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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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오랜만에 읽은 연애소설이었다. 읽다 보니 여러 작가들의 느낌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는데ㅡ윤대녕이나 아사다 지로의 분위기ㅡ 그것은 결국 하루키에게 빚을 진 감수성의 얘기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윤대녕이나 지로가 하루키를 읽지 않았더라도(하지만 지로는 분명히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장년의 젊은 남자의 감정운용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적어도 하루키의 소설이 갖고 있는 감수성은 그 시대에 폭넓게 수용되었기에 90년대 이후 나타난 젊은 작가들이 그런 시대적 정황, 감성에서 철저히 벗어나있다고 말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거짓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루키의 감수성이라 함은 무엇일까. 수많은 독자의 주목을 받으며 꾸준히 읽혀온 그 힘은 무엇일까. 내가 하루키의 모든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그렇다고 다수를 읽은 것도 아니다. 몇 편 되지 않는다.) 그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를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를 가지고 얘기를 해야될 것 같다.

이 소설이 37살의 남자 주인공 하지메의 사랑을 그럭저럭 아름답게 꾸며주는 건 그의 과거의 기억에서 기인한다. 한 개인의 일생 중, 어린 시절 혹은 유년 시절의 기억이 그 사람의 남은 인생을 좌우한다는 다소 순박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허나 어린 시절이라 함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도 같은 이미지로, 광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시절, 무지몽매하지만 더없이 순수했던 순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추억, 동경, 향수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누구인들 어린 시절을 겪지 않았으랴. 또 누구인들 한번쯤 나즈막한 그 친구의 손길을 그리워 해보지 않으랴.

이런 감상적인 인물이 초등학교 졸업 후 20년이 넘어서야 다시 만난 여인과의 해후가 아름답게 비쳐지기는 한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 하루키가 선택한 구성은 결코 사실적이지 않다. 대신 환상과 우연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고 오히려 한 사람의 일생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사랑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듯 싶기도 하다. 고로 내 얘기는, 이 연애소설은 실패했다, 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가 잃어버렸던 그 시간, 그 사람을 기억한다면 이 소설의 본연의 의무는 충실히 수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메가 평생을 두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마모토는 외동에 다리를 절었다. 그런 그녀(컴플렉스를 내재하고 있을)이기에 그녀 또한 그 유년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하지메를 찾아왔을 터. 그런데 시마모토는 다리 수술을 해서 예전만큼 다리를 절지 않는다. 이는, 하지메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 또, 다시 만나는 순간까지의 그녀의 삶은 너무도 오리무중, 짐작할 수 없다. 마치 현실세계의 인간이 아닌 듯 느껴질만큼. 과연 그녀는 이 세계에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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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청목정선세계문학 24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청목(청목사) / 198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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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자기의 고향이 있다는 것, 언제든 푸근히 반겨맞아줄 어머니가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멀리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어린 날의 기억이 아련히 햇빛처럼 부서지는 상상은 그 얼마나 안정적인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전쟁으로 인해, 그리고 사상으로 인해 삶이 엉망이 되어버린 한 우울한 영혼의 파리체류기이다. 그의 이름은 라비크. 직업은 외과의사. 하지만 여권이나 신분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능력이 조금 안되는 의사 대신 수술을 해주고 그 대가로 생을 연명해 나간다. 뒤를 봐줄 고위층 인사를 알고 있는 여자의 호텔에서 묵으며 경찰에게 붙들릴 일만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파리에서 거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라비크는 우연히 만난 조앙 마두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록 도망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하지만 사랑이 아니면 이 세상에 살아있을 이유가 그 무엇이랴)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늘 불법체류자로 쫓겨날 위험이 있던 라비크는 추방되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조앙 마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고 만다.

한편 다시 파리로 넘어온 라비크는 그때서야 자신의 처지와 본분을 다시 절감한다. 다시 돌아오려는 조앙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자신을 외롭게 지켜나간다. 그러던 중, 고국에서 자신을 고문하던 하아케를 발견하게 되고, 끝내 그를 죽이게 된다.

함께 살던 연극배우에게 권총을 맞은 조앙은 결국 라비크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고,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어 라비크를 비롯한 수많은 불법거주자들은 집단 수용소로 가는 트럭에 오른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이다.

전쟁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이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간혹 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버리면 버릴수록 가벼워진다는 사소한 진리를 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만은 버릴 수가 없다.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삶의 존재 이유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 속 어딘가에서 가장 큰 울림으로 요동치고 있을 그런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근원임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상하군요...... 사랑할 때에 죽어야 하다니.......'
죽어가는 조앙 마두가 남긴 이 말이 오래도록 가슴을 치는 건, 그들이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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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재즈일기 1 - 재즈 초짜, 어느날 리듬을 타다
황덕호 지음 / 돋을새김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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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즈의 초심자들이 읽기엔 약간의 어려움이 있지만, 장수풍뎅이라는 재즈 음반 가게를 인사동에 여는 한 남성의 일기를 가만히 쫓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식이 조금 쌓임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건, 여기 나온 음반들을 직접 듣고 싶어지는 욕구를 만들어준다는 것인 듯하다. 게다가 필자가 음악만큼이나 글맛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즈라는 강의 물살을 거슬러오르는 물고기가 되어 다양한 삶에 기반을 둔 재즈의 여러 층위의 감정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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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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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십분 내지 이십분이면 독파가 가능한, 짧막한 단편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부분보다 단편소설의 미학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까 한다. 일단, 소설 중에서 단편이 사그라들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장편소설과는 달리 짧은 시간에 숙독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의 형태를 지닌 문학장르로서 한번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읽을 수 있는ㅡ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나갈 수 없듯이ㅡ완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책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관처럼 아늑한 의자에 푹 파묻혀 수십명, 때로는 수백명이 동시에 소설을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동시에 들어온 사람들이 동시에 나갈 수는 없다. 그게 영화와 소설의 차이이다. 그걸 조금 설명하자면 영화가 우리에게 개인에 따라서는 생각의 여지없이 던져질 때가 있는 매커니즘이라면, 소설은 개개인의 호흡만큼 기다려줄 수 있는 미덕을 지녔다고나 할까.

어쨌든 쥐스킨트의 3편의 소설과 한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나름대로 단편이 갖춰야할 호흡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많은 것을 발설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는 점이 독특한 스타일로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평론가의 한 마디로 인생이 달라진 한 여류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깊이에의 강요', 그저 분위기만 남을 뿐이었던 '승부', 조개껍질에 잠식할 거라는 유언을 남긴 '장인 뮈사르의 유언' 모두 공통적으로 어떤 틀, 혹은 권력에 사로잡힌 것들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까딱하다가는 그렇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며.

그리고 그것은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라는 산문에서 조금 더 쉽게 풀어쓰고 있다. 이 글에서 화자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는 이제껏 읽었던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헌데 실제로 그건 나도 그렇다. 문학의 건망증이랄까,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내용이 상세히 남아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는 글 속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떄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떄문에 그것을 꺠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책을 마치는 단 그 한 줄의 글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쥐스킨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정말 이 말이 아니었을까.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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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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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은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 노력가라고 소개하는 한 일본 수학자의 학문에 대한,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지침서이다. 어느 것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 해주는 얘기 치고 나쁜 것이야 없겠지만, 인간으로서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지녀야할 자세를 배우는 데, 이 책은 읽어봄직하다.

이 책의 구성은 마치 산문집처럼 소제목을 단 짤막한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유년기부터 자신의 주된 연구인 ‘특이점 해소’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배운 지혜를 덤덤히 서술하는 이 책은 학문으로 커다란 성취를 이룬 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깊이, 한 분야의 장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넉넉한 삶의 태도가 깔려 있어 좋다.

이 책에서 내가 배운 교훈을 둘로 압축하자면,

1. 지금의 고난은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눈앞에 닥친 상황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한 발치 뒤로 물러서서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자.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자. 그러면 크게만 보였던 어려움도 더 먼길을 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2.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일단 꾸준히 하자. 그러다 기회가 생기면 열심히 하면 된다. 집착이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있으니.

그리고 기억에 남는 대목, loneness(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는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고독은 잃었을 때만이 외로워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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