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각각 십분 내지 이십분이면 독파가 가능한, 짧막한 단편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부분보다 단편소설의 미학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까 한다. 일단, 소설 중에서 단편이 사그라들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장편소설과는 달리 짧은 시간에 숙독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의 형태를 지닌 문학장르로서 한번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읽을 수 있는ㅡ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나갈 수 없듯이ㅡ완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책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관처럼 아늑한 의자에 푹 파묻혀 수십명, 때로는 수백명이 동시에 소설을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동시에 들어온 사람들이 동시에 나갈 수는 없다. 그게 영화와 소설의 차이이다. 그걸 조금 설명하자면 영화가 우리에게 개인에 따라서는 생각의 여지없이 던져질 때가 있는 매커니즘이라면, 소설은 개개인의 호흡만큼 기다려줄 수 있는 미덕을 지녔다고나 할까.

어쨌든 쥐스킨트의 3편의 소설과 한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나름대로 단편이 갖춰야할 호흡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많은 것을 발설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는 점이 독특한 스타일로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평론가의 한 마디로 인생이 달라진 한 여류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깊이에의 강요', 그저 분위기만 남을 뿐이었던 '승부', 조개껍질에 잠식할 거라는 유언을 남긴 '장인 뮈사르의 유언' 모두 공통적으로 어떤 틀, 혹은 권력에 사로잡힌 것들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까딱하다가는 그렇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며.

그리고 그것은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라는 산문에서 조금 더 쉽게 풀어쓰고 있다. 이 글에서 화자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는 이제껏 읽었던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헌데 실제로 그건 나도 그렇다. 문학의 건망증이랄까,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내용이 상세히 남아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는 글 속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떄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떄문에 그것을 꺠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책을 마치는 단 그 한 줄의 글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쥐스킨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정말 이 말이 아니었을까.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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