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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책은 몇권 읽어 보긴 했다. 그래도 아직 목마르다. 번역도 계속 되고 있는 중이고, 그의 인간학에 관하여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카프카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는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 판사의 책상에서 포르노 책자를 발견한 그의 시선은 놀랍기만 하다. 법의 외설성. 현대의 많은 씽커들이 카프카는 즐겨 인용하기도 한다. 그가 읽었던 책들, 그 자취를 따라가고 싶다.

 

 

 

 

 

 

 

 

 

 

 

 

하이데거는 어렵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마침 존재와 시간 입문책이 나왔다. 얼른 사서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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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는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을 통해 원시공산제사회(씨족사회)에서부터 현재의 자본제사회까지의 인류 역사를 새롭게 서술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본제사회 이후에 대한 미래전망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다음에 '증여'가 중심이 되는 사회체로 나아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발터 벤야민 선집 10권.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박사학위 논문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1919), 그리고 교수자격 논문인「독일 비애극의 원천」(1928)과 함께 초ㆍ중기 그의 주요 3대 저작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작품이다. 그의 초기 사상의 여러 모티프가 농축되어 있는 이 에세이를 통해 그는 독일 문학비평의 전범을 세우게 된다.

 

 

 

 

 

 

 

 

 

 

 

 

모리스 블랑쇼 선집 8권. 그린비에서 출간하는『카오스의 글쓰기』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는 책으로서, 블랑쇼의 후기 사유가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마치 하루하루의 일기를 쓰듯 단상 형식으로 구성된 그의 글들은 그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 은거의 삶이었던 것처럼, 그의 언어 역시 현실을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구성적 전망의 언어가 아니고, 현실의 맹점을 밝혀 보이는 명철하고 비판적인 언어도 아니며,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언어임을 보여 준다.

 

 

 

 

 

 

 

 

 

 

 

 

 벤야민 사상의 핵심적 모티프인 '기억'에 대한 성찰에 그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끼친 마르셀 프루스트와 독일 민중과 구전적 전통(방언 등)에 뿌리를 둔 진정한 이야기꾼 요한 페터 헤벨에 대한 비평 역시 주목할 만한 비평임에 틀림없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도스토옙스키와 폴 발레리, 고트프리트 켈러, 니콜라이 레스코프 등 당대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들을 다룸으로써 벤야민에게서 '비평'이 자신의 지적 작업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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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최근에 깔깔거리며 보았다. 아주 재미있게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의 저작을 하나씩 읽어나가려고 하는데 이번에<신음악의 철학>이 나왔다. 여기선 또 무슨 얘길 할까.  교수신문에 글이 있어 살짝 인용해 본다.

 

신음악의 철학, 아도르노 지음, 문병호·김방현 옮김, 세창출판사, 328쪽, 29,000원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신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중요 작품들에 대해 서구 음악이 구사하는 음악적 기법의 모든 개념을 동원하여 현미경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두 작곡가의 작품세계를 역사철학적, 인식론적, 사회이론적, 예술이론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이 두 작곡가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진보의 음악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복고의 음악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진보와 복고의 결론은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이 책은 서구 음악학사나 음악이론사에서 도달된 가장 높은 수준의 음악론이며, 동시에 역사철학이고 인식론이자 사회이론이다.

 

 

 

 

 

 

 

 

 

 

 

 

 

 

 

 

칸트야, 뭐, 근대 인식론의 전환을 가져온 장본인이니 만큼 교양인 혹은 지식인이라면 안 읽을 수 없을 것. 이성에 한계를 '확' 그어버리고 종교와 도덕의 세계는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의 세계라고 말해버렸다. 칸트의 스캔들을 들여다 보자.   

 

형이상학 서설 =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저서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의 한국어판.

방대한 분량과 난해함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칸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돕는 입문서다.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단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서 칸트 철학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대신에 적지 않게 난해하다"면서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정리해 비교적 간명하게 서술해 낸 책이 '형이상학 서설'"이라고 소개했다.

아카넷. 454쪽. 2만7천원.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의 경험을 선취함으로써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일종의 사유의 경험이 아닐까.

 

<사유의 경험…>은 1983년에 비토리오 클로스터만 출판사에서 펴낸 하이데거의 전집 가운데 제13권을 번역한 것이다. 엮은이의 말에서 보이듯이 하이데거의 아들 헤르만 하이데거가 아버지의 작은 글들과 사유의 경험들을 모아 1910년부터 1976년까지 시대순으로 편집한 책이다. 이 책에는 예전에 출간된 하이데거의 주옥같은 글들, 즉 ‘초연함의 해명’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헤벨-가까운 집안친구’ ‘언어’ ‘들길’이 실려 있고, 하이데거가 직접 글을 읽은 육성을 음반에 담아 공개하기도 했던 ‘예술과 공간’ 등이 담겨 있다. ‘존재’라는 별을 향해 ‘길-사유’를 펼친 하이데거의 사유 흔적을 맘껏 느낄 수 있는 저술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책에 수록된 작은 글들에서 하이데거가 사유한 동선을 통찰할 수 있다. 특히 그의 고향 메스키르히에서 1910년 발표된 최초의 글인 ‘아브라함 아 산크타 클라라’(1910)를 보면 한 젊은 사상가의 시대 비판을 읽을 수 있고, 또한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시와 예술에 대한 단상, 언어와 고향에 대한 숙고를 엿볼 수 있다. (한겨레 2012. 11. 9)

 

 

 

 

 

 

 

 

 

 

 

 

 

 

 

 

헤겔이 절대 정신을 상정했다고 비판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의 철학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면 도전해봐야하지 않을까.  

 

헤겔 정치철학의 통찰과 맹목 = 나종석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가 서양의 근대를 철학적 화두로 삼은 헤겔의 철학을 분석한다. 저자는 헤겔이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통해 근대라는 시대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했고, 그 내적인 논리와 그것이 지닌 본질적 한계점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본다.
신자유주의, 시장지상주의로 인한 인간 소외와 불평등의 문제, 민주주의 문제, 생태 위기 등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도 헤겔 철학을 통해 분석을 시도한다.

에코리브르. 392쪽. 2만5천원.

 

 

 

 

 

 

 

 

 

 

 

 

 

모방의 법칙이라...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이라고도 한다. 우리 인간은 대중 스타를 모방하고 롤모델을 세우기도 하며 히틀러와 박정희에게 열광하기도 한다. 왜그럴까.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볼 수 있을까.

 

타르드가 모방을 앞세워 던지는 질문들은 사회학이 (뒤르켐처럼) 개인들에게 외적이고 집합적 의식으로 객관화된 ‘사회적인 것’, 또는 사회 구조를 통해서 개인들의 미시적 삶과 운동, 무의식적이고 비자발적 영향 관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회가 개인들에게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모방과 암시로 조밀하게 직조된 정신적 상호관계망은 아닌지를 질문한다. 그는 사회적 규칙성을 가능하게 하는 반복(-대립-적응)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아서 범죄심리학, 사회심리학, 사회 고고학-통계학, 여론 이론, 경제 심리학 등에 관해서 새롭게 질문한다. 또한 그는 사회학자로 변신한 라이프니츠로서 근대 과학이 발견한 무한소, 소립자의 존재론으로 왜 사회가 모방 공동체로 조직되는지, 최소 실체인 모나드와 그것들의 집합체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일반 원리는 없는지를 질문한다. -교수신문(양운덕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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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체인가. 타자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생각하는 주체인가. 끊임없이 타자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무의식의 주체인가. 이 시대의 미인이 아니라면 계속 성형 하라. 는 정언명령에 따라 이젠 성형하지 않은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더 힘들다. 나는 생각하는 주체인가. 타자의 시선의 노예인가.  

 

사르트르는 완전히 물화된 레스토랑 웨이터의 미소가 구토를 일으킨다고 썼고 하이데거는 자기의 고유한 '죽음'에 직면하여 살아가라고 했다. 남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지 못한다.

 

어릴땐 부모나 선생, 그리고 친구들의 뜻에 따라 살고 커서는 회사의 뜻, 직장 상사의 듯에 따라 산다.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하는대로 나는 존재해 본 적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우울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자기'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고(종교 vs 과학), 종교 내에서도 종교 개혁 후 구교 vs 신교는 30년간 전쟁 중이었다. 또 신흥 세력과(부르주아) 귀족 간의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데카르트는 '확실한'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또 그는 생각하는 '나'와 함께 기하학과 수학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로서 물질처럼 관념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동시에 데카르트는 물질과 관념을 통일시키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나는 움직일 수 있다. 왼손을 들어 올리자. 하면 나는 왼손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관념(생각)은 정말 왼손을 들어올릴 만한 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훗날 스피노자의 질문이었다. 다음 시간이 스피노자 강의여서 기대된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를 믿었다. 이 생각은 부르주아의 기본 관념이기도 하고 합리적 근대 과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합리적 이성' 이라는 서구 사유는 이미 폐기처분 된지 오래다. 합리적 이성이 낳은 것이라곤 양차 세계 대전이었고 아우슈비츠였다. 이런 서구의 잔혹한 문화에 대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쓰여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적 '이성'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 도한 곧 문제에 부딪쳐 버리고 만다. 인간은 결코 '이성'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병자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그렇다면 '이성'의 질서 안에서 어떻게 '야만' 상태로 전락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내부의 카스트 제도, 인종주의(우등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있다는 식의, 우리 사회와 학교는 성적으로 그것을 규명하려고 애쓴다)를 넘어서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오늘 프레시안에서 데카르트 강의(동아대 명예교수 이병창)가 있었다. 데카르트의 뒷얘기까지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스피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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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맞을때 한번 가 들어볼 생각하는데..시간이 영 나질 않네요. 방학때는 좀 될까했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고. ^^ 정보는 기억해둘께요. 감사해요.
 

   

근대 이전에 인간은 운명에 따라 살아야 했다. 운명을 거역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사실 비극은 운명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이런 면에서 비극은 희극과도 통한다. 희극의 주체는 운명을 거역하고 운명에 개입한다. 근대의 시작이다. 이후 포스트모던까지.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비극은 탄생한다. 비극은 그런 정지된 세계, 이데아의 세계가 나의 인간적 현존과 무관하게 운행된다는 사실에서 탄생한다. 존재는 현실 세계에서 썩고 부패한다. 그러나 이데아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화이트 헤드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갑고, 건조하며 색이 없는 세계라고 묘사했다.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 고민과 우연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비극'이라고 한다.   

베이컨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항하여 그런 것은 없으며 경험적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과학을 통해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 속의 숨겨진 원리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근대과학의 태동이다. 근대과학 혁명은 급속한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동시에 부작용도 가져왔다. 과학은 합리적 이성을 중시했고 이런  인간주의는 지배와 피지배를 낳았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한다고 자연을 파괴해왔고 다른 인종, 국가를 지배해왔다.

인간은 온갖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를 보고 만지고 지배한다. 희극은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해체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이상 이데아, 본질의 세계는 의미가 없다. 이데아는 인간을 억압해 왔을 분이고 현실 세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포스트모던은 희극이고 놀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데아의 세계 즉 형이상학의 모든 성과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에 대한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험이냐, 이성이냐의 질문은 한쪽을 배제하는 반쪽 짜리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종합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최종덕 선생님의 '희극의 재탄생' 강의가 있었다. 비극과 희극 그리고 근대에 대해서 개괄적인 강의를 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이병창 선생님의 데카르트가 기다리고 있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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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레시안 강의를 들으시는군요..강의 안내가 되어있는 블로그를 링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이 맞는다면 듣고 싶군요 ^^

드보르작 2011-11-18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대입구 2번 출구에서 가까운데,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반 입니다. 오늘은 데카르트했고 다음주엔 스피노자 합니다. http://blog.naver.com/ahxkvjavm 제 블로그에요. 쪽지 남겨주시면 약도 보내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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