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인기없는 에세이_버트런드 러셀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믿고 행동한다.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여러 욕구가 강한 동물로서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우월감,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소유욕 등 다른 동물들에 비해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그리고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는 도구로서도 사용되어 왔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 `인기없는 에세이`라는 책을 통해 역사적으로 뱀의 혀로 사람들을 현혹시켜온 인물들에 대해서 과감하게 꼬집고자 한다.

`그들은 책략을 부려 우생학적 목적을 위한 제비뽑기를 조작하고, 교활한 거짓말로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사이에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국민들을 설득한다. (...) 플라톤에 따르면 이러한 국가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덕이란 전체에 존재하는 것이지 부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는 선이니 불변성이니 하는 번지르르한 문구에 홀린 나머지 철인이 지배자가 되어야 하고 이 지배자의 목표는 천상계가 그러하듯이 지상에서도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학설에 동의하고 만다.`

지식 없는 확실성, 특히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생각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들로 인해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비판당하거나 누군가 맞지 않다 이야기하면 동조할 수 없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이 확실하고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는데도 말이다. 확실성은 무서운 해악이다. 종교의 믿음을 기반으로 많은 인류를 해친 교조주의가 그러했고, 거짓 사상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정부들이 그러했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말한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지식이 없으면 그 철학은 예외 없이 어리석은 철학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인류는 서로 대립하는 광신도 집단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신들의 허튼소리를 신성한 진리로 굳게 믿는 반면 다른 집단의 진리는 가증스러운 이단으로 여기게 된다. (...) 그때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처럼 대립하는 쌍방 모두에에게 자기편이 옳다고 자부할 근거가 충분치 않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교조주의는 평화의 적이자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철벽이다. 앞선 시대와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교주의는 인류의 행복 앞에 놓인 가장 커다란 정신적 장애물이다. (...)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지만 한편으로 지적 해악이기도 하다. 확실성을 요구하는데 이 때 그 요구를 받는 대상은 모두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천명하는 사람이다. (...) 터럭만큼이라도 철학이 있었더라면 이런 식의 피에 굶주린 허튼소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미덕이든 그것을 배우려면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판단을 유보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철학이 가장 훌륭한 훈련이다.`

그래서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철학은 옳은 지식을 바탕으로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준다 말한다. 그리고 사람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지평을 제공한다. 사람은 철학을 통해 자신이 사회와 맺는 관계, 현재를 사는 사람이 과거에 살았던 사람, 또 미래에 살 사람과 맺는 관계, 인류 전체의 역사가 광대한 우주와 맺는 관계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사고의 대상을 넓힘으로써 철학은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해독제를 제공한다.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핵으로 인해 인류가 위협받고 있다. 핵전쟁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영화, 책 심지어 현실에서도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위험성을 알려주고 있다. 핵이 아니면 기아와 질병으로도 인류가 멸망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인간은 많은 전쟁, 질병의 위협속에서도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발견과 발명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못한 채로 큰 전쟁이 계쏙해서 재발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상하는 파괴력은 인류를 절멸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앞서 말한 원시적 사회 체제로 돌려놓을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의 이런저런 고난과 일어날 법한 비극 너머에는 무한한 선과 일찍이 인간의 운명에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거대한 행복의 가능성이 놓여있다. 만약 서유럽 민주주의가 굳건하고(지금은 북유럽이지만) 기민하게 나아간다면 그 가능성을 실현될 수 있다.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면 과학 기술은 마침내 인간의 행복을 키우는 일에 사용될 수 있다. 전쟁이 인간의 사상과 에너지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세대 안에 세계 곳곳의 심각한 빈곤의 문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버드런트 러셀은 이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전 세계를 통제하는 단일 군대를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말한다. 즉, 법의 지배를 받는 사회적 조직을 키워야 한다. 무력은 한 개인이나 국가의 특권이 아니라 미리 정한 규칙에 따라 수립된 중립적 권력이 행하는 힘이어야 한다 말한다.

인간들의 바보짓은 영원히 계속되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끊임없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종교적인 부분, 신앙에 대한 인간의 지적 쓰레기라 부르는 성직자들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성직자들은 신앙의 힘이라 말하며 사람들을 현혹해왔다. 신앙의 힘은 역사적으로 대단했다. 특히, 하느님이라는 이름 하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같은 학설들이 종교와 도덕의 벽을 허물지 못했고, 심지어 점성술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하느님의 계획이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다고 생각하며 특별한 섭리가 선한 자를 돌볼 뿐 아니라 악한 자를 벌한다고 믿는다.

`하느님 보시기에`라는 말을 보자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보신다고 가정하지만,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사람들이 지닌 신념에는 다양한 근거가 있다. 하나는 자기 신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는 문제로 옮겨가는 순간, 신념의 근거는 지키기가 힘들어진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을 믿는다. 즉, 이성을 포기하고 편하게 권위에 기대는 순간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우월한 인종이라는 개념 전체는 그저 권력을 쥔 집단의 자존심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만들어진 미신일 뿐이다. 유럽 이곳저곳의 다양한 인구 집단에 인종 이론을 적용하는 짓은 특히 불합리하다.

인간을 과학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 또 정부가 대중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우리가 처한 불행의 근원 가운데 하나이다. 교육은 애당초 모든 사람에게 읽고 쓰는 힘을 길러 줄 목적으로 널리 시행되었으나 실은 사뭇 다른 목적을 수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허무맹랑한 사상을 서서히 주입함으로써 국민들을 통합하고 집단 열광을 자아냈던 것이다.만약 언젠가 세상에 평화가 깃들게 하려면 각국 정부는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독단적인 사상을 주입하지 않기로 합의하거나, 아예 모두 똑같은 사상을 주입하기로 합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위대한 스승이 되기 위한 지침서이다.

오늘날의 교사들은 스스로 생각한 것을 가르치는 대산에 자신의 고용주가 유용하다고 여기는 신념과 편견을 주입하는 일이야말로 교사의 소임이라고 선명하게 의식하는 듯하다. 진정한 스승이 되고자 하는 충동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육신보다 자기 책을 통해 살아남으려는 열망이 더 강할 것이다. 교사가 자신의 소임을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지적 독립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이 보통은 국가를 통해, 때로는 교회를 통해 만인에게 제공된다. 저마다 광적인 민주주의를 아동 교육에서 가장 강조해야 할 것으로 삼았고, 그 결과 자국의 국민들이 다른 나라 국민들과 어떠한 공통의 토대로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통의 문명이라는 개념을 통해 호전적인 잔혹 행위를 막는 데에도 철저히 실패했다.

이러한 위험을 막는 유일한 길은 사상의 자유를 믿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교사들을 지적 구속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뿐이다. 정부는 교육을 통해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 특정한 신념을 주입하고 권력자들 입장에서 편하거나 불편한 사고 습관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론을 통일하고 자유를 억눌러야 국가가 강해진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파 간 투쟁으로부터 비켜서서 아이들에게 공평무사한 탐구 습관을 길러주고자 힘쓰는 것, 아이들로 하여금 여러 현안을 스스로 판단하도록 이끄는 것, 또 일방적인 성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 주는 것 등을 교사의 업무로 삼아야 한다.

교사들은 다른 어떤 계층보다 훌륭한 문명의 수호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문명이란 무엇인지를 상세히 알아야 하며 학생들에게 문명화된 태도를 심어 주고자 열망해야 한다. 교사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 앞에 넓은 지평을 펼쳐 주고 거기서 즐거울 뿐 아니라 유용하기도 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유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처왔다. 자유라는 단어는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이상한 의미를 지녔다.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의 로마에서 자유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원로원 의원이 자기 배를 불리려고 속주를 약탈할 때 휘두르는 권력을 뜻했다. 오늘날 `자유`라는 말은 산업계의 거물들을 묘사할 때 이와 비슷한 용도로 쓰이곤 한다. 하나는 어떤 나라가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얻는 자유이고, 또 하나는 시민이 자신의 적법한 직업을 마음껏 추구하는 자유이다. 나는 민주적 대의제 정부야말로 그것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관용과 자제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최선의 형태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인류는 두 관념에 빚을 지고 있따. 법률과 정부이다. 이 둘 중에서는 정부가 더 근본적이다. 정부는 법률이 없어도 수월하게 존재할 수 있지만 법률은 정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정부는 `공동체가 지닌 힘을 총체적으로 집중시킨 특정 조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렇게 힘을 집중한 덕분에 시민 개개인을 통ㅈ제하고 외국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정부와 자유를 융화시킬 도구로서 고안되었다. 모든 시대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어느 집단이든 일단 다른 집단 위에 군림할 권력을 위임받는 자들은 무사히 넘어갈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힘을 남용하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권력행사 기간에 제한을 두고 대중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의도이다. 사회 진화의 역사를 보면 거의 예외없이 먼저 어떤 형태의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뒤이어 정부와 개인의 자유를 타협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금이나마 바람직하다고 여길 만한 종류의 질서 정연한 사회생활은 느리게 발전해 온 여러 관념과 제도, 즉 정부와 법률,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등이 서로 융합하고 균형을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

이 외에도 버트런드 러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말은 너무 많다. 정리하면서도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뒤죽박죽 내용인 듯 싶지만 모든 말들이 머리 그리고 가슴이 속속 박힌다. 심지어 전체 필독을 하고 싶을 정도로 모든 말들을 내 가슴에 담고 싶다. 필독까지는 못하더라도 재독은 꼭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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