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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여기 잠들다
필립 리브 지음, 오정아 옮김 / 부키 / 2010년 8월
절판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전설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나라를 건국한 건국신화이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과 그 이상을 관여하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전설들.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았고, 사실인지 아닌지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을만큼 오랜시간동안 흘러흘러 여러형태와 갈래로 갈라져 나날히 그 내용이 풍부해져만 가는 이 전설들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담겨진 의미와 숨겨진 상징들로 가치를 더하며 전설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아서왕에 대해 얽혀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들 역시 이런 전설 속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칼리번이라는 칼로 그 위치를 확인받고 오랜 시간 뛰어난 용맹과 위엄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전해지는 아서왕 이야기.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는 바로 이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에 하나의 줄기를 더하고 있다.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는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특별하고 뛰어난 그래서 영원토록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위대한 이야기에 하나를 더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그에 대한 여러 전설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떤 아서왕의 새로운 모습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살짝은 비틀린 아서왕의 모습을 그려내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수 없이 들어야 했던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수 없이 만났던 위대하고 뛰어난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탐욕스럽고 거칠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조금은 모질고 무심했던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입체적인 모습의 아서는, 그래서 생소하지만 오히려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안에서 재탄생한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아서의 군에 합류하게 된 17세의 소녀, 소녀는 군이 아닌 마르윈이라는 유랑시인과 함께 하게 되고, 마르윈의 곁에서 소녀가 아닌 소년으로 지내며 아서가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위대한 인물로 묘사되는 인물이 아닌, 그 부풀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실과 인간 아서의 진짜 모습까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게 되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그들 속에 남아 거짓과 진실, 전설과 실체라는 두가지 영역 모두를 지켜보는 인물로 살아가게 되는 것.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소녀에서 소년으로, 그리고 다시 소년에서 소녀로의 변신을 거듭하며 스승인 마르윈의 세치 입안에서 진실이 어떻게 전설의 허울을 쓰는지를 자신도 모르게 익혀나가게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토록 위대해 보였던 스승이었지만 성장한 그녀에게는 자신의 편협한 시각과 인생을 위해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그 오만을 꺾지 않은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 스승을 넘어, 진실을 살피고 자신의 인생까지도 이끌 수 있는 독립된 삶을 꿈꾸는 한명의 여인이 된 그위나.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는 아서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명의 여인이 남긴 아서의 숨겨진 모습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는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서왕 이야기처럼 오랜 시간을 흘러 남겨진 이야기들은, 그 진실이 무엇인지 사실 알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람들도 그래서 그 이야기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다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시대의 희망과 꿈, 그리고 이상에 의미를 두며, 이야기의 주인공을 그 어떤 시대에도 끝나지 않았던 인간의 의지와 힘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생각하는 것일테도 말이다.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는 그래서 시간을 거슬러 많은 사람들이 찬양했던 인물에 흠집을 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너무도 전형적이고 위대하기만 했던 한 인물의 이야기에, 진실이라는 알 수 없는 비밀을 부여하고,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가진 아서의 모습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인물의 새로운 모습. 그것이 비록 살짝 비틀린 모습이라도, 조금 더 인간적이고 조금 더 가까워진 인물이라면, 사람들은 아서왕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할테니 말이다.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의 작가 필립리브는 이미 모털엔진이라는 견인도시 시리즈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나 역시 이 견인 도시 시리즈를 이미 접했고, 새로운 그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살짝 감동을 받았던 독자 중 한명. 때문에 <아서왕, 여기에 잠들다>의 살짝 비틀린 시선은 필립리브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듯 하다. 새로운 시선의 아서왕 이야기. 필립리브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 이야기는 재미있을 뿐 아니라, 환상적이며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