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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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_플라톤


철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라고 말할 것이다. '네 자신을 알라' 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소크라테스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설명해보라 말하면 대다수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나 역시 똑같으니...

그래서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최근 가장 눈에 띄었던(작은 아버지 집 화장실에서도 보았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을 읽어보았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기 직전의 장면들, 회상들, 대화내용들로 구성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책 한권도 쓰지 않았다는 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이 책 역시 죽은 후 제자였던 플라톤이 쓴 책으로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모두가 처형을 만류하고 심지어 도망치라고 도와주겠다며 권유하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책에 크리톤 편에서 자세히 나와있다.


첫 장의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기 전 군중들에게 자신이 고발당한 데에 있어 무고함을 떳떳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오래된 고발자들에 대한 변명/멜레토스의 고발에 대한 변명/그리고 자신의 생각들에 대한 신념으로 나뉜다. 오래된 고발자들에 대한 고발 당한 내용을 보자면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며 괴상하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이것이 고발의 내용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무녀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을 반증하기 위해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정치가, 시인, 비극시인, 장인 모두 찾아가 봤지만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이유는 조금 황당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모르면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현명해 보일 뿐 사실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미움을 샀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대신해서 나는 그들과 같은 지식도 그들과 같은 무지도 갖기 않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가, 또는 그들처럼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은가 하고 자문해보았다. 결국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현재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결론지었다.


신은 신탁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는 보잘것 없거나 전혀 가지 없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오 인간들이여, 소크라테스처럼 그의 지혜가 사실은 아무 가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현명하다'라고.....


소크라테스는 변명 후에 계속 이야기한다.


'내게 생명과 힘이 있는 동안에는 지혜를 애구하고 지혜를 가르치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평소 태도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하는 일은 노인이든 청년이든 가리지 않고 여러분의 육신이나 재산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영혼의 최대의 향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돈에서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덕에서 돈과 다른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하며, 개인적 이익을 구하기에 앞서 덕과 지혜를 추구해야 하고,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기에 앞서 국가 자체를 돌봐야 하며, 또한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서 지켜야 할 순서라고 여러분 각자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시대에 위대한 점은 보편성의 발견이라고 한다. 보편성의 힘이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는 점인데 소크라테스는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해야할 일들, 법을 지키는 일이나 덕과 지혜를 추구하고 육신보다는 정신을 강조하는 등의 행동들을 해야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자신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생각해보면 지금 현대사회에서 이런 올바른 행동들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파이돈 편에서는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처형까지 불과 2,3일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갓난아이가 뜨거운 후라이팬을 만지듯 호기심에 벅차오른 것처럼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그는 말한다. '철학 정신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지만 자살은 안된다고 말한다. 이유가 궁금했다.


'신들은 우리의 수호자이며, 우리 인간은 신들의 소유물로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물이 마음대로 자살하는 것을 싫어하듯 신들도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을 분명히 싫어할 것이다. 사람은 마땅히 기다려야 하고, 신이 지금 나를 부르는 것처럼 신이 부를 때까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데는 까닭이 있다고 할 수 있네."


언뜻 보면 이상한 논리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자살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누구든지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논리이다.자신의 의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음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인가 보다.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기다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안락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다음은 철학자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감정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들을 시작한다.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으며, 또한 죽은 다음에는 저세상에서 최대의 선을 얻는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네.'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영혼이 독립해 있어서 육체에서 해방되고 육체가 영혼에서 해방될 때, 이것이 죽음이 아닌가?'


'철학자들은 전적으로 영혼에만 관심을 갖고 육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영혼을 육체와의 분리하는 온갖 방법을 다 쓴다는 것이겠지?


'정신이 육신에서 떠나서 가능한 한 육신과 관계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정신이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을 갖지 않고 오직 참된 존재만을 갈망할 때, 사유는 최상의 것이 되겠지?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자는 육체를 결명하고 그의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홀로 독립하기를 바라는건 아닐까?


'그리고 사유 작용에 있어서 정신만으로 위에서 말한 것에 접근하고 이성과 함께 시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을 끌어들이거나 침입시키지 않고, 바로 명석한 정신의 빛으로 각가의 진리 자체를 ㅇ탐구하는 사람이 정의 자체, 미 자체 등에 관한 가장 순수한 진리를 획드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눈이나 귀나 다른 모든 신체가 영혼을 더럽힐 때는 진리와 지식의 획득을 방해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의견으로, 가능한 한 눈이나 귀나 기타의 신체와 관계를 끊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존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것이 아닌가?


오로지 정신적인 것만으로 정의, 미 등 순수한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참된 존재로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육체로 인한 획득은 인정 못하겠다는 말인것 같다.


'진정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육체와 더불어 있는 동안, 그리고 영혼이 육체의 악에 감염되는 동안은 우리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우리와 우리의 논리를 이끌어가는 사유의 길을 우리는 찾아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욕구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양식을 요구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끝없는 번거로움이 생기고 게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우리의 참된 존재에 대한 추구를 압도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육체는 우리의 마음속을 애욕과 욕망과 공포와 모든 종류의 환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사실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유의 힘을 전적으로 빼앗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불화나 분쟁은 왜 일어나는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이 바로 그 원인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지려면 육체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경험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일이다. 영혼 자체만이 사물 자체를 볼 수 있다. 이 때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아니 아니라 죽은 다음에야 도달하게 될 것이다. 곧, 지식은 전혀 획득되지 않거나 획득된다 하더라도 죽은 다음의 일이다.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영혼은 육체를 떠나 홀로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깨끗이 지킬 때 우리는 지식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육체의 어리석음에서 풀려날 때 우리는 순수하게 될 것이며, 순수한 거소가 사귈 것이며, 스스로 도처에서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빛은 바로 진리의 빛이다.'라고 말할거야'


죽은 다음에야 지식을 획득할 수 있고 진리를 알 수 있다니.... 그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것은 육체라는 감옥에 갖혀 지식 획득을 하지 않는 상태로서 영혼이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상태란 말인가...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반갑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믿을 만한 대화인지 심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에서 벗어나 자기 잣니으로 응집하고 결합하며,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가능한 한 영혼이 자기 자신의 자리에 홀로 머물러 있는 습관,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육체의 쇠사슬에 풀려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영혼과 육체의 이러한 분리 혹은 해방을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따라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슬퍼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돈이나 권력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충분한 증거야.'


용기란 공포,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용감한 것이다. 용기란 것도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절제는 방종하기 때문에 절제를 요구한다. 쾌락이 있기 때문에 절제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쾌락으로부터 이 쾌락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망설임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있을 곳이 없어지고, 따라서 죽은 그날로 사멸하고 종말을 고하며,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지마자 연기나 공기처럼 뿔뿔이 흩어져 날아가다가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닌가해서 두려워합니다.'


'잠자는 거은 깨어있다는 것의 반대다. 즉, 모든 반대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동일한 고체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 약한 것은 더 강한 것에서 생기고, 더 빠른 것은 더 느긴 것에서 생길테고, 또 더 나쁜 것은 더 좋은 것에서, 더 옳은 것은 더 옳지 않은 것에서 생기고....이렇듯, 생성과정은 하나는 잠드는 것이며, 또 나하는 깨어나는 것이지. 따라서,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간에 살아있는 것은 죽은것에서 생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살아있는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죽은것에서 생긴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새로운 길이 있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은 자의 영혼은 어떤 곳에 있다가 거기서 되살아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네'


말장난 하는 것 같지만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지만 부활이라 부를 수 있듯이 탄생이란 것도 죽음이 존재해야지만 탄생이 되는 거라 말할 수 있다. 꽃이나 식물 역시 죽어야지 그 자리에서 새로운 꽃이나 농사물이 태어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영혼은 육체에서 떨어져 분리되었지만 살아있는 상태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태어나면서 길러지는 지식, 학습능력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얻은 지식을 태어날 때에 상실하고, 그 후에는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알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면,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지식을 회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을 상기라고 불러도 잘못은 아니겠지? 즉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일생 동안 계속해서 알고 있거나, 또는 태어난 다음에는 학습을 하는 사람들만이 기억하며 따라서 학습은 상기에 지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세'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는 논증과 우리가 앞서 인정한 바 있는 또 하나의 논증, 즉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은 것에서 태어난다는 논증을 합쳐본다면 알수있다. 만일 영혼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며, 생명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에는 오직 죽음과 죽은 자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다면, 영혼이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은 죽은 다음에도 계속 존재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육체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반성할 때, 영혼은 다른 세계, 즉 순수하고 영원하며, 불멸하고 불변하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그릇도니 길에서 벗어나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과 사귐으로써 영혼은 불변의 것이 되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영혼은 신적인 것에 매우 흡사하고 불멸하며 예지적인 것이고, 단일한 형태를 갖고 분해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고, 한편 육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사멸해야 하고, 예지적인 것이 아니며, 많은 형태를 가졌고, 밴해되며 변화하는 것이다.'


영혼의 행복이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거야.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절제와 정의라고 불리며, 철학이나 이성 없이도 습관으로 획득되는 국민의 사회적 덕을 실천해온 사람들이야. 그들은 꿀벌이나 장수말벌이나 개미처럼 그들 자신과 비슷한 온화하고 사회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형태를 갖고 태어날 수 있으며, 올바르고 절제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철학자에게 영혼이란?


'철학은 영혼이 영혼 스스로를 가두어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보고 영혼을 받아들여 점잖게 달래고, 눈과 귀와 다른 감각은 기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해줌으로써 또한 이러한 감각들에서 물러나고 꼭 필요한 경우 말고는 이러한 감각의 사용을 삼가며, 영혼을 집중시키고 가다듬도록 설득함으로써, 영혼 자신과 순수한 존재에 대한 영혼 자신의 순수한 파악만을 신뢰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서 영혼에 이르고 수시로 변화하게 마련인 것은 무엇인지 믿지 말도록 권함으로써 영혼을 해방하려고 노력하게 되네.'


'철학자의 영혼은 격정을 가라안짛고 이성에 따르며 의견의 대상이 아닌 참되고 신적인 거시을 바라보고 여기서 영양을 취하면서 영혼의 관조안에서만 살거야. 따라서 이 영혼은 주어진 시간을 다 살려고 노력하고 죽은 다음에는 자기와 동질적인 것, 즉 자기와 비슷한 것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간의 악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게 되네. 이렇게 양육되고 이러한 추구를 해온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바람에 날려 흩어져버려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게'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지만 내 능력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쯤에서 끝내고자 한다. 정리를 하려고 해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통한 설득은 정리하기 쉽지 않은 퍼즐과 같다. 무엇이라도 하나가 빠지면 완성이 될 수 없다는 듯이... 아무튼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영혼이란 것은 죽어서도 존재할 수 있으며 다시 태어나며, 죽어서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한다. 이 이상의 무엇을 얻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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