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모 왕자 - 詩說: 시적인 이야기
윤대녕 지음, 하정민 그림 / 열림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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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윤대녕의 중편 <에스키모 왕자>는 여지껏 그의 소설 세계를 일관해온 인간의 존재 탐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탐사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이번에 집중하고 있는 테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지나가 버려 잃어버린 시간과 아직 남아 있는 미래의 시간 사이에서 끼어있는 한 존재를 다루고 있다.

시간이라는 건 인간이 자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정해놓은 하루ㅡ해가 떴다 지고 달이 떴다 져 다시 해가 뜨는 24시간ㅡ는 다만 인간의 생활에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누군가가 만든 것일지도 모르고, 우리는 다만 그 시간의 틀에 자신을 맞춰 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런 물리적 시간이 아닌, 각각의 인간들이 모두 자신만의 시계를 가질 수 있다는 설정 하에 이 소설은 출발하고 있다.

5년 동안 시계공장에 다니며 그 동안 지각 한번 해본 적 없이 성실히 근무한 한 남자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며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한 달간의 무급 휴가를 얻고 그 기간 동안 어렸을 때부터 늘 자신을 찾아오던 에스키모 왕자를 기억해내는 것이 이 소설의 도입부이다. 그 이후 서하원이란 여자를 만나서 그녀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스스로 에스키모 왕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신비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털어놓는 수법으로 소설을 완성하고 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는 시간이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만드는 시계바늘처럼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는 한 남자는 시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셈이지만 자신의 시간은 잃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키모 왕자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결국 발견하게 되는 그 남자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너무도 아름다웠던 스무 살 젊은 날의 사랑과 죽음이었고 뒤늦게 참회의 심정으로 그 기억들을 되짚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의 곁에는 그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몇 번이나 마주쳤던 서하원이란 여인이 있었다.

마지막을 보면 영화 '와니와 준하'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구성이나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를 보면 이 소설은 감각적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신을 찾아가는 미스테리적인 느낌에, 우연인 듯, 인연인 듯 스쳐 가는 사람들은 다들 사연 있고 멋진 사람들뿐이다. 윤대녕 소설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인물이 주를 이루는 이런 소설은 매력적이다. 허나 가끔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구체성을 띠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구체적인 지명이나, 상호, 음악 등을 차용하는 것일까?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더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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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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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에 실린 두 편의 중편소설을 읽고 나니 뭔가 석연찮다. 일단 그 근거는 이전에 아주 좋게 읽었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란 작품으로 소급될 수 있는데, 세 작품이 이루는 메시지는 어느 정도 뚜렷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스토리 텔링의 차이가 세 작품에서 느껴지는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것으로 질적 수준을 논하기엔 「감상적 킬러의 고백」과 「악어」는 분명 문제가 있다.

먼저 「감상적 킬러의 고백」에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한 장면 전환이나 심리제시가 엿보인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수준이 격하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킬러마저도 상당히 일반화된 캐릭터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사건이 꼬리를 물다 결론에 이르러 화해되는 B급 헐리우드 액션물과 동급이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총을 맞기 전 표적이 되는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이유가 뭐냐고? 난 그놈들을 증오하니까… 양키, 그 양키놈들은 없어져야 해… 그놈들은 마약을 원하고 있어… 그래서 주는 거지… 그것도 거의 공짜 가격으로… 그놈들은 죄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야 해… 그것만이 우리 라틴 아메리카가 그놈들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대안이니까… '땀에 젖은 등짝',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 그 빌어먹을 국경 때문에 비참하기만 한 우리 멕시코인들… 난 말이지, 그 양키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마치 헐리우드에서 만들어낸 액션물 같다. 정의의 사도를 외치는 미국이 그들을 넘보는 다른 계층을 처단하는 듯한 장면을 보면, 정말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쓴 작가 세풀베다가 맞는 건지, 어이가 없다.

다음으로 「악어」는 추리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소설 역시 그저 그런 추리물에 지나지 않는 평범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결론마저 너무 작위적이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인디오들을 죽이고 그 지역 악어를 잡아다 수출하는 무역상을 처단했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걸 더운 여름밤에 소다수와 함께 킬링타임용 픽션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아, 얼마 전,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좋은 작가를 만났다고, 그래서 그의 작품을 애독하겠다고 다짐했건만. 앞으로 그의 소설을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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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음 / 이레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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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를 읽으면 그가 천상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려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그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풀어가다 보면 그의 산문은 어느새 시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고운 지은이의 심성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도 서서히 맑아짐을 느끼게 된다.

두 해 전인가, 학과에서 초청강연회를 열었는데, 그때 초대한 문사가 함민복이었다. 나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강연회가 끝난 후 술자리가 벌어졌다고 한다. 밤새 학생들과 술을 마시다가 어느 학생 자취방에서 자고, 대낮에 정신을 차려 일어나서 구토를 하더란 것이다. 근데 그가 곧바로 한 말이 압권. “또 마시러 가야지!” 그렇게 2박 3일을 학생들과 술을 마시다 돌아갔다고 한다. 그가 강연 명목으로 받은 돈은, 물론 고스란히 술값으로 지불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촉촉히 젖은 눈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을 천천히 읽어보자. 그러면 어느 결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볼 수도 있을 테고, 언제고 한번은 그 눈물이 왜 짠가 맛볼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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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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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첫 번째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을 읽으면 그의 소설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 바로 첫 소설집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언젠가는 닿으리라 소망하는 그 발걸음의 진행성에서, 회천을 시도하는 은어로 대변될 수 있는 존재의 시원(始原)에 대한 그의 열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이라는 지속되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글쓰기는,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라 해도 다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평범해져버린 30대 초반ㅡ‘희망의 밥그릇은 비워진 지 오래고 혁명을 꿈꾸기에는 벌써 나약해져 있는’ㅡ의 나이에 서 있는 그 불확정한 고민을 점치러 미아리를 탐행하는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과 한중수교라는 시대적 상황 위에 도시 남녀들의 고독한 감수성을 잘 녹인 「국화 옆에서」, 앞의 두 편의 소설과 비슷한 선상에 있지만 이 세계와 저 너머의 세계의 근원 대한 작가의 탐구가 돋보이는 「불귀」,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이 인상적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가슴속에 불멸의 인장으로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돌아가지 않겠다 라는 의미의 ‘불귀’란 하나의 단어가 이 세계와 동떨어진 또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작가의 발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남호교수가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로 꼽아 책으로까지 출간한 표제작 「은어낚시통신」은 지나치게 관념편향적, 몽환적으로 일관되며, 급변하던 90년대의 어떤 지적(知的)이거나 감성적인 문화의 우월감이 드러나 있는 듯해서(그것도 백화점 진열대에 나열된 상품처럼 구체적인 실명이 거론되는)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올해의 인기상품을 선정해서 신문에서 또 한번의 광고효과 같다는 느낌도 들고. 다만 모천으로 회귀하는 은어를 그릴 것이었다면 「은어(銀魚)」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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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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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어느 정도 흡사한 느낌이 드는 건 루이스 세풀베다도 라틴아메리카의 작가 중에 한 명이기에 느껴지는 동질감일 수도 있고,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라틴 아메리카의 실상을 꼬집는 메시지도 비슷한 선상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명명되는 <백년 동안의 고독>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주술적인 면을 강조하는 원주민들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의 요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수십 년 동안 전혀 책 한 줄 읽지 않다가 어느 순간 노인이 우연히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하는 등의 약간의 허구적인 상상이 가미되어 있기에 낭만적이고, 슬쩍 마법 같은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지, 배경이나 상황, 현실이 좀 더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변별점을 지닌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무엇을 지켜야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연을 비롯한 만물은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모든 것은 변하려고 하는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고, 가만히 있는다는 건 결국 정체 혹은 부패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변해도 될 것과 변해서는 안될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변해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에게 강제로 변하기를 요구하는 것 또한 안될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바닷가의 시골 마을에서 틀니를 끼고 고난을 겪으며 순수한 사랑을 완성시켜 가는 연애 소설을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며 미소지을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노인의 남은 평생 그 미소를 오래도록 지켜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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