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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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일방적이다.
사랑은 편파적이다.
사랑은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랑에 빠져 있었기에 인생의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으나, 아름다움 대신 두 손을 내어주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비너스처럼, 한때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그들을 환각상태의 죽음으로 몰고갔다던 압생트 빛깔의 바닷물에 몸을 맡긴 그렇게 누군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있는 내가 너무도 한심해서, 나는 사랑을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랑은 나를 세상의 작은 점으로 만들어버린다고, 그래서 사랑에는 공평함이라는 것이 없다고, 사랑은 잔인하다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몸을 던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팔이 잘린 비너스처럼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듯 자기의 색을 찾고, 사랑이란 말을 듣고, 말하고, 쓰는 것 조차 유치하고 어리석다고 느껴졌을때 즈음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원래 그 누구에게도 의지를 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열여섯의 어린 소녀 누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간직했던 자신의 사람을 잃는다. 자신보다 훌쩍 나이가 많은 사촌오빠, 그래서 더욱 비밀스럽고, 비밀스럽기에 스스로에게는 더욱 간절했던 은밀한 마음이 서강주의 결혼을 통해 이제는 더 이상 흘려보낼 작은 틈새마저도 막혀버리게 된 것이다. 어린 소녀의 갈 곳을 잃은 마음은 그녀를 들판으로 내몰고, 목적없이 서성이다 낯선남자에 의해 폭행을 당한다. 열여섯의 소녀는 그날 자신의 첫사랑을 잃고, 처녀를 잃고, 다정했던 아버지를 잃는다. 그리고 그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강주와 낯선 남자로 갈린다. 자신의 소녀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순결했던 자신을 기억해줄 유일한 존재로 서강주만이 남자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오랜시간 간직해온 소녀의 첫사랑은 그를 잃어버린 열여섯의 어느날 그녀가 성장을 멈추기로 작정한 채로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래서 일까? 그녀가 서강주를 다시 만나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랑은, 인정될 수 없는 불륜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녀가 열여섯 들판에서 멈추어버린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그 들판에서 잃어버린 다정한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으리라. 아버지와 닮은, 아버지처럼 인생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서강주의 모습에서 인생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열여섯 들판에서 잃어버린 처녀와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모습을 대신할 유일한 존재를 찾아내었으니까.. 누경은 서강주를 통해 소녀에서 여인이 되고 순결했던 자신을 기억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열여섯 들판에서 처녀를 잃어버린채 낯선 남자와 서강주만을 인식하려 했던 자신과 화해하려한다.

하지만 불륜으로 이름지어진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기력함을 더욱 잔인하게만 몰아간다. 함께 있지 않으면 존재조차 할 수 없는 누경. 함께 있어도 언제나 외로울 수 밖에 없는 누경과 서강주의 관계는 그래서 누경에게 더욱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일방적인 기다림과 처분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함, 누군가는 아름답다 말하는 사랑이라는 압생트 빛 바다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팔이 없는 비너스가 되어, 그 아름다움에 취할새도 없이 휩쓸리는 그 불안함과 위태로움은 그녀가 이겨내지 못할 유일한 균열이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누경은, 어떠한 균열도 깨어지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끌어안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누경은 이미 불안과 위태로움으로 균열이 생긴 사랑이라는 유리병을 자신의 팔을 잘라내어 바다에 몸을 내맡기는 것으로 끌어안고 버티며 견뎌내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정말 그렇게 끝없이 견디고 버텨야만 하는 것일까?

누경의 사랑을 보며, 나는 나의 지난 사랑들을 떠올리곤 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슬프고, 아프고,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그래서 끝내는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던 사랑을 말이다.

균열이 생긴 사랑을 끌어안고 버티며 견디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누경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병에게 남겨진 운명이라곤 언젠가 깨어지는 것 뿐이라고.. 그 안에 담긴 단 한방울의 물이라도 보존하고 싶다면 모두 쏟아내고 새로운 유리병을 준비해야한다고, 더 이상 그 무엇도 담을 수 없는 유리병이 과연 유리병이기나 하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조금 달라진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결국 사랑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균열이 간 유리병이라도 최선을 다해 견뎌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 그 유리병에게 남겨진 운명이 깨어지는 것이라면, 깨어지는 것 까지도 견뎌내야 한다고, 깨어진 유리조각에 손을 베이고 피를 흘리면, 그것까지도 견뎌내야한다고 말이다. 그것들을 모두 겪고나서야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사랑을 의미한다는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을 만들어 넘쳐나는 빛을 만들어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잃어버린 자신 때문에 무기력했고, 놓쳐버린 사랑때문에 고통스러웠던 누경이 이미 깨어진 유리조각을 모아 뜨거운 열을 더하고, 액체가 된 유리로 다시 새로운 유리병을 만들어내는 유리공예를 통해, 그리고 그 깨진 유리조각으로 만들어낸 어느 창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좋아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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