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포장마차 2 - 희망이 떠나면 무엇이 남는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정가일 지음 / 들녘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0년에 등단한 정가일은 어느덧 필력이 20년 차에 접어드는 중견 소설가(흔히 '작가'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렇게 표현하면 큰 실례란 점을 알게 된다)인데 그의 대표작은 2017년에 발표되어 '한국추리문학상대상'을 수상한 <신데렐라 포장마차>(이하 '신포')다. 3년 만에 나온 신포 2는 시리즈의 계속을 알리는 신작이다. 45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가독성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하다.

책셰프를 표방하는 정가일은 미식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 밤 11시부터 자정까지만 영업하는 신출귀몰한 프랑스식 푸드트럭 신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치는데, 이번에 제공되는 메뉴는 '솔 베로니크'와 '글로우 칵테일' 두 가지다. 신포를 운영하는 프랑스 청년 셰프 프랑수아 외에 과거를 잊어버린 탐정 김건, 한국 최고 궁중요리 전수자의 딸이지만 프랑스식당의 수셰프로 일하는 소주희, 까마귀 가면을 쓴 악마가 나오는 악몽에 시달리는 민완 형사 신영규 등의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과거사가 오버랩되면서 소설을 풍성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신포 전편을 읽어야 이들의 관계도가 명확하다.


정통 추리의 요소가 그리 강하지는 않고, 일상에서 범죄의 향기가 약하게 묻어나는 코지 미스터리에 가깝다.

하지만 국제적인 비밀조직 레메게톤의 거대한 음모가 개입되면서 판을 키우는데, '솔 베로니크'에서 강력하게 등장한 사이코패스 강하라의 후일담과 함께 시리즈 3편을 기약하게 만든다. 아마도 정가일은 김재희의 <경성 탐정 이상> 같은 연작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는 모양인데, 신포 2에서 무언가 시원한 해결이 나진 않는다. 큰 그림의 한 단면을 본 듯한 느낌으로 다음 편을 예고하며 끝난다.

"추리소설을 읽는 건 안정된 생활을 하는 '중산층'들이래요. 자신들의 평화롭지만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줄 탈출구로 추리소설을 찾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요청 이후로 사실상 중산층이 몰락해서 모두가 힘들게 살기 때문에 현실을 벗어날 탈출구로 추리소설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죠.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 열 명 중 여덟 명이 자신을 빈민층이라고 생각한대요. 그런 상황에서 한국 소설가가 쓴 추리소설은 모두가 다 아는 암울한 현실 이야기일 테니 탈출구 역할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럼 외국 추리소설은 왜 잘 팔리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현실을 다루기 때문이죠. 사실상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해서 그럴 수도 있고요." - P 224~225

음미해 볼 만한 분석이다.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다는 핑계로 서구, 일본은 물론 북유럽, 중국 추미스까지 기웃기웃 대지만 어쩌면 과거 가요보다 팝을, 방화보다 외화를 선호했던 근성이 잠재되어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한다.

K-스릴러를 더 많이 찾아 읽겠다.


"믿기 힘든 상황들이 하나로 모인다면 그 자체에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 P 274


미각을 자극하는 소설 신포 2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저자 후기다. 정가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책 한 권 내지 못한 선배 소설가 이철호에 대한 추억과 존경은 신포의 탐정 김건으로 오마주 되었고, 소설 속 한국추리소설가협회 회장의 이름은 '이철호'로 명명되었다.

낮고 부드러운 말투, 신사답고 우아하며 품위 있는 행동, 백과사전을 모두 씹어 먹은 것 같은 박학다식함, 연극배우 같은 큰 표정...

후배의 작가 인생에 롤 모델이요 멘토가 되었던 누군가, 감동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우아 吾友我 : 나는 나를 벗 삼는다 - 애쓰다 지친 나를 일으키는 고전 마음공부 오우아 吾友我
박수밀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우아(吾友我)는 '나는 나를 벗 삼는다'라는 뜻으로 이덕무는 이 말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박수밀 한양대 교수가 쓴 <오우아>는 그간 월간 『샘터』에 '옛사람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도 연재되었던 원고들을 모은 책으로 '애쓰다 지친 나를 일으키는 고전 마음공부'가 부제다.

국내 고전을 꾸준히 연구한 고전문학자 박수밀 교수는 고전 속 옛사람들의 지혜를 현대에 되살리는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는데, 그가 특히 닮고 싶은 부분은 박지원의 '합리적인 이성', 이덕무의 '온화한 성품', 박제가의 '뜨거운 이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책의 본문에는 이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중국 고사도 가끔 나오긴 하지만 책의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3인방을 필두로 국내 지식인들의 목소리와 사상을 주로 전달하는데 이규보, 유몽인, 장혼, 이익, 이옥, 홍대용, 정약용, 이용휴, 홍길주 등이 <오우아>를 통해 다시 현대로 소환된다.

고전 마음공부의 세계로 안내하는 <오우아>는 300쪽이 안 되는 분량이지만 큰 울림을 주는 단단한 책이다.

강병인이 작업한 표지 캘리그래피부터 단아하고, 중간중간 2페이지에 걸친 여백이 있는 사진들이 있어 내용과 풍경이 조화를 이루면서 읽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독자들이 짐작하는 바대로, 여기에 등장하는 옛 선현들은 누구나 할 거 없이 금은보화를 탐하거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신분이 천한 자라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친구의 소중함을 알았고, 무엇보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 마음의 중심을 잡았던 분들이다.

흔히 나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요, 그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 또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가 크다는 반증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나는 나를 벗 삼는다'라는 화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혼밥이나 혼술이 낯설지 않은 시대다.

거기다 코로나로 인해 언택트, 사회적 거리두기의 분위기에다 이 사태가 쉽게 진정되지 않을 듯한 불길한 예감이 매우 강하게 드는 시대이지 않나.

책에 등장하는 조선 시대 인물들은 대부분 대쪽같은 선비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탐욕보다는 자족을 평생 추구했고, '홀로 있는 데에서도 삼간다'라는 신독(愼獨)을 지켰으며, '다른 것은 다양한 것 중의 하나일 뿐 틀린 것이 아님'을 아는 분들이다.

동양 고전을 다룬 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물론 일반인들이 읽어도 마음 수양에 좋지만 정치인들이 좀 많이 읽고 본인 행동을 톺아보는 계기와 자극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유혹에 시달리고, 분노, 시기, 질투, 욕심에 휩싸일 때 <오우아>는 좋은 마음의 안식처가 될 책이다. 뭐니 뭐니 해도 혼자 하는 행위의 최고봉은 독서 아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던 우리가 이달의 장르
가랑비메이커 외 20인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독립출판으로 나온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던 우리가>는 문장과장면들의 비정기 간행물 프로젝트 《이달의 장르》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이달의 장르》는 매호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제한 없는 장르와 분량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데, 첫 시리즈(vol.1)의 주제는 '아버지'다.

이 시리즈는 다수의 필진이 참여하고, 그 형식 또한 인터뷰와 수필, 소설과 시, 일기, 사진과 그림 등 다양한 방식을 총동원해서 주제를 담아낸다. 한마디로 형식 불문!

책을 기획하고 출간한 '고준영의 딸' 고애라(가랑비메이커)가 전면에 나서기는 하지만, 21명의 필자들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들은 아니다. 개중에는 본인 이름의 책을 낸 분들도 있다는데 아마도 독립출판의 형식을 띤 모양인지 이름만으로 알만한 저자는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우리들 중 'one of them'이라고 봐도 되겠다. 글솜씨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표방하는 모양새다.

집에 있는 먼지 묻은 각자의 앨범을 펼쳐보기 바란다.

어릴 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진이 있다. 형제자매와 찍은 다수의 사진, 엄마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보이고, 어쩌다 간간이 거의 '로봇' 표정을 한 아빠가 나오는 인증샷 같은 가족사진도 보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많이 없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어릴 적 대부분 '나의 어린 시절'을 찍어 준 사람이 아빠였기에, 그는 사진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사진밖에 존재하지만 늘 그림자처럼 함께였던 투명인간 같은 존재, 바로 아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헌신과 희생...


'아빠'로 불렸던 그도 이제 어깨는 좁아지고 머리숱은 빠진, 누군가의 보호자가 아닌 보호를 받아야 할 '아버지'가 되었다.

찬란했던 '아빠의 청춘'은 이미 지난 지 오래고, 이 글에서 아빠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자녀들 대부분이 당시 '아빠'의 나이가 되었고, 또 다른 자녀들의 '엄마'나 '아빠'가 되었다.

추측건대 대략 자녀들의 나이는 40대가 많은 듯 보이고, 아버지들의 나이는 60대가 대부분이고 많다고 해야 80대 초반이다.

생물학적으로 엄마는 아들 바보, 아빠는 딸 바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대부분 필자는 딸이다. 딸이 늙어가는 아빠를 바라보는 마음은 무뚝뚝한 아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하다.


자녀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인 드문 경우가 있고, '절대 아버지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많은 사연들은 대부분 이 중간 선상에 위치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렸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던 아빠의 모습이 이제, 자녀들이 어쩌다 어른이 되니 당신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하고, 때론 용서도 하고... 늙었지만 여전히, 언제나 돌아가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인 당신의 존재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을 접할 때 감정의 저지선이 무너질 거로 마음의 무장해제를 한 상태였는데, 의외로 그런 부분이 많지 않았다. 가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정도 그 이상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아버지가 아직 생존 상태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고 추모하는 분위기와는 감정선이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직까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곁에 있음에 감사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흔한 말이지만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있을 때 잘해"

존재만으로 고맙고 힘이 되지만, 그 존재가 영원하진 않다는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맛 - 무엇이 당신의 독서를 가로막는가 5가지 맛으로 알아보는 인생 독서법
김경태 지음 / 프로방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공하는 리더(leader) 치고 엄청난 독서가(reader)가 아닌 사람이 없다. 그런 거 보면 '독서는 성공으로 가는 필수 조건'이란 가정은 누구도 반박하기 힘든 세상의 진리다.

나는 한 조직의 리더가 아니라고 피하려 들지 말자. 적어도 당신 인생에 있어서만큼은 리더 아니던가!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일상을 잠식하기 전에는 그래도 지하철에서 간간이 책이나 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지금은 종이로 된 읽을거리를 읽는 이는 소수 종족이요 거의 천연기념물 수준이다. 오죽 반가우면 누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무슨 책을 읽는지 유심히 살피게 된다.


<일년만 닥치고 독서>에 이은 김경태 작가의 두 번째 책은 역시 독서를 소재로 한 <독서의 맛>이다.

저자는 독서 3부작을 구상하며 <일년만 닥치고 독서>는 기초, 이번 책은 실전, 세 번째 나올 책은 심화 편으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한다.

'독서의 맛'의 5미(味)는

"독(讀)한 맛 : 당신은 원래 책을 좋아합니다

색다른 맛 : 책에 로그인되셨습니다

행동하는 맛 : 닥치고 독서하라

묘한 맛 : 취하지 않으면 독서가 아니다

변하는 맛 : 단언컨대 독서입니다"

다섯 가지 맛의 차이는 크지 않다. 기승전 '독서'로 귀결될 뿐.

책을 좋아하는 독자는 책에 관련된, 책을 소재로 한 책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책이나 도서관 이야기, 독서론, 서평집...

<독서의 맛>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종일관 독서를 권하고 독서의 세계로 어떻게든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독서 예찬론이자, 어떻게 하면 독서력을 올릴 수 있나 방법을 제시하는 실전 독서론이고, 지독한 독서의 과정을 통해 저자 스스로의 인생이 변했다고 고백하는 자기계발서다.

이미 나는 독서의 효용가치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고,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독서 중독자라면 <독서의 맛>을 읽는 재미는 덜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이 정도 수준의 고수라면 저자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김경태 저자는 전업작가를 꿈꾸지만 아직은 삼성 계열사에 다니는 회사원으로 투잡을 한다.

그는 늘 '독서법', 소설, 자기계발서 3종의 책을 가지고 다니며,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읽고 쓰는 자신만의 황금시간을 가진다. 책은 절대 깨끗하게 보지 않고 밑줄도 색깔 별로 긋고, 중요한 부분은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페이지를 접기도 하고, 필사까지 하며, 감명받은 책의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강의를 찾아 듣길 즐긴다.

향후 유학을 준비하며, 1년에 한 권씩은 책을 내고자 하는 야심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삼성 그룹의 업무 강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쩌면 내 모든 에너지가 사무실에서 100% 소진될 수도 있지만, 대오각성의 깨달음을 얻은 저자는 회사 업무조차 본인의 자아 성장과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활용한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회사 따로, 개인의 성장 따로 이따위 이분법 사고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로 독서를 말하곤 했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더랬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재미라는 측면에서, 독서의 적은 너무 많다. 유튜브를 비롯한 동영상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혹에 비하면 평면의 흰 종이 위에 펼쳐진 활자로 이루어진 책의 흥미는 너무나도 초라하다.

일단 영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이 그냥 눈으로 보는 순간 접수가 되지만, 책은 두뇌의 되새김질을 거쳐야 한다. 영상이 떠먹여 준다면, 책은 스스로 먹고 소화까지 시켜야 한다.

아직까지 '독서의 맛'을 모르는 독자들에겐 책을 가까이 하고픈 동기부여를, 일정 수준 이상의 독서 고수들에겐 단지 다독으로 그치지 말고 그 이상 선을 넘기를 자극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적 부족주의 - 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 / 부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es)는 제목만으로는 무슨 내용일지 감이 잘 안 오는 책이다.

이 책은 <타이거 마더>로 유명한, 예일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인 에이미 추아의 2018 년작으로 그녀의 5번째 저서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저자의 남편은 <살인의 해석>을 쓴 제드 러벤펠드이고, 이들 부부는 <트리플 패키지>란 공저도 낸 바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에게는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부족 본능'이 있는데,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족적 정체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종, 민족, 지역, 종교, 분파' 등에 기반을 둔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우리가 남이가?' 정서를 기반으로 한 패거리 문화쯤 되려나!

"인간은 그저 조금 부족적인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부족적이며, 부족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왜곡한다." - P 57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 고유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무언가를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이 부족적인 본능의 모든 것이다." - P 241

'정치적 부족주의'란 프레임으로 세계를 보면 많은 현상이 새롭게 보인다. 중국계이긴 하지만 저자 역시 미국인이기에 세계 도처에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한 미국이 왜 이렇게 헛발질을 했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이 이어진다. 미국의 군사·외교 관련자들에겐 필독서가 될 책이다.

미국의 눈으로 보면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베네수엘라는 그냥 하나의 국가일 뿐이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이 나라가 아시아에 붙었는지, 중동에 붙었는지 구분조차 어려울 수 있고, 베트남인이 아닌 그냥 일개 '동양인'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나라들에서 벌어진 문제들은 국가란 개념으로는 해석이 안 되고, 민족이나 종교, 인종 등 저자가 제안하는 '정치적 부족'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해답이 나온다.

미국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패배로 기록된 베트남전은 주로 공산화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미군이 개입했으나 땅굴전에 능숙한 베트콩을 당해낼 수 없었던 전쟁이자, 월남 패망 이후 수많은 '보트피플'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하지만 저자는 아직까지도 실패의 원인 진단이 부족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은 베트남전쟁이 왜 그렇게 잘못 돌아가게 됐는지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한 핵심 원인은 베트남의 민족(국가)주의가 가진 '민족적인' 속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 P 54

베트남, 특히 남부는 '시장 지배적 소수 민족'인 화교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일반 민중과 소수 화교의 반목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은 애당초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구조였기에 시작부터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인 거다.

"요컨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의 정권은 남베트남 사람들더러 화교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부의 형제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 P 71

역사적으로 중국,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의 의지를 놓은 바 없는 강인한 베트남의 투쟁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분명 미국의 입장에서 놓친 부분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보트피플'도 대부분 일반 국민이 아니라 기득권을 잃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화교였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베트남전을 다룬 두꺼운 책에서도 접하지 못하는 통찰력을 이 책의 2장 "베트남 : '별 볼 일 없는 작은 나라'에 패배를 선언하다"는 제공한다.

베트남뿐 아니라 이 책에서 개별 국가로 예를 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베네수엘라, 미국 모두 '정치적 부족주의'란 프레임이면 많은 현상이 보다 정확하게 이해가 된다. 마치 고차 방정식을 푸는 새로운 마스터키가 생긴 듯하다.

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는 미국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는지, 탈레반, 알카에다, ISIS는 어떤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서구의 시각에서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이들 전사들이 그곳에서는 '힙'하고 '쿨'한 이미지로 소비되는지, 왜 알카에다와 ISIS는 서로 경쟁 관계가 되었는지, 시아파와 수니파의 오랜 반목의 원인은 무엇인지, 미국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우고 차베스는 어떻게 베네수엘라의 국민 영웅으로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지...

오사나 빈 라덴이나 차베스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달인이었다.

"극단주의를 파악하는 데서 핵심은 빈곤 자체가 아니라 집단 간 불평등이다." - P 144


전 세계 지식인들의 예상과 희망을 뒤엎고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일목요연한 설명이 이어진다.

인구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백인들은 불안하다. 언제부터인가 흑인은 물론, 넘쳐나는 아시아, 남미인들로 인해 유색 인종, 이민자가 다수인 사회가 되어 가는 분위기인지라 심지어 백인이 부당한 차별을 받는다는 의견마저 나온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젠 미국의 백인들은 두 개의 부족으로 분열돼 있는데, 하나는 소득 수준이 높은 고학력자, 전통 인텔리 계층인 WASP의 적자들로 주로 도시/연안 지역에 거주하며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다.

다른 부족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계급으로 '러스트 벨트'를 비롯한 중서부나 농촌 지역에 거주하며 상대적인 박탈감이 심하고 그 분풀이로 인종차별적인 경향마저 보이며, 앞에 언급한 인텔리 부족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다수다.

트럼프의 당선은 이들 노동자 계층 백인들이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트럼프를 택한 결과다.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듯이 트럼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개인이 제정신이 아닌 것은 드물 일이지만

집단은 제정신이 아닌 게 정상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P 128


오늘날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전 지구적 평화와 번영은 커녕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인종 분쟁이 확산됐고 민족주의, 근본주의, 반미주의의 강도가 높아졌으며 징발, 축출, 재민족화 요규 등이 벌어졌고,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 본 적이 없는 규모의 인종 학살도 두 번이나 있었고, 진주만 공격 이래로 미국 본토에 대해 벌어진 가장 큰 공격이 있었다." - P 125

이 책을 읽으니 그나마 아직까지 단일민족 신화가 굳건히 유지되는 한국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나라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등이 있지만 <정치적 부족주의>에 등장한 나라들의 사례에 비한다면 애교 수준이다.

좋은 책이란 모름지기 기존 지식의 얼음을 깨는 지적 쾌감을 선사하거나, 아니면 책을 읽은 이후 작으나마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에이미 추아 교수가 신뢰할만한 저자임을 재차 입증하는 <정치적 부족주의>는 전자의 예에 해당하는 탁월한 역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