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장으로의 초대 을유세계문학전집 23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박혜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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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생소한 이름의 작가,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책을 만나게 되면 가끔은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비교적 익숙한 문화권의 책이거나 혹은 잘 알려진 작가의 책이라면 느끼지 않아도 될법한 이런 무게감들은 뭔가 책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아닌 그 이외의 것들이 책의 내용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 것 같은 소위말해 배경지식이 딸리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물론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온전히 그 안의 내용만으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아마도 이런 공포는 잘 모르는 어떤 것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원인 모를 두려움을 한껏 업고 다가온 책 중 한 권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생소한 러시아의 문학, 그러나 그 안의 내용만으로 충분한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조금 어렵게 생각되는 러시아의 역사나 사회적 분위기를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요소로 포함하지 않는 소설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러시아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조금은 몽환적이고 조금은 어리둥절한 그 느낌을 한껏 담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전혀 러시아스럽지 않지만 완벽하게 러시아스러운(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이야기 <사형장으로의 초대>. 나보코프라는 작가의 가장 환상적인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사형장이라는 사뭇 공포스럽고 두렵기만한 소재를 가지고 말이다


불투명한 죄인 친친나트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친친나트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형을 선고받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친나트가 사형을 선고 받은 이유는 다소 당황스럽다. 현재의 법체계에서는 있을법하지 않은 죄. 바로 불투명한 존재라는 것이 이유가 된다. 불투명한 존재라니.. 도대체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닌 죄란 말인가? 친친나트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모두가 투명한 존재로 규정되어진다. 모든것이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 유리관처럼 뻔하디 뻔한 것.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과 사람들의 사고, 그리고 그들의 태도와 행동하나가 모두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같은 것을 투명하다고 규정하고 이러한 투명한 사람의 규정에 벗어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소위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이라 말하는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하는 친친나트를 상대적으로 불투명하다고 규정해버린 것이다. 모두가 투명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마을에서 친친나트의 불투명함은 참아줄 수 없는 죄악이 되고, 이 죄가 친친나트를 참수형이라는 벌과 함께 죄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완벽하게 비극적인 배경을 완벽하게 희극적으로 표현해낸 이야기.

<사형장으로의 초대>의 가장 주요한 무대는 사형을 언도 받은 친친나트가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감옥이다. 그가 불투명함의 죄목으로 투옥되고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감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모습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보여지는데 여기서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과 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 입장이 바뀌어 보인다.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되는 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아닌 투명한 사람들이고,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들을 보며 나름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 친친나트인 것이다. 독창성이 결여된 투명한 사람들은 이제 곧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친친나트를 향해 조롱과 비난을 멈추지 않고 친친나트는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알려달라는 마지막 부탁까지도 외면당한채 환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 그리고 투명함과 불투명함이 뒤섞인 어지러운 나날들을 유지한다

자유로운 인생을 그리는 친친나트의 마지막 탈출구.

<사형장으로의 초대>의 마지막은 친친나트의 사형집행으로 끝을 맺는다. 시종일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을만큼 어지러운 상황을 연출하던 이야기는 그 희극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정해진 시간을 따라 친친나트의 사형집행을 그려내고 친친나트는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주인공의 이야기로 비극을 맞이하여야 하는 <사형장으로의 초대>은 그러나 이 비극이 친친나트 개인에게는 그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탈출구라고 말한다. 불투명함을 죄로 치부하고 그만의 사고와 행동을 차단당한 곳에서 탈출해 불투명함을 투명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유의 그곳. 그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탈출구를 사형집행이라는 죽음의 단어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형장으로의 초대>을 읽는 동안 나는 이 독특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내내 고민했던 것 같다. 눈으로 보이는 환상과 사실의 어지러운 교차 뒤에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장으로의 초대>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책의 뒤에 첨부된 책의 해설을 꼼꼼히 읽어보았더랬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마치 모의고사를 본 고등학색이 답안을 맞춰보는 심정이었달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만이 가지는 환상적이고 다채롭지만 그래서 어지럽기까지한 복잡한 분위기로 인해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점은 <사형장으로의 초대>안에 담긴 이야기는 죽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죽음 이상의 것을 그린것이라는 사실이다. 서로 투명하다 외치는 불투명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불투명함을 투명함으로 받아들여주는 그곳. 그곳을 향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친친나트의 물리적인 죽음이 그에게는 한편으로 새로운 탄생이 되었음을 그리는 소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래서 해설의 어느 말처럼 형이상학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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