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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세상을 가려놓은 장막을 들추고 한 여자 아이가 서 있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다소곳이 갈라내려놓은 아이. 장막의 바깥에는 밝은 빛이 내리쬐는 세상이요, 장막 안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회색만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내리쬐는 태양은 장막의 안이 아닌 장막의 바깥만을 비추고, 그래서 빛을 받지 못한 장막안에는 그 어떤색도 물들지 못한다. 오로지 남은 색이라고는 검고, 흐린 회색과 들춘 장막의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을 받아 빛나는 여자 아이의 눈부시게 하얀 원피스 자락의 투명함 뿐이다. 빛을 받아 화려한, 총 천연색의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하는 아이는 어두움을 벗어나 이제 빛으로 나가야 하건만 그 전에 신을 먼저 찾아 신는다. 화려한 세상아래 깔린 거칠은 자갈밭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장막의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고, 장막의 바깥에는 그보다는 훨씬 젊은 남자가 그녀의 바로 앞에 다가와있다. 그녀는 노인보다는 젊은 남자에게 더욱 가까이 있지만 그녀는 장막의 바깥이 아니라 장막의 안에 있다. 그녀는 노인보다는 젊은 남자에게 더욱 가깝지만 노인의 공간에서는 맨발이어도 안전할 수 있고, 젊은 남자에게 가기 위해선 자신의 발을 보호해줄 신을 찾아 신어야 한다.
그 아이.. 은교는 알았던 것이다.
젊음으로 빛나는 화려한 색만을 인정하는 세상은 사실 그 빛깔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젊음을 가진 남자보다는 젊음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곁에서 자신이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은교가 신을 완전히 신고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해 망설이고 있음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다시 보니 그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젊은 남자는 그녀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인에게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은 그녀의 뒷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남자도 그녀처럼 노인의 장막안에 들어서 화려한 색을 내느라 고분분투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회색빛으로 물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을 벗고 노인의 곁에서 말이다. 노인도 그녀처럼 젊은 남자에게로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잃어버린 한때의 색을 나누어 가지고 뜨거운 태양빛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두 남자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그들 중간의 문턱에 우연히 서 있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이.. 은교는 알았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자신은 그저 우연히 그들 사이의 작은 틈바구니에 존재했던 것일 뿐임을..
그들과 함께 존재하길 원한다면 그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을 파고 들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아이.. 은교는 몰랐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작은 틈바구니에 그녀가 존재한 순간, 그 틈은 세 사람이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라져 벌어진 다는 것을.. 한번 갈라지기 시작한 그 날카로운 틈은 결코 다시 모아지지 않는 다는 것을.. 오로지 더 큰 간격으로 서로를 잔인하게 찢어버릴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두 사람의 세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디좁은 문턱에 그녀가 위태로이 서 있을 수록, 그 두 사람의 갈망도 날카롭게 서로를 겨냥할 뿐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그녀는 미처 몰랐다.
<은교>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한참동안, <은교>라는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삽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교>를 읽기 전에는 그저 삽화에 지나지 않았던 표지의 그림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은교>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를 단 한창의 그림에 담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갈망들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엇갈림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야기의 제목은 <은교>였지만, <은교>는 은교가 아닌 두 남자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은교>라는 책을 처음으로 열고 마지막으로 덮은 그 순간까지 책장의 글자들을 따라 읽어내려갔던 이야기에 은교는 없었다. 그저 서로를 한 없이 원했고, 서로를 끝없이 갈망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은교는 그저 그들이 원했던 서로의 모습이 부딪혀 만들어낸 그들의 욕망이 뭉쳐진 단 하나의 존재이자, 서로에게 너무도 다른 의미의 바로 그들 자신이었을 뿐이었다.
평생을 시만 써오며 자신의 일가를 이루었던 시인 이적요. 그리고 그런 그를 통해 세상을 보고, 그런 그를 한없이 존경해 그를 닮고 싶었던, 작가가 되지 못한 작가 서지우가 등장하는 <은교>라는 이야기는 언뜻 보면 은교라는 이름의 한 여자아이를 사이에 둔 사제간의 질투와 분노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야기 이전에 짙게 깔린 그 두 남자간의 신뢰와 동경, 그리고 사랑과 갈망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 오른 이야기였다. 단 한번의 사랑도 가슴에 남기지 못할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젊음을 유예시키며 살아온 노령의 시인 이적요가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을 향해 쌓아올린 벽을 허물게 만든 제자 서지우에 대해 느끼는 질투와 분노는, 그가 서지우를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시인의 재능과 그의 세상을 한없이 사랑해 그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서지우의 무모한 도전과 오기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것만 같은 스승에 대한 서러움과 그만큼 그를 원했던 서지우의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열일곱 여자 아이는, 그저 그들의 이중적이고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는 뭉쳐 얽히고 설킨채 방향을 잃고 하염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만드는 기폭제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으리라.. 은교는 그래서 그들에게 은교자체가 아닌 다만 스승인 노시인과 스승의 세상에 속할수도 없고 그 그늘을 벗어날 수도 없는 멍청한 제자가 가진 서로를 향한 갈망의 결정체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은교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단지 바로 그 자리에 은교가 있었을 뿐. 은교는 그들에게 은교가 아닌 그저 그들의 갈망이 부딪혀 만들어낸 날카로운 칼과 같은 틈의 시작이었을 뿐.
은교를 읽어내려가며 문득 노 시인의 은교를 향한 사랑에 나는 면죄부를 붙여주고 싶었다. 정말이지 누군가는 시인의 사랑을 변태적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시인의 사랑은 열살 소년의 그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어린시절 그가 어렴풋이 느끼는 것으로 끝내야 했던.. 그래서 열살 이후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렸던 자신을 감싸준 D라는 이름의 누이를 향한 것이었다고 말이다. 열살의 소년의 사랑이 시간이 흘러 그가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될때까지 그리움과 복사꽃 향기를 머금은 치즈처럼 숙성되고 굳어져 자극적인 향으로 남은 것이었다고. 그래서 비로소 은교를 만났을때 열살의 소년처럼 D라는 이름의 순결한 처녀를 향해 쏟아내어야 했던 사랑을 내보인 것일 뿐이라고...그래서 그 순결한 처녀를 더럽히고 자신의 순결한 처녀인 작품들을 더럽힌 단 하나의 존재가 자신의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단 한명의 사람인 서지우임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를일이고 말이다.
가끔, 무엇인가를 향한 집요한 욕망이 그것을 갖지 못한 좌절과 그리움을 넘어 그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극단의 마음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때로는 드라마로, 때로는 영화로 말이다. 무엇인가를 절대적으로 원하는 마음. 그것을 사랑하기에 끝없이 원했던 그 갈망의 마음이, 그것을 얻지 못한 분노와 좌절로 이어졌을때,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을 망치고 스스로를 상처내기도 하는 가 보다. 노 시인과 젊은 제자처럼 말이다. 자신에게 존재했던 유일무이한 순수를 망친 누구보다 사랑했던 제자, 그리고 그럼에도 자신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은 무모함에 노 시인은 분노를 넘어 좌절과 배신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그토록 원했던 시인의 세상에 발을 내딛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단 한순간도 살갑게 받아주지 않는 무정한 스승에 대한 원망과 그 스승의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는 욕망앞에 그의 세상을 원했던 제자는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을 빼앗긴듯한 좌절을 맛보았으리라. 자신을 따라붙는 제자에 대한 애정과 두려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스승에 대한 분노와 보호본능이 공존하며 뒤엉킨 두 사람의 감정은 그래서 단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도 복잡한 것이라 언제나 휘청이며 위태로웠다.
서로를 끝없이 이해하고자 했으나 결코 자신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두 남자. 자신만은 그를 모두 안다 자만하고, 그는 절대 나를 알지 못한다는 오만함이 빚어낸 비극은, 그리하여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비수를 꽂는 비극으로 치닫고야 말았다. 그토록 원했던 상대방을 얻지 못한채, 상대를 오해하고 자신을 배반하며 자신을 죽이고 서로를 죽이는 것으로 말이다.
작가는 <은교>의 키워드를 갈망이라고 했다. 무엇인가를 끝없이 원하는 바로 그 마음. 노 시인은 은교를 통해 자신이 지난날 유예시키고 돌아보지 않았던 순수의 감정과 서지우로 대표되는 인간의 마음을 갈망했다. 서지우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노 시인의 세상과 그의 시를 갈망했다. 은교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에게는 없는 안정과 미래, 그리고 사랑과 평화로움을 갈망했다. 그들 모두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서로를 끝없이 갈망했지만 결국 그 갈망으로 인해 그 누구도 원한 것을 얻지 못하고 상처만을 끌어안은채 잔인한 목마름만을 남겨야 했다. 어쩌면, 그래서 갈망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원하는 소망이나 희망, 그리고 욕망이 아닌 갈망 말이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처절하게 원하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못했기에, 그래서 그 주변의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못해 그들 주위를 맴돌던 오해와 갈등을 미쳐 돌아보지 못한 아둔함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미련함을 갈망이라는 단어 이외에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모든 것을 꿈꾸게 만들었으나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던 <은교>라는 이름의 그들의 갈망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그들의 갈망은 이제 몰스킨의 한줄 끈으로 남았으니 그들도 이제 그들을 파멸로 이끈 갈망에서 벗어나 그들이 진정 원했던 순수와 시를 향해 한마리 당나귀의 등을 나누어 타고 타박타박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