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맞이 대목을 염두해 둔 탓인지 이른바 거물 감독들의 영화가 개봉했고, 대중 영화만을 볼 수밖에 없는 나는 '평양성'을 봤다. '황산벌'을 참 재미나게 본 기억이 있기에 이 영화는 애초에 볼 계획이었다. '황산벌'이 준 감동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계백의 가족들이 장열하게 죽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반짝. 또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백성들은 오직 개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번쩍.
설 명정을 맞아 가족들과 우루루 영화관에 갔다. 총 14명이 함께 갔고, 이번에는 불광 CGV가 아니라 춘천CGV에서 봤다. 남편과 기타 아주버님들은 영화관을 여관쯤으로 착각하신 듯, 아주 푹 주무셨다. 아이들은 제법 본 듯하지만 영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약간 지루함을 느끼긴 했어도 워낙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세뇌된 내 뇌는 당나라를 엿멕이는 듯한 설정에 내심 속 시원했다. 그럼에도영화가 내게 가르친 것은 어느 전쟁이든 백성들은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황산벌'의 번쩍임이 그대로 있다. 첫 장면에서 백성들을 왕 앞을 줄줄지나가는 작은 물체 정도로 표현한 것이 이 영화 전체를 암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왕은 작은 인형들을 바라보 듯이 줄줄, 졸졸 전쟁터로 백성들을 몰아가지만 백성들에겐 그 삶이 전부인 것을. 쯧쯔 그리하여 우리는 신라도 고구려도 백제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어느 산골 깊은 곳에 가서 살아야 주체로서의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루함 나 역시 살짝 졸기는 했으나 이것 저것 따지고 보면 인생의 진정성을 생각하게 한다는 미덕을 갖춘 영화다. 기발한 전술 역시 킥킥 웃음을 준다. 벌을 이용한 전쟁 진짜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