같은 '인권유린의 피해자' 를 만드는 명분으로 활용했다.   그렇기에 한때 IS점령지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개되었을때 '현대의 문명인'은 그 야만스러움을 접하며,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그야말로 인류의 문화유산을 폭발시키고, 믿음을 강요하며, 심지어 사람을 처형하고, 매매하는 사실을 마주하며, 분노를 하지않는다면 그것이 정녕 현대인이라 할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이 이슬람무장단체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옛 중세의 시대상에서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이를 토대로 여느 사람들은 이슬람의 야만성을 주장하고, 또 공격하는 잣대로 삼지만, 굳이 이에 변론을 하자면, 그것은 이슬람이 가진 한계이지 이슬람의 존재 자체가 '악'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분명 그들(IS)은 이슬람의 근본주의라는 명목을 통하여 한 여인의 삶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에 저자 스스로의 기억에 따르면, 그들은 그녀와 그녀가 속한 공동체를 '이교도' 라는 명목으로 학살하고 또 유린한다.   허나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과거 이슬람 근본주의의 그늘아래 드리워진 국가 IS의 모습 또한 이러한 야만을 당연한 순리로서 인식하고 또 공인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슬람 근본국가 속에서 노예 또한 하나의 신분이고, 그들을 공인하는 관서 또한 국가행정중 하나이며, 그들을 거래하는 노예시장 또한 경제활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여엿한 판매책이다.


때문에 이를 묘사하는 저자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녀는 그들의 만행과 폭력에 대하여 조금도 용서를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실제로 그 아무리 순화되고, 또 돌려표현되었다 해도, 결국 노예로서 그녀가 겪었던 모든 사실들은 정말로 그녀 스스로가 이겨냈다는 것 자체가 용할 정도로 끔찍하고 또 적나라하다.     차라리 개종을 요구하는 것이였다면 나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저자를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권리' 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소유했고, 그녀가 복종하지 않으면 그 기세를 꺾어버리기 위해서 뭐든지 했다.   


그렇다 '뭐든지 했다.'


세상에 이처럼 무서운 의미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날 현대의 인권의 의의는 물론 그 스스로에 대한 권리도 있지만 상대를 위한 권리의 제한 또한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가 표현한 IS속에서는 그러한 인권의 개념이 없다.   오로지 정통 이슬람을 계승한 우월한 '민족'이 다른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유린하여 이에 따른 승자의 권리만을 오롯이 누리고 또 휘두른다는 옛 야만의 가치관 만이 이야기 내내 질릴 정도로 드러날 뿐이다.     그렇기에 학살당한 남자들, 성노예로 끌려간 여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 '증언자'가 되기까지의 이 모든것이 사실이라는 것에 커다란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니... 감히 저자의 불행에 대하여 이해하려 하거나 동정을 표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족이 몰살당하고, 친척 혈육과 강제로 헤어지고, 복종을 강요당하고, 노리개로서 유린당하고, 팔리고, 팔리고... 과연 이러한 삶을 이겨내고 또 탈출한 저자의 의지는... 그리고 세상을 향해 '정의'를 주문한 저자의 의지는 그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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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에 사는 여인
밀레나 아구스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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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시절 사람은 누구나 꿈을꾼다.   그리고 그 꿈은 점차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과거의 뭉뚱그려진 모호함을 벗어나, 보다 뚜렷해지게 되는데...  문제는 언젠가부터 그 꿈꾸어온 삶의 목표와 가치관들이 비단 자신의 각오와 욕망?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때론 '타인에게 있어서도 '자신'을 측정하게 할 나름의 척도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꿈과 낭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멋진일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매우 뜨겁고 격렬한 사랑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 또한 (오늘날의 가치관에 따르면) 전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배경은 세계2차대전이 발발한 이탈리아의 한 섬마을이다.   그야말로 근대의 열악한 사고방식과 파시즘에 물든 권위주의가 팽배한 (이른바) '전쟁을 겪고있는 나라' 속에서, 그저 사랑만으로 살리라 결심한 여인의 존재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존재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리라.


때문에 그녀는 가족에게도 '음란한 여인'으로 낙인찍힌다.


세상 여인으로 태어나면 마땅히 가족에게 헌신하고, 근면하며, 정숙한 아내로서, 새로운 가족을 꾸려야 하지만, 소설속 여인은 그러한 당시 평범한 아낙네의 삶을 거부하며, 친아버지에게 타박받고, 또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기회'를 잡은 여인은 불처럼 격렬하다.   그야말로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짧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표현된 사랑의 방식은 진정 이것이 '문학의 영역인지 아니면 단순한 퇴폐적인 가치를 즐기는 음란한 소설인지' 그 영역의 차이점에 대하여 궁리할만큼 적나라하고 또 대담하다.    때문에 어디까지나 나 스스로의 감상에 따르면, 이는 분명 나의 내면 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가치관'을 들추어낸것 같은 불편함을 주었다.    솔직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것이 아닌가?   비록 주인공은 스스로 로멘스와 성욕이라는 가치관에 집착하는 존재로 비추어지지만, 이를 조금만 바꾸어보면 꿈과 낭만에 집착하는 사람도 이처럼 '추하고 이기적으로 보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주인공 또한 한 순간의 판타지를 겪은 이후, 아주머니, 할머니라는 존재가 되어가며, 점차 세상속 여느 사람의 존재로 변하여 갔다.

이에 어쩌면 철이든다 라는 말은 이러한 변화의 순간을 표현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영원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돌변하고, 또 끈덕지게 무언가를 갈구한 '나' 이에 이 소설은 후자의 가치관에 대한 나름의 이야기를 풀어간 것이 아닐까? 물론 이탈리아의 화끈한 '사고방식'을 뒤섞은 그들 특유의 이야기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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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박각시
줄리 에스테브 지음, 이해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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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예술영화를 접하게되면서, 나는 아쉽게도 그 영화가 표현한 많은 메시지에 대하여 소위 '벅차다'는 감상을 자주 받는다.    물론 제작자는 (개인의) 그 쏟아지는 창작욕과 예술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예술?이라는 세계에서만큼은 보수적인 집장에 있어서, 결국 영화든 추상화든, 행위예술이든?  모두 초월적이고 또 함축적이다 느끼게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이처럼 '내'가 이 소설을 드러내기에 앞서, 위의 예를 든 까닭 역시 이 책 또한 그 내용 등이 너무나도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등장하는 주인공의 행동과 가치관 등은 이해하지 못할것은 없어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 있어서 나 스스로가 왜? 라는 의문을 끝까지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소설속의 여자는 성숙하고 관능적이며, 심지어 남자들의 욕망을 유도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존재로 표현된다.  때문에 주인공(여성) 스스로도 그것을 장점으로 이해하고 또 과감히 드러내는 것을 선택하면서, 결국 자신의 삶 그리고 파리의 하루하루를 쾌락과 환희의 시간으로 보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결국 그녀에게 있어서 하룻밤은 합법적인 마약과 같은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주인공 스스로가 아직 매력적인 여자임을 확인받는? 나름의 중요한 의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 행위를 통해 얻어낸 '증거물' 은 결국 그녀에게 있어 자랑스런 트로피와도 같은 것이지만, 결국 그것을 접하는 '나'는 그 의미와 목적에 대하여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주인공의 행보는 문제가 있다.  과감한 노출, 그리고 문란한 성 생활... 이 모든것이 단지 스스로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가늠하기 위한 것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질적인 가치관으로 다가올 수 있다 여겨진다.    그러나 의외로 세상 많은 '예술'은 이와같은 가치관을 세상에 드러내왔다.  '나를 채워줘'  이처럼 쾌락으로 아픔을 덧씌우고, 지우고, 애써 외면하려고 한 과거 수많은 비련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보자.  그렇기에 어쩌면 이 소설 속 문란함 또한 독자들에게 있어서, 고독과 상처 그리고 어리석음과 같은 인생속 가치관으로 재해석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해석으로 주인공을 바라본다면?


결국 주인공은 삶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그 무언가에 대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가련한 여인'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그녀는 필사적으로 위로와 존엄 그리고 해방을 갈구했지만, 결국 그 넓디넓은 파리의 세상속에서, 그녀가 가져간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저 순간순간 스파크일듯 느끼는 강렬한 쾌락만이 그녀를 살게하는 유일한 '약'이 되어줄 뿐이다.


고독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때때로 고독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거두며, 이 사회에 있어서 가장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때문에 주인공 역시 쾌락을 통하여 그것에 도망치려 했고, 또 나 역시 그 도주의 의미를 해석하며 나름 그녀의 문란함에 이유가 있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자가 표현하려 한 가치에 대해서만큼은 이미 언급한대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현대인들은 모두 고독에 지지않기 위하여 쾌락을 탐한다.  그러나 주인공처럼 통념과는 거리가 먼 원초적이고 또 동물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실제로 그녀는 세상에 등 돌리지 않았고, 실망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거나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위로를 위해 필사적으로 남자를 찾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 행위에 이어 인연과 연속성을 더 추구하지 않고, 마치 일회용기 다루듯 그 기회를 내버리려 하는것일까?  결국 시간은 그녀의 장점을 앗아갈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어째서 외면하는가?  정말 모르겠다... 어쩌면? 혹(나 스스로가) 좀더 인생을 살다보면?  그것을 이해하고 또 납득 할 수 있을까? 아니 정녕 그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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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한 재판 - 소년부 판사, 소년법을 답하다
심재광 지음 / 공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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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청소년들의 범죄 등을 바라보면, 분명 이 성격은 과거에 비해서 보다 잔혹해지고, 또 지능화되었다는 생각을 남기에 한다. 때문에 사회에서는 (청소년에 의한) 일부 용서받지 못할 잔혹 범죄에 대하여, 성인과 다르지 않은 법 집행과 처벌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대한민국 사회의)현실성을 바라보았을때 그것은 실현시키기 힘든것이기에, 이에 아마도 위와 같은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소년법 자체가 '미성년을 보호만하는 법률'로 비추어 해석될 수도 있을것이다.


물론 냉정하게 생각하면 비단 소년법 뿐 만이 아니라, 민.사법 모두가 개인 단위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집행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진정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원한을 생각한다면 가장 원초적이고 직효성이 있는 함부라비식? 법 집행이 최고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였으면 따라 죽이고, 손해를 입혔으면 똑같이 되갚아주고, 만약 그것으로 모자라다면 직접 피해자들의 가족들에게 노예로쓰던 말던 마음대로 하라 던져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위와같은 고대사회와 차이점이 크다.   그야말로 보다 복잡하고,문명화된 국가.사회의 공동체로서, 법률 또한 단순히 지배하고, 강제하고 처벌하기 위한 본래의 가치관에 더해 자유.평등.박애라는 보다 근.현대적인 인식을 더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분명 소년법 또한 그러한 현대적인 해석과 가치관을 품은 하나의 법률로서, 나에게 이해되기는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과연 이 법이 오늘날 청소년들에 의하여 생겨나기 시작한 범죄에 대하여 강한 억제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현실성에 대한 의문이 그리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실제로 이 세상 아무리 선진화되고, 또 깊은 의미의 사상과 법률이 존재한다 해도, 결국 그것이 온전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기대와 다른 한계를 드러낸다면? 결국 그것은 악법보다도 못한 것으로서 외면당해야 마땅하다.


때문에 나는 이와 같은 의문을 품으며 '판사의 글'을 접했다.


과연 오늘날 소년들과 마주하는 법관들은 그 스스로의 한계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법이 정한 용서와 처벌의 가치관을 통하여, 과연 어느정도의 청소년들이 그 스스로들의 죄를 뉘우치고, 또 속죄하려 노력할까?    이에 결과론적으로 정의하면, 분명 소년법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소년법의 존재가 이 사회에 꼭 존재하고, 자리잡고 또 서서히 진화하기를 원한다.    분명 겉으로 바라보면 소년법은 보다 너그럽다.  그러나 그 너그러움이 보다 더 잔혹하고 대담한 범죄를 이끌어내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주장한다)  그도 그럴것이 소년법은 단지 단죄의 가치를 지니지 않을 뿐 법률 본대의 엄격함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면 소년법은 끈질기게, 속한 소년들의 속죄와 변화를 추구한다.


세상에는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이에 저자는 위의 속담의 가치를 부정하는 가치의 글을 남겼다.   혹 이 세상에 법과 인식이 잘못을 단죄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결국 이것이 이어져 등장할 사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물론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기회를 주고 이끌어가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그것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겨오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또 바로 그렇기에 이처럼 저자는 이것들이 의심받은 오늘날의 인식에 다시 한번 (독자들의)이해를 구하고 있다.    청소년은 아직 구제 할 수 있다 라는 믿음을 드러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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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 Off - 휴대폰을 내려놔. 그때부터 인생이 시작될 거야!
스테판 가르니에 지음, 최진영 그림, 권지현 옮김 / 큰솔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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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을때, 엘리베이터에 오를때, 심지어는 운전을 할때?의 기억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미 스마트폰 등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등에 대하여 크게 (의존하거나)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스스로가 이와 같은 현상을 마주하며, 보다 비판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과거 MP3를 비롯해 수많은 전자제품을 통하여, 귀과 눈을 주변보다는 해당 콘텐츠에 집중하고 또 소비해온 삶을 살았기에, 이처럼 오늘날의 신 문화 또한 익숙하고 또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의 것으로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허나 나의 이러한 인식과는 달리, 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단절'이다.     물론 저자 스스로도 나름 극단적인 단절을 주장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의 주변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책 속의 내용을 비교하였을때!   실질적으로 그의 주장 대부분은 소위 옛 학생주임급으로 깐깐하고, 또 원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여담이지만, 과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데이터 없는 삶'을 주문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혹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세기말이나 '암흑시대에 대비하라!' 와 같은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도 그럴것이 이미 사생활과 업무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자리잡은 메신저를 단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거의 무한한 정보와 편의성 그리고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스마트폰의 매력을 거부하고, 과감히 구형 핸드폰으로 돌아갈 선택을 과연 (지금의)여러분들은 할 자신이 있는가?  이에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선택지에 난색을 표할지도 모르고, 또는 현재를 모르는 입바른 주장에 불과하다며, 단순히 그 주장을 일축 시켜버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많은 주장들을 그저 외면 할 수 만도 없을것만 같다.


저자는 그저 무책임하게, 뇌 과학이 어떠하고, 게임의 폭력성이 어떻다는 등의 문제점을 주장하려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저 눈과 귀를 스마트폰에 고정한 체, 세상을 '전자기기와 통신망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저자의 입장에 있어서)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해보면, 과연 오늘날과 영화 매드릭스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합리적인 가격의 탈을 쓴 높은 통신요금을 내고, 또 무궁무진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개인의)입맛에 맞는 일부의 정보만을 탐닉한다.   그야말로 빠르고,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우리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인식한 체, 정체없이 또는 열정적으로 이곳저곳 누비고 있을 뿐이다.   


물론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현대인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고 미래를 꿈꾸며 감히 상상해온 많은 것들을 현실에 구현하고 또 정착시킨 공도 크다 하겠다.  다만... 저자는 그 변화 가운데서, 너무나도 빠르게 익숙해지고, 또 의지하는 현상에 대하여 나름의 브레이크를 걸어보려 노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생각해보면 현대인은 이 데이터망을 통하여 너무나도 방대한 시각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스마트폰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바로 이때, 한 순간, 한 시간, 하루 그것에서 눈을 때는 시도를 해보는것도 의외로 좋겠다는 생각이 미친다.   스마트폰과 함께 수 없이 왕복했던 출.퇴근길, 이때 전자기기를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자!   그러면 적어도 세상과는 잠시 단절되겠지만, 의외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누릴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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