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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 책은 내가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고 만난 세 번째 작품이었다. 앞의 두 작품을 나름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도와 호감도는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는데 읽고 나니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물론 이 책을 절대 재미로만 읽을 수는 없다. 작년에 읽었던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과 비슷한 배경인 독재자 트루히요의 이야기였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주노 디아스의 책을 정말 읽는 내내 픽픽 웃어 제끼며 익살스럽게 읽었다면 이 책은 시종일관 무거운 삶의 여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 또한 시간의 흐름에 맡겨놓지 않고 여러 주인공이 화자가 되어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사건이 맞물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처럼 장면 전환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져 책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트루히요는 악명 높은 도미니카의 독재자였다. 그리고 국민들이 그를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 이 책의 제목이 된 ‘염소’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한 국가 안에서 그 국민들을 상대로 펼쳤던 독재정권을 비꼬는 말로 들린다. 한바탕 멋지게 축제를 벌인 트루히요가 축제의 대미를 어떻게 장식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우라니아. 14살에 미국으로 쫓겨가듯 도망간 채 홀로 35년을 살아온 지식인 카브랄의 딸. 14살의 소녀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 35년 뒤 그녀의 조국 도미니카로 돌아와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는 한때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실세로 멋지게 살아온 남자였지만 지금은 손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뒷방늙은이가 되어있었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왜 우라니아가 그 긴 시간 아버지를 떠나 한 번도 찾지 않았으며 그토록 증오하고 있었는지 궁금했고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만 해대고 있었다. 책은 후반부에 가서야 그 이유를 말해주는데 권력 앞에서 한껏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이 이토록 잔인할까 싶은 마음에 우라니아의 지난 35년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익히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평온하게 잘 살던 이 아비와 외동딸의 운명을 이렇게 비극적으로 갈라놓은 중심에는 독재자 트루히요가 있었다. 독재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온 나라를 장기판의 말처럼 마구 이용했다가 버려버리는 그에게 여자는 또 다른 탐욕의 근원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곁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그의 부하들의 여자들까지 모조리 범하는 그는 그것을 자신의 권위를 표하는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누구하나 그에게 직언을 하지 못하는 썩을 대로 썩어빠진 정권의 하수인들. 그렇게 도미니카는 독재자 안에서 영영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듯 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를 살해하려는 암살자들의 계획이 시작된다.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에게 폭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찌 한 둘 이었겠는가?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백번 아니 수천번 죽임을 당했겠지만 감히 그 일을 실행해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 허나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친 누군가에게는 죽음마저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습게도 독재자를 처단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더욱 깊은 어둠의 그림자를 상대로 한 더 무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사라진 독재자에게도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을 기회가 왔는데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트루히요의 불씨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진짜 트루히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독재자로서의 잔인한 트루히요와 그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우스꽝스러운 늙은이 트루히요를 묘하게 대비시키면서 이 축제의 희생물은 국민이었음을 역설한다. 14살의 어린 우라니아는 대표적인 희생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녀는 일찌감치 축제의 테두리를 벗어나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한 셈이고 다른 이들은 여전히 그의 테두리 안 에서 꼭두각시처럼 웃고 울었을 뿐 이었다. 축제가 끝났음을 알려도 그 누구하나 밖으로 나가 진짜 집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못하는 독재자의 주변인들은 삶의 주체성마저 파괴되어버린 불쌍한 인간군상의 표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라니아는 자신만의 싸움에서 멋지게 성공했다고 본다. 그녀가 증오하는 제 아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의 지난 세월을 얘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친척들에게도 안부의 인사와 편지를 하겠노라 마음먹었으니 그녀는 이제 새로운 자신만의 축제를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 염소의 축제는 끝났지만 그들의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