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북
F. E. 히긴스 지음, 김정민 옮김, 이관용 그림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절판


저마다 한가지씩은, 누군가에게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 한가지씩 있게 마련이다. 비밀이 아니라면 그저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말해버리기엔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운 불편한 이야기라도 말이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절대 누설해선 안되는 비밀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 마음 어딘가에 나를 짓누르는 불편한 이야기이도 하지만, 그 무게의 경중을 떠나 누군가에게 말못한 사연 하나를 평생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비밀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은밀하고 조심스러우며, 늘 무겁게 가라앉거나 아프기까지 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소년이 되어 고향을 떠나다.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는 존재. 무한한 신뢰와 든든한 위안으로 언제고 나를 품어줄 막연한 신뢰의 존재, 그것은 바로 나의 부모님이다. 어린시절의 나를 보호해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하게 해주는 부모님은 그래서 늘 나의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로 남아있는 부모님이기에 그런 존재가 던지는 배신은 더욱 그 아픔의 깊이가 크지 않을까? <블랙북>의 주인공 러들로가 바로 그 아픔을 간직한 아이이다. 술에 찌든 부모가 아이를 내세워 생계를 유지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아이에게 소매치기를 시키고, 그렇게 해도 자신들의 술값을 충당하지 못하자 아이의 이를 뽑아 팔아넘기려한다.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위험의 한 가운데 던져넣으려 하는 순간 러들러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부모를 뒷전에 버리고 자신의 고향인 도시에서 도망한다. 무한한 신뢰의 존재인 부모가 오히려 자신을 위협하는 곳. 그곳에서 러들러는 생존을 위해 도망하고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사는 전당포

러들러는 우연히 한 마을에서 전당포 주인인 조 자비두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살며 그의 일을 거들게 된다. 전당포 주인인 조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주 허름한 물건들을 고가에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밤에는 그들의 비밀들을 사들인다. 그저 그들이 마음깊이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치명적인 비밀들을 듣고 그 값을 후하게 치루어주는 일. 러들러가 맡은 일은 그들의 비밀을 커다랗고 검은 블랙북에 옮겨적는 일이다. 사람들의 비밀을 사는 사람. 그리고 그 비밀들을 지켜주는 사람. 러들러는 조의 이런 생활에 조금씩 의구심을 품는다.


비밀, 사람들을 움직이다.

한 마을의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밀들은 한가지 점에서 모아진다. 그리고 그 점은 바로 마을의 단 한명의 부자인 제레미이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빚을 지고 있는 제레미, 그는 그가 도박으로 돈을 잃으면 자신에게 빚을 진 자들의 돈을 긁어내는 이로 조와 러들러가 마을로 오기 전부터 악명이 높은 악당이다. 그런데 한밤에 조가 사들이는 마을 사람들의 비밀에는 모두 이 제레미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 것이다. 결국 제레미에게 약점을 잡힌 사람들은 그들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제레미의 요구에 응하게 되고 더욱 나쁜 일, 그리고 더욱 저질스러운 일들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마을 사람들의 비밀에는 바로 제레미의 은밀한 손길이 뻗어있는 것이다. 비밀을 조에게 팔았던 사람들은 은연중에 조가 마을 사람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에 조가 응답하지 않자 믿음을 배반했다며 오히려 조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누구도 믿을 수 없지만 누군가를 믿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들은 결국 도움을 주었던 조라는 그들의 은인마저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음에 비난하기 시작한다. 조금의 것으로 만족함이 마땅했던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조금의 도움을 주었던 조의 관계는 원하는 자와 베푸는 자의 입장을 부여하며 끝없이 원하고 끝없이 요구하는 인간의 몰염치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는 그들에게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현실에서 그가 해줄 수 있는 아주 작은 도움을 줄 뿐이다. 마땅히 고마워해야할 존재를 향해 더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신뢰도, 이해도, 양심도 없어 보인다. 결국 악인만이 욕망을 내보이고 끝없이 가지려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 가운데에도 언제가 무언가를 원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블랙북>은 결국 그 마을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철저하게 권선징악이라는 동화적인 교훈에 입각하여 내려진 결론처럼 보이는 블랙북의 결말은, 그러나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보았던 스스로의 악한 모습과 욕망을 떠올려 보게 한다. 극단의 모습으로 치닫지는 않았기에 악인의 오명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잔인해질 수 있는 내면의 조금은 어두운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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