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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ㅣ 키워드 한국문화 3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예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에는 부쩍 원작 소설을 따로 두고 이를 기초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영화라는 영상매체만을 위해 만들어진 시나리오가 아닌, 소설이라는 장르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들, 영화만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신선도가 더욱 클 텐데, 왜 구태여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글자를 통해 내용을 접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영화라는 또 다른 매체로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리고 책을 읽은 사람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 이야기를 영화로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의 상상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바람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으로 수 없이 그렸던 장면과 모습들을 영화라는 실제 존재하는 화면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바로 그 마음 말이다.
상상을 구현해내는 매체로서의 그림.
책 속의 아름다운 이야기, 환상적인 배경,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수 없이 많이 그리게 되는 상상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수는 없을지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은 아마도 글자가 존재하고 그 글자를 통해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졌던 시간들 속에서라면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생동감 넘치고 현실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나 TV가 없었던 과거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유일한 매체는 아마도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림은 그저 아름다운 것들을 지면에 그대로 옮기고 보전하기 위한 단순 기록의 매체가 아닌, 말로서는 담아내기 힘든 표현과 구현의 매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구운몽을 그리다.
<구운몽도>는 바로 그 소설을 그림으로 그린 그림들 중 구운몽이라는 조선시대의 베스트셀러를 그려낸 그림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단순히 구운몽이라는 소설을 그림이 어떻게 표현해냈느냐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그저 구운몽도를 위한 책이 아니다. 소설을 매개로 하여 그림을 보는 법, 그림으로 소설을 보는 법, 여기에 소설 구운몽과 그림 구운몽도의 차이점까지 세세하고 예리하게 지적함으로서 소설로서의 구운몽과 그림으로서의 구운몽도에 각각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문학적 혹은 미학적 가치들을 찾는 법을 소개하는 데에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에 의의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구운몽이라는 소설과 그 소설을 배경으로 그려진 구운몽도에서 같거나 혹은 다르게 나타난 표현들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들의 바람이나 환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펴보고자 노력한 것이다.

자유를 써내려간 구운몽, 환상을 담아낸 구운몽도
구운몽은 사실 우리에게 그다지 어색한 제목의 이야기는 아니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보았고, 단골 시험소재로 사용되었던 경력까지 가지고 있기에 대략적인 내용이나 구성등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팔선녀를 만나 속세의 부귀 영화를 원한 죄로 세상으로 추방당한 성진, 그리고 그와 함께 인간세상에 나오게 된 팔선녀가 인간 세상에서 양소위와 8명의 여인으로 재회하며 속세에서 누릴 수 있는 갖은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는 인생을 얻게 되지만 모든것은 허망한 것이었고, 그 모든것이 성진의 한낱 꿈일 뿐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성진은 그 모든것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는 구운몽의 줄거리는 학창시절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되짚어 볼때 여러모로 충격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단지 소설이기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상상을 담아내는 소설이라는 장르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던 이 이야기는 그래서 문학사적으로도, 시대적으로도 대단히 파격적이었으리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자유분방함을 글로 써내려간 것이 구운몽이었다면 그 환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려낸 것이 바로 구운몽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운몽도에 담긴 이상을 꿈꾸다.
책에서 언급한대로 조선시대에는 일처다부제가 가능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양소유처럼 호방하고 천재적이면서 동시에 어리숙하기 그지 없는 인물이 실존할리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세상은 모든 것이 성별과 신분, 그리고 규약과 예절이라는 억압에 갇혀 있었던 시대였다. 때문에 모든 것은 작자인 김만중의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자 상상이고, 실존하지 않기에 더욱 환상적인 허구일 뿐이었을 것이다. 실제할 수 없었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상상. 구운몽은 바로 그 이루어지지 않을 것 만 같기에 더욱 그리게 되고, 도달할 수 없기에 더욱 애절히 바라보게 되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담아낸 이야기 인 것이다. 그래서 일까? 구운몽을 그림으로 표현해낸 구운몽도 역시 그 환상과 상상, 그리고 애절함을 가득담은 자유분방함을 그려낸다. 소설의 내용과는 상이하게 표현된 그림들, 때로는 뒤틀리고 황당한 설정들을 그림속에 담아내어도 그것이 구운몽을 시작으로 한 것이기에 자유와 상상으로 설명되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극락이라는 환상에서 시작하여, 현실에 내려왔으나 환상에 가까운 자유와 부귀를 누리는 양소유는 그래서 글과 그림 모두에서 사람들의 환상과 바람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은 이 이야기를 지을 당시 유배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지은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지만 유배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작가가 자신의 억눌라고 통제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구운몽을 지었으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구운몽의 진정한 가치는 단지 그가 환상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글속에 불어넣었다는 것이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독창성등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 보다는 그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당시의 백성들이 꿈에서나 그렸던 소망과 교감했다는 것이 아닐까? 무엇이나 이룰 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던 양소유의 자유, 바로 그것을 원했던 그 마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낸 구운몽도의 가치 역시 백성들의 환상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더욱 진하게 채색하여 녹여냈다는 것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