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절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프로그램 중 롤러코스터라는 개그 프로그램이 있다. 시청률 1%넘기기가 어렵다는 케이블 방송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나 은근히 인기있는 방송, 혹은 대놓고 인기 있는 방송이 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간판 코너는 바로 남녀탐구생활이라는 코너이다. 같은 상황에 처한 남자와 여자의 다른 사고방식과 대처방법에 대해 비교하는 이 코너의 시작을 알리는 말은 참으로 간략하고도 함축적이기까지 하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그 문장은 바로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 남자 몰라요."이다.

독특한 구성의 새로운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라는 제목을 가진 한권의 책. 이 책을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떠올리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특이하다'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정말 특이하다. 무엇이 특이한고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의 구성적인 면이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독일의 어느 출판사에서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청탁받은 노년의 한 작가가 그의 글을 타이핑해주는 아름다운 29의 필리핀 여인 안야와의 원고 작업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적어내려간 이야기이다. 또 안야 역시 노년기의 작가와 함께 타이핑일을 하며 겪었던 본인의 심경을 적어내려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글에는 세뇨르 C라 불리우는 노년의 작가가 쓴 '강력한 의견들'의 원고도 포함되어있다. 한권의 책에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원고와 세뇨르 C의 안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안야의 세뇨르 C와 그의 연인 엘런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페이지들은 3단의 구성으로 상단에는 세뇨르 C의 원고인 '강력한 의견들'이 들어가고, 그 아래에는 안야와 세뇨르 C의 이야기들이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 소설.

원래 책을 읽을때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지 않는 편이지만, 이 책을 처음 만났을때 이 소설만이 가지고 있던 이 독특한 구성에 잠시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책을 옮긴이는 도대체 이 책을 어찌 읽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옮긴이의 말을 읽었었다. 옮긴이의 말을 또 다시 옮겨보자면, 책을 읽을때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각각의 단에 속하는 세뇨르 C의 강력한 의견들과 안야의 이야기, 그리고 세뇨르 C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로 읽던지 혹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후 강력한 의견들을 읽던지 혹은 모든 이야기를 한번에 한 페이지로 읽던지 말이다. 나의 선택은 이것들중 두번째였다. 안야와 세뇨르 C의 일기를 읽고 난 후 세뇨르 C의 원고인 강력한 의견들을 읽으며 하단의 일기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는 것이다.


강력한 의견들을 부드러운 의견들로 이끄러낸 안야와 세뇨르 C의 변화

세뇨르 C와 안야는 원고를 쓰고 타이핑을 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그 중간에 완성물로 모습을 드러내는 강력한 의견들의 원고를 통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첫 만남에서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외관적으로 보이는 서로의 피상적인 모습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이 두 사람은 세뇨르 C가 쓰는 원고를 통해 안야가 그의 생각을 읽고, 안야의 의견을 통해 세뇨르 C가 안야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 안야의 생각과 세뇨르 C의 교감은 세뇨르 C가 쓰고 있는 강력한 의견들의 원고 전반에 조금씩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청탁받은 원고를 쓰는 일을 다시 타이핑하는 수동적인 일에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매개로 하여 전혀 다른 세대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와 교감하는 것이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원고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운수 좋은 날 처럼 반어적인 어느 운 나쁜해의 일기

세뇨르 C의 강력한 의견들은 안야의 도움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세뇨르 C의 원고는 거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안야가 붙인 이름대로라면 '부드러운 의견들'이라는 또 다른 원고가 완성된 것이다. 세뇨르 C와 안야의 교감은 세뇨르 C를 세월과 사람들 사이의 고립에서 꺼내고 세뇨르 C의 강력한 의견들을 부드러운 의견들로 바꾸어 놓은 영향을 끼친다. 안야 역시 세뇨르 C와의 관계에서 편협하고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던 자신을 버리고 조금 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시각을 가진 새로운 안야로 변화하게 한다. 안정되고 확실했던 엘런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자신을 위해 과거를 과거에 묻은 안야, 그녀와 세뇨르 C의 관계는 짧은 포옹으로 끝이 난 듯 보이지만, 안야의 마음은 세뇨르 C의 내면에 머물고, 세뇨르 C는 안야를 통해 새로운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기회를 얻게 된다. 안야와 세뇨르 C의 만남은 세뇨르 C에게는 자신을 버리고 안야에게는 엘런을 버려야했던 그들만의 위험을 감수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상대를 바라보는 눈과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그 이상의 관계로 서로를 변화하게 하는 교감의 힘. 무언가를 버려야했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그래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들만의 어느 아름다운 해의 일기로 기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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