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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7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파우스트를 읽는 동안 괴로웠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과 심오하고 복잡했으며 그로인해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읽다 포기하고 덮어버리기를 여러번 했습니다. 결국 1부만 읽고 덮어버렸네요. 괴테가 오랜기간 이 책을 썼듯이 저도 오랜기간 이 책을 읽을 생각입니다.(핑계죠... ㅋ) 아무튼 독일 문학 중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독일 인간 정신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지듯이 정말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나의 사적인 독서'에서 작가가 파우스트를 짧막하게나마 해설서같이 책 줄거리와 느낌을 소개해주어서 자신있게 직접 책을 사서 읽어봤습니다만 이렇게 심오한 책을 읽기에는 제가 아직 많이 어린것 같습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중년을 위한 작품입니다.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은 나이가 중년이라면요. 이대로 늘기엔 뭔가 억울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싶은 나이가 '파우스트'를 일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 그럼 파우스트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간형이 무엇인가요? '파우스트적 인간'은 어떤 인간을 말하는 건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가 무한한 욕망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욕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몰라야 하죠. 인간에게 무한한 욕망이라고 하면 지식욕, 성욕, 권력욕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욕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파우스트는 이 세가지 욕망에서 모두 끝까지 가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도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한한 욕망이란 결코 달성될 수 없고 그 끝은 부질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에서 파우스트는 구원받습니다. 인간이 방황하더라도 노력하려고 앴는 한 구원받는다는 것이 괴테가 남긴 메시지인데, '타협하지 않는 것, 끝가지 가보는것' 혹은 '갈 데까지 가보는것'이것이 파우스트의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우스트의 모험과 편력, 욕망의 끝은 보여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지는데 '방황해도 노력하는 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입니다.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는데 행복한가?라며 그레트헨과의 관계를 더올려줍니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보고 몸이 달아서 메피스토펠레스를 닦달하기도 하며 결국 욕망을 채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문제입니다.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걸 갖게 된 그 수간에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라는 건 만족감이 다 채우지 못한 빈틈 같은 겁니다. 그 틈새를 생각이 지비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점점 커지고 권태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게 파우스트의 병입니다. 푸슈킨은 문학작품을 통해 학습한 '권태'를 파우스트라는 희곡을 통해 보여줍니다. 만약 이런 '생각의 과잉', '의식의 과잉'에 의한 권태가 근대적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파우스트는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역시 그렇습니다. '무한한 욕망'이라는 것도 우울증이나 권태처럼 학습된 것, 즉 발명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이란 학습되고 부추겨지는 것입니다.
파우스트는 인식을 위해서 삶을 희생합니다. 삶을 산게 아니라 삶을 투자해서 인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파우스트가 기대하는 것은 신적인 앎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힘을 깨닫고자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그렇듯 파우스트는 이 세계를 관장하는 진리와 법칙을 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유한성에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던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에 따라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 조건은 지상의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되면 영혼을 내주겠다는 조건입니다. 자신이 지극히 만족하는 한순간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면 그때는 인생이 바로 끝나버려도 좋다는게 파우스트의 생각입니다. 파우스트는 어째서 그토록 만족을 원할까요? 그만큼 쌓인게 많아서입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부족해도 참아라! 부족해도 참아라! 이것이 영원한 노래다. 하지만 나는 더 참지 못하겠다" 이게 파우스트의 불만입니다. 아무튼 파우스트는 이제까지 앎을 위해 욕망을 억제해왔지만 '인생의 황금나무'는 다 지나가버렸고, 허망함을 참지 못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됩니다. 이제껏 세상은 인식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는 세상을 경험해보려고 합니다.
파우스트의 형상이 '영원히 남성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여성적인 것'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 작품의 여성들, 즉 그레트헨과 헬란, 말미에 등장하는 성모마리아에게서 찾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일단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고 또 헌신적이면서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레트헨은 신앙심이 깊습니다. '한계에 순응하고 적당히 멈출 줄 아는 태도'가 영원히 여성적인 말이라는 것 같습니다. '갈 데까지 가보려는 태도'와는 반대로 말이죠.
마지막 파우스트는 아직 해봐야할 게 남았습니다. 권력이죠. 그의 욕망의 마지막은 '지배자 비극'입니다. 파우스트의 무모한 욕망은 인간들만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연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범한 백성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노동력을 쥐어짜게 됩니다. 과연 그가 이루려는 유토피아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방황한다고 해도, 선의에 의한 것이라면 용서된다는 게 이 작품의 전제였죠. 이게 바로 그의 선의입니다. 대규모 간척 사업을 통해서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던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공동체, 국가를 이우려고 했죠. 하지만 이 선의를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과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은 감수되어야만 하는가? 때론 개인적 욕망을 감추기 위해 "더 나은 미래'라는 구실을 만든 것은 아닐까요? 전쟁, 공사, 철거 등 이런 것들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십니다. 버려진 땅을 모든 사람을 위한 낙원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지만, 파우스트의 방식은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습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이 '개발지상주의자'파우스트는 근대의 기획자이자 근대성의 화신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 파우스트는 결국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방황과 편력이 영혼에 대한 구원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괴테가 사적인 자리에서도 밝힌 적이 있는데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게 된 열쇠가 뭐냐'라고 묻자, '언제나 갈망하면서 애쓰는 것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방황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하더라도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청춘의 한 시절을 대가로 지불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 희생시킨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파우스트는 '수천의 '손드을 조정하고 희생시켰습니다. 지배자 비극은 퍽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개발독재를 비판하는 여러 작품들의 원 모델이 되어주는게 이 지배자 비극입니다.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동일에서는 영우적 지도자의 모델이 됩니다. 나치는 많은 작품을 금서로 지정했는데 파우스트는 유독 열광적으로 수용합니다.
파우스트 전설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많은 작가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바로 모든 권위와 인습을 부정하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서 무한히 노력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합니다. 괴테는 이처럼 주어진 한계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이간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나타내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결국 인간은 비록 방황하더라도 끝까지 노력하는 한 앞을 향해 나간다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세계관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파우스트는 뭔가를 이루고 욕망을 충적해서 행복해진 것이 아니라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맛봅니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현실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예감에 만족합니다. 과연 파우스트는 구원받아도 되는 인물이었을까요? 파우스트적 욕망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무한한 욕망이 사회의 동력으로 간주되는 이 '가차 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욕망의 끝은 재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