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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ㅣ 청목정선세계문학 24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청목(청목사) / 1989년 9월
평점 :
절판
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자기의 고향이 있다는 것, 언제든 푸근히 반겨맞아줄 어머니가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멀리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어린 날의 기억이 아련히 햇빛처럼 부서지는 상상은 그 얼마나 안정적인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전쟁으로 인해, 그리고 사상으로 인해 삶이 엉망이 되어버린 한 우울한 영혼의 파리체류기이다. 그의 이름은 라비크. 직업은 외과의사. 하지만 여권이나 신분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능력이 조금 안되는 의사 대신 수술을 해주고 그 대가로 생을 연명해 나간다. 뒤를 봐줄 고위층 인사를 알고 있는 여자의 호텔에서 묵으며 경찰에게 붙들릴 일만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파리에서 거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라비크는 우연히 만난 조앙 마두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록 도망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하지만 사랑이 아니면 이 세상에 살아있을 이유가 그 무엇이랴)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늘 불법체류자로 쫓겨날 위험이 있던 라비크는 추방되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조앙 마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고 만다.
한편 다시 파리로 넘어온 라비크는 그때서야 자신의 처지와 본분을 다시 절감한다. 다시 돌아오려는 조앙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자신을 외롭게 지켜나간다. 그러던 중, 고국에서 자신을 고문하던 하아케를 발견하게 되고, 끝내 그를 죽이게 된다.
함께 살던 연극배우에게 권총을 맞은 조앙은 결국 라비크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고,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어 라비크를 비롯한 수많은 불법거주자들은 집단 수용소로 가는 트럭에 오른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이다.
전쟁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이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간혹 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버리면 버릴수록 가벼워진다는 사소한 진리를 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만은 버릴 수가 없다.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삶의 존재 이유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 속 어딘가에서 가장 큰 울림으로 요동치고 있을 그런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근원임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상하군요...... 사랑할 때에 죽어야 하다니.......'
죽어가는 조앙 마두가 남긴 이 말이 오래도록 가슴을 치는 건, 그들이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