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구판절판


어린 시절, 나만의 보물들을 모아두었던 작은 상자를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엄마 몰래 동생과 사서 모았던 예쁜 종이인형, 생일날 친구가 선물해준 작은 머리핀, 그리고 문구점 한쪽 귀퉁이에서 자리 잡고 있던 뽑기 기계에서 뽑았던 플라스틱 반지들이 담겨있었던 그 작은 상자를 잃어버리고 나는 몇 날 며칠을 시무룩해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큰일도 아니었었다. 상자를 채우던 종이인형은 더 예쁜 종이인형이 생기면 늘 교체되고 있었고, 생일날 친구에게 받은 머리핀도 예쁘다며 머리에 며칠 달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때 내가 한참을 아까워하며 시무룩해있었던 것은 그 작은 상자 안을 채우고 있던 종이인형과 머리핀, 그리고 작은 플라스틱 반지가 아니라 바로 그 상자 자체였다고……. 상자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든, 내가 그 상자를 아끼고 그리워했던 건, 그 상자가 가리키는 나의 기억과 추억들, 바로 그것이었던 거다. 무엇인가를 채우고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작은 상자는 나에게 바로 지키고 그리워해야할 기억과 추억이 있다는 상징 같은 것이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그 작은 상자를 잃어버린 순간 나는 동생과 엄마 몰래 종이인형을 사서 자르고 예쁘게 다듬었던 시간을 잃어버리고, 생일날 나를 축하해주던 친구를 잃어버리고, 학교 문구점 구석에서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며 뽑기 기계를 돌리던 그 순간을 내 머릿속에서 잊어버릴까봐 시무룩해졌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온 시간의 나열이 아니다. 기억은 그 사람의 인생전체를 채우는 시간들이고, 사건들이며, 사람들이고, 의미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기억에 추억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돌이켜 생각할만한 의미를 가진 기억들에게 말이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진 이 하나의 능력, 지난 일을 기억하고 돌이킬 수 있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인생을 빼앗겨버린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지학분야의 전문가로 전 세계의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하버드라는 이름의 대학에서 종신교수의 직위를 획득한 성공한 커리어의 대학교수 앨리스. 그녀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학자이며, 자신만큼 성실하고 훌륭한 배우자를 두고 있는 행복한 아내이고, 모두 자신의 마음 같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는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둔 단란한 가정의 어머니였다. 언제나 거의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었던 그녀의 인생. 그래서 그녀에게 어느 날 소리없이 찾아든 단 하나의 불행이 가장 속수무책이고 치명적인 이름을 달고 찾아왔을 때, 그녀는 당연히 너무도 무섭고 치욕스럽지 않았을까? 인지학이라는 분야에 권위자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녀가 가장 자신있게 설명하고 말할 수 있었던 인지능력 자체를 위협받아야 하는 상황은, 어쩌면 그녀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잔인한 방법의 고통이자 위협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그렇게 자신이 가진 가장 중요한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모든 것들의 중심에서 모든 것들의 가장 소외된 구석으로 내몰리는 한 여성과 그 여성이 속해있던 세상이 점점 작아지는 가장 잔인하고 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가 그리는 알츠하이머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자신이 자신이었다가 자신이 아니게 되고, 나의 가족도 나의 가족으로 자리에 앉았다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되어 이야기를 건넨다. 몇 십년을 걸었던 길임을 알면서도 길을 알 수 없고,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늘 혼란하기만 하면 오히려 좋으련만 다시 자신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스스로를 고통스럽고 자조적으로 만들어놓기도 한다. 신체적인 모든 것들이 정상이지만 단 하나 세상을 보고 인지하는 능력이 정상이지 못하기에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앨리스. 그래서 모든 것들의 중심에서 모든 것들의 가장 소외 된 구석으로 밀려나 버린 그녀의 모습은 더욱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누구보다 뛰어난 지적능력을 가졌던 앨리스에게 그런 알츠하이머는 누구에게보다 더욱 큰 언제나 자신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고통이며 언제고 자신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었을까?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들만의 행복한 추억 만들기로 치장하기 보다는 알츠하이머라는 적 앞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통해 새로운 소통의 길을 열게 된 작은 딸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모든 것이 희미해가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끈에 대해서도 말이다.


누구보다도 강한 신념으로 언제나 포르테와 포르티시모만으로 가득 채운 인생을 살던 앨리스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기호 피아니시모. 그래서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피아니시모만이 남은 그녀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남은 포르티시모를 선물한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이어야 했던 그녀의 인생의 마지막에는 마음으로 나눌 감정과 감동, 그리고 사랑만을 남겨놓음으로서 말이다. 그녀의 머릿속 기억에는 피아니시모라는 아주 여린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그녀가 가족과 나눈 마지막 시간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 남은 그 무엇도 지울 수 없는 포르티시모라는 기호로 기록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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