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TV 드라마에서 흔하게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너 도대체 왜 이래?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라고 묻는다. 그러면 상대 주인공은 이렇게 대꾸를 하는 거다.
“내가 뭘,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따위의 대사를 날려버림으로써 상투적인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 주신다.
참! 노래가사에도 있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어쩌구 저쩌구...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물론 누구를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을 보더라도 오랜 시간 알고 지냈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헉! 쟤가 원래 저런 애였어?라며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 한 권의 소설이 있고, 그가 죽은 후 그에 대해 말하는 4명의 화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르게 망자(亡者)를 기억해낸다. 그 망자란 바로 추운 겨울날 새벽 스페인의 어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촉망받는 신예작가인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였다.
이틀 전 출판 기념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투신한 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의 삶을 추적해가다보면 자살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시간은 벌써 30년이 흘러 갑자기 그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 하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장 뤽 테라디요스라는 프랑스 기자는 베빌라쿠아의 사건을 조심스럽게 파헤치기 시작했고 그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차례차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듣게 된다.
그런데...
친구였던 알베르토 망구엘(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과 애인 안드레아, 감방 동료 돼지, 마지막으로 고로스티사라는 좀 특이한 적, 이렇게 4명의 화자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그를 천재적인 예술가로 설명했다가 비열한 인간으로 설명했다가 하는 등 극단적이고 다양한 반응을 보였기에 베빌라쿠아의 삶을 취재하던 테라디요스는 서서히 진실과 거짓사이의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멈춰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테라디요스의 진짜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려하던 그가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했기에 책을 읽어내려가던 독자들도 어느 새 그런 의문점을 개인의 문제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나의 경우, 나라면 이 남자의 실체를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라 믿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 사람에 대한 진실은 규정할 수 없다는 답이 나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각각의 집단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위치와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애초부터 1+1=2라는 명확한 개념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어느 집단에서는 내가 ‘갑’의 위치가 되어 좀 더 영악하고 비열해 질 수 있겠고 또 어느 곳에서는 존재 자체도 미미한 ‘을’의 위치로 모든 걸 감내해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테니까.
그래서 테라디요스는 이렇게 결론을 낸다.


  “나의 상상 속에는 그 남자의 명암이 드리워진 형상이 완벽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덮어서 가리기에는 정보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남아돈다. 아무리 증언들을 재편성해보고, 아무리 그것들을 다듬거나 뒤적여보아도, 다른 것들과 잘 맞지 않는 하나가, 정확한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 넘치거나 모자라는 하나가 항상 있다.”[본문 중]


  누구도 알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
소설은 이렇게 철학적 질문과 답을 해나가는 동안에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그 이유는 마치 눈 앞의 문을 열고 나가면 또 다른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 같았던 이 소설의 구성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래서 그가 라틴계의 ‘폴 오스터’라고 불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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