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 - 세월을 이기고 수백 년간 사랑받는 노포의 비밀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이자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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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세계를 돌아보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명물과 함께, 그 지역사회에 있어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겨 소개되고는 한다.   그렇기에 결국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정보를 통하여 견문을 넓히는 것은 물론, 반대로 자신 스스로가 살아가는 국가와 사회의 모습과 비교하며,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품게 되기도 하는데, 이에 아마도 '옮긴이'는 그 아쉬운 것에 대한 주요 주제로서, 소위 이 100년 가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책이 소개하는 일본의 오랜 가게들은 단순히 개인의 '직장과 밥벌이' 에서 멈추지 않고, 그 지역사회에서 나름 다양한 영향력을 지니고, 또 공헌하는 가게로서 보다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기에 한때 대한민국에서도, 이러한 전통있는 가게, 시장 등을 구축하고 살려낸다는 취지로서, 다양한 정책을 내놓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러한 많은 노력에 비하여 그 효과는 거의 드러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현실이 상당히 아쉬울 것이다.   과연 한국과 일본사이에 그 무엇이 다르기에, 이처럼 큰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일까?  과연 한국사회에 100년 가게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변하고, 또 필요한 것일까?


비교적 전통이 잘 융합된 일본의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통있는 가게들... 이처럼 일본의 오늘이 만들어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들은 무엇이였나?  정부의 정책인가? 성공적인 지방행정의 결과물인가? 개인의 노력과 안목 때문인가? 아니면 본래 일본인의 정서가 만들어낸 흔한 현상에 불과한가?  아쉽게도 결국 이 많은 질문 가운데서, 정확한 해답을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음식점, 목욕탕, 까페 등 보다 여러 분야에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많은 이 가게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자면, 나름 이 일본사회가 가진 독특한 문화, 또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상도 함께 든다.


실제로 소개된 이 가게들이 모두 순풍에 돛 단 듯 원활한 경영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를 이어 '후계자'가 될 결심을 하고, 각 사업에 있어 최고의 준비와 노하우를 축척하고, 또 그 오랜 전통을 발판삼아 '노렌의 자긍심'으로 승화시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 그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노력'이 드러난다 하겠다.   또한 특히나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 (내용에 있어) 인상적이 였던 것은 그들이 오롯이 전통을 계승한다는 경직된 사고방식이 아닌, 시대와 의식에 민감하고, 또 사양산업에 대비한다는 나름의 유연성 또한 보여주고있다는 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단순한 '명성'만으로 이처럼 오랜 사랑을 받아낼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결국 백년가게의 노하우란 '각 가게가 끝임없이 노력한 결과' 그리고 그 지역과 동네에 성공적으로 녹아든다는 '친화력' 등이 아마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분명 이들은 다른 이들과의 신뢰를 쌓아올렸고, 또 그것을 배신하지 않음으로서, 가게의 역사를 축적해왔다.  그렇기에 분명 이 많은 전통가게들은 모두 신뢰와 융화라는 이 두가지의 가치에 있어서만큼은 '타협이 없는 영업'을 한다.  아니... 적어도 책 속에서 만났던 많은 가게들이 추구했던 것들도 가만히 보면 수익, 기업화, 체인점 등의 경제적인 성공이 아닌, 그 지역에 있음으로 해서 모범(자랑거리)이 되는 일원의 하나가 되는 것이였다.


모범적인 공동체의 일원


분명 일본은 이러한 조건을 통하여, 작은 공동체의 단결을 꾀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구멍가게, 음식점 등이 가지게 되는 소위 '텃세'의 분위기도 존재하기에, 세상에는 이를 통해 만들어진 전통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를 생각하면 이들에게는 사람의 정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바로 그 '정'을 족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켜야 할 미덕이자, 매력으로 이해 할 것인가?  그 가치의 차이에 따라서, 소위 100년이 가지는 의미 또한 크게 변화한다.   그야말로 이 100년가게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서로 상반되게 갈려지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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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의 역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누구나 교양 시리즈 3
게르하르트 슈타군 지음, 장혜경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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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연 인류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잠시나마 멈추었던 적이 있었는가...이에 안타깝게도 인류의 역사는 그야말로 전쟁의 역사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 끝임없고, 잔인한 기억을 계속해서 축척해 왔으며, 또한 오늘날의 '나' 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사회에 있어서도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결국 국가는 국민에 대한 의무를 지우며, 이른바 '전쟁'에 대한 (실현)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는다.    그러고보면 세상에 군대가 있는 것도, 무기의 계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그리고 이처럼 전쟁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아올리는 것도 결국에는 전쟁에 대한 일종의 대비(준비)가 아니겠는가?  비록 전쟁이라는 것이 끔찍하고, 또 파멸에 가까운 파괴행위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미 한번 위에 언급하였다시피, 인류는 그 와중에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매우 폭력적인 종족이였다.


그렇기에, 사실상 평화를 향유하고 있는 현실속에서도, 세세히 주변을 둘러보면, 그 전쟁의 유산은 어디에서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갈등 또한 전쟁의 연장선이며, 무엇보다 역사, 문화, 오락에 이르는 폭넓은 분야에 있어서도, 전쟁은 매우 인기있는 소재거리가 되어주고 있다.  


오늘날 지식 또는 문화에 있어서 전쟁은 결국 매우 친숙한 분야의 것이 된지 오래이다.


때문에 결국 많은 사람들은 알게모르게 전쟁의 현상과, 흐름을 학습해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전쟁의 본질'에 대하여는 사실상 과거의 기억에 기댄 끝임없는 (교훈의) 학습 외에는 마땅한 대비책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은 결국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그 살인행위의 과정에 있어서 등장한 정의와 명분, 영웅,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에 있어서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보다 세련되고, 또 효율적인 전쟁이론과 민족주의를 형성했고, 이에 해당 후손들은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오롯이 전쟁을 부정하며, 평화의 가치를 지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렇기에 저자는 '전쟁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을 드러내기에 앞서, 보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갈고 닦고,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불함리함과 끔찍함을 더 드러내려 노력하는 '평화 인문학자'에 어울리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해주려고 노력한다.


쉽게 전쟁의 논리에 수긍하지 말라.


이처럼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뜻은 위와 같은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솔직히 나 스스로 또한 전쟁이 가져온 수 많은 가치를 떠올리면, 순간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무리 그 본질이 사람을 효율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소모하는 끔직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락&전술론과 전쟁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과, 그 매력은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포부를 드러냈던 많은 영웅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평화야 말로 이상주의의 영역에 속한 순간의 달콤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그러고보면, 예전 어느 소설에서 접한 것과 같이, 결국 인류라는 존재는 순간 몇십년, 몇백년의 평화를 구가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존재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과연 인간과 국가 스스로가 제국, 영광, 번영, 경쟁, 우월의 가치를 내려놓을수 있을까?  아니... 역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세상에 전쟁이 사라지는 일 또한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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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검프
윈스턴 그룸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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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득 이 소설을 접하고 있자면 하루, 일주일, 일년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역사속에서 어떠한 존재로서 스쳐 지나가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개인의 입장에 있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 사람은 단연코 없으리라... 다만 그저 세상 속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살다가 사라질 '이름없는 사람' 보다는 적어도 이 책이 드러내는 우연찮게 주목받는 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나름 생각해보면, 상당히 매력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때문에 과거부터 많은 작품들은 이 우연의 순간을 통해 많은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히틀러의 사인을 받는 존스박사도, 단순히 노망 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특급 트러블 메이커였던 100세의 노인도, 그리고 (소설처럼) 선천적 백치가 겪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는 많은 사건들도 분명 단순한 현실성을 떠나, 해당 시대를 상징하고, 또 표현한다는데 있어서, 보다 남다른 의미와 재미를 던져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결국 독자는 점차 대단해져가는 포레스트 검프를 엿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가장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명예, 권력, 자유 그리고 돈...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꿈 뿐만이 아닌, 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욕구를 품고 또 실행하려 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검프라는 존재는 그 정형화된 모든 성공을 부여잡은 몇 안되는 행운아다.   그야말로 학생시절 기대받는 미식축구 선수였고, 군대에서는 전쟁영웅으로서 인정받았으며, 훗날 개인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물론 지방 정치계에 러브콜까지 받게 되니, 분명 그는 개인의 레벨에 있어서는 최상의 성공을 구축했다 할 수 있겠다.   


허나 검프는 백치이다. 


이에 과연 백치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나 스스로는 무지하기 짝이 없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서적들이 표현한 것을 따르자면, 소위 영혼없는 인형, 또는 스스로의 자아를 만들기에는 지능이 낮은 장애인이라 생각하는 것이 나름 올바르지 않겠는가 한다.   때문에 검프의 내면을 빌리자면 '삶은 매우 단순해진다.'   좋아하는 여자곁에 머물고, 좋아하는 사람과 꿈을 공유하며, 점차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일종의 스펀지와 같은 존재가 바로 소설 속 검프이다.   허나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는 반대로 세상이 묻힌 수많은 오물?에도 끄떡없었던 순수함의 결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자.   검프에게 있어서, 소설 속 미합중국의 대통령도, 중국의 수석도, 그리고 개인적인 성공과 부에 있어서도 무엇하나 미련과 경의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는 규칙, 질서, 사상, 정의 등 대외적이고, 또는 암묵적인 세상 모든 상식에 대한 모든 것에서 한...두 발짝 물러선 자유로운 인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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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슴의 발레리나
베로니크 셀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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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 속 페미니즘의 대부분은 이른바 '권리요구'로 정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하면 이는 오래전부터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으로서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것이지만, 이를 떠나 반대로 내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보자면, 결국 오늘의 페미니즘이란 일종의 계급투쟁의 형식을 빌린 '사회 변화 운동' 으로서 한층 더 극단적인 것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그렇기에 결국 페미니즘은 보다 격렬하고, 복잡하며, 또한 새로운 가치를 세상에 드러었으며, 이에 이 소설의 이야기도 그 나름 페미니즘의 분류법으로 들여다보자면, 소위 '탈 코르셋'의 가치를 내보인 소설로서 이해 할 수 있을것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자' 또는 '나 스스로의 믿음과 자아실현을 위하여, 사회에 만연한 어느 가치관에 저항하자'  이처럼 세상속에서 주장되는 탈코르셋의 정의를 마주하며, 과연 독자는 어떠한 감상을 가지게 될까.   이에 혹 저자가 표현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주한다면, 나름 그 선택과 정의에 대하여 관대한 시선을 던져줄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소설 속 주인공은 나름 저자의 아바타로서, 그 개인의 정의를 대변하는 존재로 비추어진다.   물론 이에 어느 정도의 사실이 표현되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 주인공이 오롯이 자신의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위하여, 세상 속 경직된 사고방식을 벗어난 '선택' 을 할 수 있는 위인으로서 비추어지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라 할 만하다. ​ 


이때 주인공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발레'이다.


그러나 오늘날 발레란 어떠한 것인가?   이미 여성의 입장에 있어서, 발레의 세계는 실력과 의지로 성공하고 또 개척 할 수 있는 친 여성적 무용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을 배신한 것은 그 스스로의 몸뚱아리다.   이미 소설의 제목에서도 비추어지듯 주인공 자신과 함께 성장한 (여성형)가슴이 그 본인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최대의 방해물이 된 것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소녀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모든 순간마다 발레를 위해 가슴과 싸웠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도 해보고, 압박붕대로 가슴을 칭칭 동여매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발레를 할 수 없을것이라는 스트레스로 하지말아야 할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른이 되어,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을때, 그가 선택한 최대의 결심 중에는 자신의 몸에서 가슴을 때어낸다는 것도 자연스레 포함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축소 수술인 것 같다)


가슴을 포기한 주인공, 그리고 뜻밖의 혼전임신과 출산으로 마주하게 된 (편모)어머니로서의 삶과, 발레리나로서의 삶...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자식에게 모유를 먹일 수가 없다.   때문에 그녀는 마음 한구석 아픔을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허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자립을 포기하고, 온전한 어머니가 된다는 선택 또한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삶! 나의 인생!  그리고 내가 불러온 결과를 오롯이 마주하며,  그녀는 스스로를 단순히 어느 자식의 엄마로 불리우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 그녀는 발레리나다.   발레리나이자,어머니다.   어째서 이 두가지의 삶이 공존 할 수 없다 생각하는가?   어째서 주인공이 이 두가지의 삶을 버텨낼 수 없을것이라 생각하는가?   이에 혹 위처럼 부정적인 감상과 정의를 내린 독자가 있다면? 적어도 이 주인공이 말하는 주장에 대하여 보다 믿음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적어도 그녀는 자주적이고 강한 여성이 아닌가?   정말로 이 주인공은 스스로의 목표를 이루려는 자, 스페셜리스트라는 단어에 걸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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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악마 새움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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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 세상에 예의와 품격, 그리고 친밀감을 무엇보다 추구하는 천사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  혹 아니면 반대로 일종의 스쿠루지와 같이 단지 스스로만의 가치관만을 움켜쥔 체 타인 따위와의 관계는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도 생각치 않는 (일종의)꽉 막힌 사람이 존재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위의 질문에 대하여 딱히 무엇이라 정의 할 수는 없지만, 다만 딱 하나! 분명 많은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이처럼 보다 극단적인 성격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람이란, (자신의)주변에서 쉽게 찾아볼수도 없고, 또 되도록 인연 또한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것이 아마도 이들은 '성자' 아니면 '극악한 범죄자' 이 둘중 하나일것이 분명하니까...)


이처럼 보다 상식적인 면에서 바라볼때의 인간이란, 그 스스로도 정의 할 수 없는 복잡함을 드러내는 존재, 정리하자면 어느쪽이든 일방적인 가치관에 치우치지 않는 소위'주변의 공기를 읽는' 약삭빠른 존재로도 볼 수 있겠다.  바로 그렇기에 결국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연 인간의 본성은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맞이하며, 인간은 그 끝없는 (답이없는) 질문에 고뇌했으며, 물론 이 책의 내용또한 그러한 해답의 역사에 있어서, 나름의 지침이 될 수있는 하나의 '창작물'로 볼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소설속 주인공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삐뚤어진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다.  오늘날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는 세대간의 갈등, 갑질 등과 같이, 그 오랜 과거의 '러시아 제국'에서도 인간이란 오늘과 똑같은 욕망, 그리고 똑같은 욕구를 드러내면서, 이 제목과 같은 찌질하기 짝이 없는 (손해 안보는) 삶을 살기위하여,다른 많은 사람들의 존엄?을 깎아내리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혹 그래서일까? 결국 이처럼 소설의 많은 장면들을 접하다 보면, (그야말로) '그 인성'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저 건물주라는 이유만으로 고용인에게 있어 '존대'를 강요하는 여관 안주인, 그리고 제국의 관료이자, 교육자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스스로의 출세만을 위하여, 제자도 또 미래의 아내를 선택하는 것에도 차별을 두는 주인공!   차별, 위선, 거짓, 자만... 이처럼 소설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와 그 부정적인 것들을 마주하며, 분명 '나' 스스로 또한 그 많은 것에 대하여 거부감과 같은 감상이 들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러한 많은 마이너스 이미지에 대하여, 상당히 친숙한 느낌을 받게 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금씩 생각해보면, 의외로 이 소설은 현실과 매우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적어도 스스로의 삶을 돌아봤을때, 이미 '나'라는 존재가 이와 매우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는 어쩐지 싫은 사람도 있고, 스스로 쌓아온 마이너스 에너지를 누군가에게 쏟아내게 되기도 한다.   또한 타인을 만만한 먹이감으로 삼거나, 나름의 거짓을 섞어 평가를 깎아내리기도 하고, 때론 타인이 겪는 어려움을 지켜보면서, 마음속 한구석에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야말로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불행은 나의 기쁨' 이라는 세상 속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켜오는 현생의 악마가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인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세상에 악마가 오직 나 혼자 뿐이겠는가?    적어도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소설 뿐만이 아닌, 이 세상 모두의 사회적 인간은 모두가 악마의 영역에 들어있다.    이에 세상 속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자들이 삶을 한번 생각해보아라, 그리고 또한 스스로의 삶을 한번 뒤돌아보아라, 과연 독자는 이 소설속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또 그 무엇이 똑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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