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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수집가 - 어느 살인자의 아리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정창 옮김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화가와 가수들, 그리고 때로는 정치가이기도 한 그들은 간혹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일화로 남기기도 한다. 이런 일화는 때로는 미스테리한 신화로, 때로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쉽으로 그 형태가 참 다양한데 이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후에 다양한 형태로 풍부한 이야기들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물론 작가적 상상력들이 더해진 소설이기에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소설들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탓에 좀 더 생생하고 기억에 오래남기도 한다. 그것이 순전히 상상일 뿐이라도 말이다.
실존했던 테너가수와 그의 아내가 남긴 조금은 미스테리한 이야기
이 소설 역시 이렇게 실존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실존했던 테너가수 루트비히 슈노어와 그의 아내 말빈 가리구에스는 실제로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바그너의 오페라 초연을 한 인물들이며 공연을 마친 루트비히의 다소 극적인 죽음에 그의 사후에 미쳐버린 그의 아내가 실성한 상태에서 했다는 다소 황당한 망언들까지 뒤엉켜 소설의 결말을 만들어준다. 물론 책 속의 이야기는 이렇게 실제였던 사건들에 비해 다소 당황스러울만치 신화에 의존하고 있지만 신화로 시작된 이야기가 현실로 결말지어지고 이후에 다시 저주걸린 작품이라는 전설로 이어지면서(실제로 바그너의 이 작품에는 저주가 걸려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전해졌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혼동하게 하기까지 한다.
자신을 위해 수많은 이들을 죽였으나 사랑하는 한명을 위해 자신을 죽인 한 남자의 이야기
루트비히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잔혹한 살인자인 동시에 그들에게 사랑의 행복을 선사한다. 사랑의 노래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루트비히는 사랑을 팔아 삶을 연명하는 것이다. 타인이 죽이는 것에는 무게를 두지 않고 자신이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너무나 잔혹했던 살인자가 살인을 멈추기로 한 것은 우습게도 또 다시 사랑이다. 수 많은 여성을 죽이며 양심을 피했던 그가 스스로의 사랑 앞에서는 그토록 잔혹하게 연명한 삶을 미련없이 내버릴 수 있었던 것. 그렇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라는 존재를 끌어안고 간다. 역시 인간에겐, 특히나 사람의 감성을 움직여야했던 예술인들에게 사랑은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족쇄였던 것일까?
작가는 혹시 염세주의자?
주인공인 루트비히는 수많은 사람을(이성 뿐 아닐 남성까지도 포함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목소리만으로 유혹할 수 있으나 그의 목소리에 유혹 당한 이들은 단 하룻밤의 댓가로 죽음에 이른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저 그에게 매혹당한것이 이유일뿐. 루트비히의 사랑의 목소리를 들은 댓가를 죽음으로 치루어내야하는 그녀들에게 작품은 어떠한 연민도 드러내지 않지만 작품이 끝에 다다르면 이 불편한 설정은 불멸의 사랑은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맞닿으며 설명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죽었지만 죽는 순간 행복했기에 그녀들은 불멸의 행복을 얻었고, 그녀들이 불멸의 행복을 얻기 위해선 죽음이 필요했다는 설정. 참으로 서글픈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지극히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다.
신화와 현실을 절절히 섞었다지만 사실 실존했던 것들은 잠시잠깐씩 얼굴을 들이밀 뿐이고 책은 대부분 상상의 세계로 나를 끌고 다녔다. 그래서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게 책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꽤 재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