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시간은 다 어디로 가는 건지- 

17일은 <만추>가 개봉한 날이고, 난 그날 조조로 이 영화를 봤다. '만추'가 좋아서 그랬다.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인가 이 영화에서 만추란 실로 만추였다. 그후 난 만추가 좋다. 우울하고 그윽하며 어디선가 사랑이 시작되고야 말 듯한 느낌이 '만추'에선 느껴진다. 

노랗고, 빨간 단풍은 없었으나 우울하고 그윽하며 어디선가 사랑이 시작될 것 같기는 마찬가지인 뿌연 안개 속의 <만추>는 좋았다. 저녁 노을 빛이 가득한 마지막 장면은 기다림의 끝이 만남이 아닐 것을 예고함에도 따뜻했고, 그 빛이 영락없이 날이 저무는 빛이기에 '만추'와 딱 들어맞는다. 웃으면서도 크게 웃을 수 없고, 슬프다 해도 울 수 없는 그 애매함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영화 <만추>는 소란하고 강한 것에 길들어 버린 우리를 천천히 조용히 여과시키기까지 하는 듯  

<만추> 어때요?  

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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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명탐정에 확 끌린 이유? 흥행 1위라고 해서다. 배우 김명민을 좋아해서 본 건 아니다. 김명민의 전작 영화들을 나는 보지 않았으니까.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완전히 반한 배우이지만 그렇다고 배우 찾아 영화를 볼 열성이 내겐 없다. 하지만 영화 내내 왠지 의로울 듯한 그 배우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행복하더라 후훗. 

이 영화에 대해 말하라면 - 아 어설픔  

뭔가 잘 짜여지지 않은 듯한 느낌. 오달수가 한객주라니 반전 치고는 맹랑하다. 암시래야 임판서의 "객주 놈" 이라는 대사 정도 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암시로는 뒷 골이 찌릿 해 지는 반전의 묘미를 즐기기가 어렵다.  

천주학과의 연관. 왜 천주학을 끌어들이고 싶었을까? 정조의 시대여서? 개인적으로 나야 기독교 신자니까 천주학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아름다운 정신으로 표현된 것에 무한 감사하지만 꼭 그 설정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또 김명민의 '저도 하지 못하던 일을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먼저 하셨군요.'라던 그 진지함은 천주학을 믿는 성도의 생각이었던데 반해  영화 뒷 부분에서 그저 그냥 세례를 받았다는 식으로 처리 되는 것은 잘 맞아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임판서가 아씨를 죽이려 한 것은 그녀가 천주학을 믿어서가 아니라 돈세탁의 열쇠를 갖고 있어서 이기 때문이다.  

그저 재밌게는 봤으나 뭔가 엉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영화로부터 가르침을 입어야 한다면 '욕심부리지 마','더불어 잘 살아야 진짜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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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맞이 대목을 염두해 둔 탓인지 이른바 거물 감독들의 영화가 개봉했고, 대중 영화만을 볼 수밖에 없는 나는 '평양성'을 봤다. '황산벌'을 참 재미나게 본 기억이 있기에 이 영화는 애초에 볼 계획이었다. '황산벌'이 준 감동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계백의 가족들이 장열하게 죽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반짝. 또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백성들은 오직 개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번쩍.  

설 명정을 맞아 가족들과 우루루 영화관에 갔다. 총 14명이 함께 갔고, 이번에는 불광 CGV가 아니라 춘천CGV에서 봤다. 남편과 기타 아주버님들은 영화관을 여관쯤으로 착각하신 듯, 아주 푹 주무셨다. 아이들은 제법 본 듯하지만 영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약간 지루함을 느끼긴 했어도 워낙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세뇌된 내 뇌는 당나라를 엿멕이는 듯한 설정에 내심 속 시원했다. 그럼에도영화가 내게 가르친 것은 어느 전쟁이든 백성들은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황산벌'의 번쩍임이 그대로 있다. 첫 장면에서 백성들을 왕 앞을 줄줄지나가는 작은 물체 정도로 표현한 것이 이 영화 전체를 암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왕은 작은 인형들을 바라보 듯이 줄줄, 졸졸 전쟁터로 백성들을 몰아가지만 백성들에겐 그 삶이 전부인 것을. 쯧쯔 그리하여 우리는 신라도 고구려도 백제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어느 산골 깊은 곳에 가서 살아야 주체로서의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루함 나 역시 살짝 졸기는 했으나 이것 저것 따지고 보면 인생의 진정성을 생각하게 한다는 미덕을 갖춘 영화다. 기발한 전술 역시 킥킥 웃음을 준다. 벌을 이용한 전쟁 진짜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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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온가족의 나들이  

장소는 불광 CGV 

목적은 영화보러  

어떤 영화? 글러브 

관전평? 아들이 소변마렵다고 하자 손주면 죽는 일도 마다 않하실 듯한 우리 엄마 난 모른다로 표정바꾸시고 남편은 같은 남자면서 음료수통 주면서 거기다 누이라고 한다. 그래도 매너 있는 우리 아들 그 제안을 깔끔히 거절하고 영화보다 중간에 들낙거리는 거 매너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가 화장실 데리고 갔다왔을 정도로 재밌었나 보다. 드라마라면 내가 굳이 무엇을 탓하랴. 전혀 그럴 이유가 없지. 한달에 TV수신료 2500원만 내고 온 가족이 보는 가족 드라마라면 뭐 재밌네. 잘 봤네 했겠지만 그 영화 참 감동을 주려고 애를 썼다는데 허각과 존박이 부른 노래만 감동적이었다. 주말에 9000원 주고 보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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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확 밝은 지도 오래다. 눈도 많이 오고, 춥기도 많이 추운 새해다. 다음주면 설이니 새해라는 말도 무색하다. 무성할 것도 없는 계획들마저 어느새 되는 대로 넘겨 버리고 그날그날의 일들을 간신히 채워나간다. 그게 다다.  

타샤의 책을 읽으면서 늙음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세대는 늙음을 준비할 시간의 혜택을 받았다. 노령화 사회가 무엇인지 학습하기에 그렇다. 우리 앞세대들이야 "오래사세요."가 복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니 노후를 준비한다는 게 얼마나 가당치 않은 욕심이었을까? 그에 비해 우리 세대는 노후가 막연하지만은 않아서 고맙다. 두렵긴 해도 막연하기까지야.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완서님을 내심 부러워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좋을 때, 좋을 때 가시지 않았는가. 좀 춥긴 했어도 눈 내리는 날이었고, 그 전날들에 비하면 포근한 봄날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본인의 질병이 드러나고 얼마 안 되어 가신 것. 또 그 보다 좋은 것은 그 얼마 전까지 본인의 업인 글쓰기를 하셨다는 것. 그렇기에 그 분은 부러운 죽음의 주인공이다.  

내게도 늙음이 허락된다면, 신께서 내게 늙음을 허락하신다면 기쁘고 즐겁게 맞이하고 싶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내 늙음의 대부분을 겸손으로 채울 수 있게 하신다면 늙음의 나날을 오직 감사로 채우고 싶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언제부터 늙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흰머리가 검은 머리와 얼마쯤의 비율을 차지하게 되면 늙음을 자인하고 살 수 있을까? 내가 늙음을 소유하게 되는 날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까? 

나는 한가하고 싶다. 해야할 일이 하나도 없는 아침을 맞이해 보고도 싶고, 내 계획 외에는 누구의 돌발적인 요구도 없는 날을 살고 싶기도 하다. 쓸쓸하려나. 그리고 또 눈이 나빠지더라도 하루에 몇 시간을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고, 치매는 안 걸렸으면 좋겠다. 정말 그것만은 안 걸리고 싶다. 가족사가 없으니 위로를 챙겨둔다. 그리고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쓸모있는 노인이면 좋겠다. 책을 골라주든 읽어주든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에게든 가끔 찾아가 묻고 싶은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그리고 삶에 연연하지도 죽음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순리를 배우는 노인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타샤처럼 3만평의 땅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두 세평 짜투리 땅이라도 있어서 그 흔한 상추라도 길러 먹으면 재미날 듯하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하시고 이승에서도 상을 좀 주시겠다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신다면 진정으로 평화로운 늙음을 주십사 말할 것이다. 물론 전망이 좋지는 않다. 내 개인사는 놔두고라도 지구의 상태부터 심상치 않고 사람들 돌아가는 모습도 영 미덥지 않다. 그러나 어쩌랴 내게 늙음이 허락된다면 난 어떤 모양으로든 살지 않겠는가. 새해를 시작하는 1월에 이런 생각에 잡힌 것은 그 놈의 책들 탓이다. 역시 책이란 재미있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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