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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서 / 미망인들 (보급판) ㅣ 지만지 고전선집 4
스와보미르 므로제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대학 재학시 교양과목으로 ‘연극의 이해’라는 수업을 선택해 들었었다. 처음에는 뭔가 있어보여서(?) 수강신청을 했는데 수업이 쉽지는 않아 괜히 신청했나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리포터를 작성하는 과제는 수업과는 달리 꽤나 재미있고 유쾌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뻔질나게 소극장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연극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는데 지금은 일 년에 3편을 볼까 말까 싶을 정도로 문화생활을 못 누리다보니 그때가 자꾸 그리워지곤 한다.
이런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집어든 책이 스와보미르 므로제크의 『바다 한가운데서/미망인들』이라는 희곡이었다. 장편소설을 읽을 때는 영화의 장면 장면을 연상하는 재미가 있다면 희곡은 연극이라는 무대를 머릿속에 그려가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게다가 이 저자는 처음 알게 되었는데 블랙코미디가 이런 맛이구나라는 쾌감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을 만큼 풍자적인데 읽으면서 낄낄 거리는 대사들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나에게는 상당히 낯설었는데 폴란드 드라마의 아버지로 불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다. 2010년에 국내에서 공연된 ‘탱고’도 이 저자의 작품이였다하니 어떤 이들에게는 익숙한 작가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에는 2편의 희곡이 실려 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와 ‘미망인들’이 그것이다. 먼저 ‘바다 한가운데’를 살펴보면(개인적으로 이 희곡이 너무 재미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에 세 명의 조난자가 타고 있었다.
뚱뚱이,보통이,홀쭉이로 명명된 이 사나이들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셋 중 한명을 잡아먹기로 하고 서로가 왜 잡아먹히면 안 되는지, 그렇다면 왜 상대가 잡아먹혀야 하는지를 각자의 논리대로 주장을 펼치는데 이들의 대화가 무척이나 풍자적이다. 특별한 이름 없이 별명처럼 붙여진 이들의 명칭은 앞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뚱뚱이=자본가 혹은 욕심쟁이를, 보통이=기회주의자를, 홀쭉이=노동자 혹은 빈곤층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그렇게 이해가 되었다.
특히 뚱뚱이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며 홀쭉이를 점점 압박하는데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론을 펼치던 홀쭉이가 어느 순간 자신이 희생되는 것이 맞다며 스스로 인정하는 부분에서는 씁쓸한 연민마저 감돌게 한다. 게다가 이 작품이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쓰여졌다 하니 저자는 뚱뚱이를 통해 독재자에 대한 어떤 적나라한 모습을 풍자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뚱뚱이: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는 무책임한
인간이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에게 판단을 맡겨야 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우리가 당신을 먹어치우는 거요.
(보통이에게) 친구, 어서 상을 차려요. [P.57]
홀쭉이: 저는 이제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획득했습니다. 마침내
자, 이제 마지막으로 상황을 살펴보죠. 여기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이
있지만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건 오직 나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자유에 관한 잠시 이야기해도 될까요? [P.65]
이런 식의 대화가 흐르고 보통이는 뚱뚱이의 발언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며 딸랑이 역할을 자처하는데 이 세 주인공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대사들은 현대 정치판에서의 모습과도 흡사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숨긴 채 그럴듯한 말로 대중들을 현혹하며 지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저 징글징글한 정치인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선사하면 어떨까하는 상상도 해보며 웃었다. 그런데 뒷맛은 쓰다. 정말 쓰다...
두 번째 작품은 ‘미망인들’로 ‘바다 한가운데서’ 만큼의 큰 임팩트는 얻지 못했기에 간단하게만 언급하겠다. 그렇지만 이 희곡 역시 까페라는 한정된 공간에 인물과 사건들이 교묘하게 얽히고 설켜 마치 반전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게다가 허망된 욕망을 향해 목숨마저 아무렇지 않게 던져 버리는 이 한심한 인간들을 보자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참...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나는 까페 안에서 남편을 잃은 두 미망인이 만나 서로에 관해 말하다가 상대가 각각 남편이 숨겨두었던 애인이었음이 밝혀지는 황당하면서도 그럴듯한 설정이 하나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결투를 벌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이 사건의 주인공은 단연코 전체 무대를 관망하는 ‘웨이터’였다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즈음 우리는 또 다른 블랙코미디의 무대를 관람했음을 알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짧은 두 작품을 실제 무대에서 본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는 것과 왜 이 저자가 폴란드의 위대한 극작가로 불리는지, 그리고 풍자와 유머의 맛이 어떻게 희곡에서 살아나는지를 오랜만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