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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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밝혀두자면, 난 노벨문학상 작가들이랑 별로 친하지 않다. 문학사적 의의나 작품의 역량보다는 재미를 추구하는 단순무식한 독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슨 타이틀을 땄고 그래서 당신은 이 책 정도는 봐주어야 한다는 무언의 당위성이 싫기도 해서였다.

게다가 노벨 문학상은 엄청난 권위를 자랑하고 있기에 어딘가 내가 범접하기 힘든 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두려움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가 책을 통해 독자들과 교감하려는 그 무엇인가를 캐치하지 못할 때의 공허함을 들키기 무서워서였으리라.

이 책 역시 책 띠지와 각종 소개 자료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이 어김없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그 홍보문구 아래에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끌었던 ‘한국에서 집필한’ 이라는 문구는 그 전까지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던 작가와 나의 단촐한 매개체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 먼 땅 서울까지 와서 그가 남긴 글이 무엇이냐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나중에 책을 다 읽고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르 클레지오가 한국에 온 이유는 통번역대학원에 교수로 초빙되어서라는 걸 알았고 작품과 서울은....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을 허무하게 확인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서두는 참 강렬하게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 그걸 겪어보았기 때문이다.”라는 시작으로.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그 시절의 허기는 지금도 내 안에 있다. 나는 그 허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강렬한 빛을 발하면서 내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게 한다. 그런 허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기나긴 세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지 못했으리라.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기억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야 이 2장에 압축해 놓은 작가의 소회가 결국 책 전체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천진난만하고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열 살 소녀 에텔이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잃게 되면서, 그리고 어른으로 성장해가면서 겪게 되는 이 엄청난 허기는 결국 그녀 자신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생존하는 법을 배웠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어린 시절 제니아를 향한 뜨거운 우정은 스스로가 목말라했던 허구의 상대로 선택되었고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과 관계변화는 그녀의 인생 또한 겉잡을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옴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풍요에서 부족으로 바뀌어가는 에텔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런 결핍과 간절함이야말로 그녀가 드디어 존재가치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르 클레지오가 말한 잊지 못할 허기의 한 구멍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자꾸 채워가려는 그 의지 속에서 마침내 발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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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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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이 1043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네 달에 걸쳐 완성한 이 소설은 세상에 나오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작품 구상에만 6년이라는 긴 시간이 담겼음에도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결국 한 출판사에서 가격을 맺기는 한다.

단, 영국 정보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는 단서를 걸고.

그러나 이 출판사 역시 며칠 뒤 거절의 편지를 보낸다.

 

   
  “ 이 우화가 일반적인 독재자와 독재정권을 다루었다면 출판해도 괜찮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그 두 독재자의 행보를 완전히 따르고 있어 오직 러시아에만 들어맞고 다른 독재정권들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만약 우화에 묘사한 지배계급이 돼지가 아니었더라면 덜 거슬렸을 것입니다. 돼지를 지배계급으로 선택한 것이 많은 사람들, 특히 러시아 사람들처럼 조금 과민한 사람에게 틀림없이 불쾌감을 줄 것입니다.” p. 201
 
   

 

  "인간은 자신들의 이익 말고는 어떤 동물의 이익도 챙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투쟁을 위해 우리 동물은 철저하게 단결하고 철저하게 대동해야 하지요. 모든 인간은 적입니다. 모든 동물은 동무입니다." [본문 p.18]

 

줄거리는 오히려 복잡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그 안에서 작가가 통찰해낸 무서운 인간의 속성과 사회비판은 동물들의 입을 통해 소름끼치도록 날카롭게 전달된다. 평범하게 인간의 착취 속에서 살아가던 농장의 동물들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주인을 쫒아내고 농장을 차지하게 된다. 이전의 생활에서 불평등을 느끼고 있었던 차 동물들은 이 기회에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모든 질서를 바꾸려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또 다시 권력과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억압된 자유와 강제된 노동의 기억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동물들 스스로 권력구조를 용인하고 복종을 반복한다. 급기야는 옳고 그름조차도, 기억에 근거한 실제 사실마저도 부정하게 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소름끼쳤던 부분은 인간만큼이나 악랄하고 교활한 모습을 보인 지배계급의 탄생, 그리고 아무런 비판 없이 그 지배계급의 부당한 권력을 받아들이는 피지배계급의 모습이었다. 우리 인간세계의 조그만 축소판처럼 재현된 그들의 세상이 나는 너무도 두려웠다. 그래서 조지오웰의 저력이 그토록 대단한 것인가보다.

동물들을 통해 교묘하게 인간세상을 치가 떨리도록 똑같이 그려냈으니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전 세계의 독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이 책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꾸준히 읽는 다는 건...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이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부당한 착취와 권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p.s.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저자의 다른 작품 ‘위건부두로 가는 길’과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을 함께 읽어 나갔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조지 오웰의 문체와 또 다른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도롱뇽과의 전쟁은 이 동물농장과 닮은 듯 다르게 비교되는 맛이 있어서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독서시간이었던 듯.

아무튼 책을 통한 ‘사고의 확장’이 어떤 즐거움을 주는 지 다시금 확인한 좋은 경험을 한 기회였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세상에 일찍 드러나기가 힘들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 출판 에피소드와 관련해 더 웃긴 건 안드레라는 편집자가 이 원고의 검토를 요청한 조지오웰에게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여서 위험 부담을 안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점이다.
아~ 정말 눈물나도록 웃어제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꽤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중학생이었던가? 그때는 소비에트가 어쩌고 공산주의가 어쩌고 하는 이데올로기는 전혀 몰랐었다. 그저 인간의 모습을 복사한 듯한 동물우화라는 설정이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것뿐. 그 외에 지금 생각해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이번에 다시 읽고, 역자의 상세한 설명과 주석을 함께 보면서 몇 번이나 감탄을 했었던지...

1945년에 출간된 이래 전 세계 68개국 언어로 출판되고 지금까지 절판된 적이 없다는 명성이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셈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책 중간에 부연설명을 위해 달아놓은 주석들이 글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아 잘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이 책만큼은 오히려 주석들 때문에 더 집중하고 재미있게 읽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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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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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 한 단어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고도의 지식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위대한 존재인가? 아니면,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가장 잔인하고 죄가 많은 종족인걸까?

하늘 위의 천사가 인간과 함께 산다해도, 분명 인간은 천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권리를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책은 처음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더랬다. 도롱뇽이라는 제목에서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체코 작가의 글이라는 점도 나와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출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읽은 많은 온라인 지인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과 도롱뇽의 대립이라는 구도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태였는데 읽어봐야 그 맛을 알꺼라는 묘한 추천은 더 이상 이 책을 그냥 내버려 두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장장 400여페이를 훌쩍 넘기는 이 책을 부지런히도 읽어댔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이 작가! 천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떻게 이렇게나 방대한 지식과 상상력을 책 한 권에 쏟아낼 수 있는지 무대에 서 있었더라면 그의 등장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도롱뇽이라는 독특한 종족을 의인화시켰다는 창의적인 생각도 흥미롭기 그지 없는데 읽는 내내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 수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빨려들었다. 마치 지구 촌 어딘가에서는 도롱뇽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며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스런 행동에 경고를 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난 작가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싶을 정도로 그의 천재성에 꽤나 감동을 받고 말았다. 두발로 걷고 언어와 기술을 습득하고 인간과 거의 동등한 문명을 만들어내는 도롱뇽의 진화는 결국 인간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었다.

막대한 부를 위해 그들을 착취하던 인간들이 결국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하기보다는 대립을 통해 인류번영을 영속시키려 하는 이 이야기...

작가도 이야기 했지만 이 책의 이야기는 공상과학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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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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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 책은 내가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고 만난 세 번째 작품이었다. 앞의 두 작품을 나름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도와 호감도는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는데 읽고 나니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물론 이 책을 절대 재미로만 읽을 수는 없다. 작년에 읽었던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과 비슷한 배경인 독재자 트루히요의 이야기였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주노 디아스의 책을 정말 읽는 내내 픽픽 웃어 제끼며 익살스럽게 읽었다면 이 책은 시종일관 무거운 삶의 여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 또한 시간의 흐름에 맡겨놓지 않고 여러 주인공이 화자가 되어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사건이 맞물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처럼 장면 전환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져 책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트루히요는 악명 높은 도미니카의 독재자였다. 그리고 국민들이 그를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 이 책의 제목이 된 ‘염소’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한 국가 안에서 그 국민들을 상대로 펼쳤던 독재정권을 비꼬는 말로 들린다. 한바탕 멋지게 축제를 벌인 트루히요가 축제의 대미를 어떻게 장식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우라니아. 14살에 미국으로 쫓겨가듯 도망간 채 홀로 35년을 살아온 지식인 카브랄의 딸. 14살의 소녀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 35년 뒤 그녀의 조국 도미니카로 돌아와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는 한때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실세로 멋지게 살아온 남자였지만 지금은 손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뒷방늙은이가 되어있었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왜 우라니아가 그 긴 시간 아버지를 떠나 한 번도 찾지 않았으며 그토록 증오하고 있었는지 궁금했고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만 해대고 있었다. 책은 후반부에 가서야 그 이유를 말해주는데 권력 앞에서 한껏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이 이토록 잔인할까 싶은 마음에 우라니아의 지난 35년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익히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평온하게 잘 살던 이 아비와 외동딸의 운명을 이렇게 비극적으로 갈라놓은 중심에는 독재자 트루히요가 있었다. 독재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온 나라를 장기판의 말처럼 마구 이용했다가 버려버리는 그에게 여자는 또 다른 탐욕의 근원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곁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그의 부하들의 여자들까지 모조리 범하는 그는 그것을 자신의 권위를 표하는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누구하나 그에게 직언을 하지 못하는 썩을 대로 썩어빠진 정권의 하수인들. 그렇게 도미니카는 독재자 안에서 영영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듯 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를 살해하려는 암살자들의 계획이 시작된다.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에게 폭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찌 한 둘 이었겠는가?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백번 아니 수천번 죽임을 당했겠지만 감히 그 일을 실행해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 허나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친 누군가에게는 죽음마저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습게도 독재자를 처단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더욱 깊은 어둠의 그림자를 상대로 한 더 무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사라진 독재자에게도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을 기회가 왔는데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트루히요의 불씨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진짜 트루히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독재자로서의 잔인한 트루히요와 그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우스꽝스러운 늙은이 트루히요를 묘하게 대비시키면서 이 축제의 희생물은 국민이었음을 역설한다. 14살의 어린 우라니아는 대표적인 희생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녀는 일찌감치 축제의 테두리를 벗어나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한 셈이고 다른 이들은 여전히 그의 테두리 안 에서 꼭두각시처럼 웃고 울었을 뿐 이었다. 축제가 끝났음을 알려도 그 누구하나 밖으로 나가 진짜 집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못하는 독재자의 주변인들은 삶의 주체성마저 파괴되어버린 불쌍한 인간군상의 표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라니아는 자신만의 싸움에서 멋지게 성공했다고 본다. 그녀가 증오하는 제 아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의 지난 세월을 얘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친척들에게도 안부의 인사와 편지를 하겠노라 마음먹었으니 그녀는 이제 새로운 자신만의 축제를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 염소의 축제는 끝났지만 그들의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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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장점숙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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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공포 그 자체다.

하지만 괴물이나 귀신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살기위해서는 남을 반드시 죽이고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아야한다는 서바이벌 생존기이기 때문이다.

내용도 살벌하기 그지없지만 책의 소재 자체도 충격적이어서 역시 일본소설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들의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싶을 정도로 무한한 것 같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일본은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어 더 이상 정부에서 그들을 지원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고 각종 사회문제가 유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실버배틀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실행한다. 어느 한 구역을 정해 70세 이상의 노인들은 정해진 기간 안에 이 실버배틀에 해당하는 자를 죽여야 한다. 게다가 기간이 지났는데 1명 이상의 생존자가 있으면 무조건 처형을 당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게 말이 돼? 라고 자문하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최단기간 고령화 시대 진입, 국민연금 고갈, 사회문제 심각...요런 단어가 떠올라서 소설이 소설 자체로만 읽히지 않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을 공경해야 하고 젊은 자식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부양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그런 이념과 교육이 이 책에서는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 책 내용 자체가 파격적이고 살벌한 것도 있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는 거잖아?라는 가능성이 스멀스멀 생겨나게 되어 그 순간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살아가는 그런 행동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건 아니다. 내가 눈여겨 본 건 그 과정들이었다.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여기에서 인간본성이 어떻고 살인에 따른 죄책감이 어떻고 하는 건 이차적인 문제일 뿐.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만 한다는 간단한 사실만 남게 된다. 이를 수행하는 동안 그들이 보여준 궁극의 이기심과 비열함, 잔혹함 속에서 나는 추악한 인간군상들을 또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치 내 눈앞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듯 보이는 이 늙은 살인마들을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긴.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늙어간다는 것이고 이는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음에도 환경적 요인에 의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슬프게 다가온다.

 

물론 이 책에도 효자가 등장한다. 연로하고 병약한 부모일지라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런 자식들. 이런 인물들을 단지 한명이라도 등장시켜준 작가에게 무한한 인간애를 느끼면서도 이 인물로 인해 더욱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게 그려진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읽은 최고의 반전은 이 책의 작가에 있다. 이미 이 소설은 예전에 생각해두고 있었음에도 여론을 의식해 작가 자신이 70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표했다고 하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노작가의 완벽한 승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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