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확 밝은 지도 오래다. 눈도 많이 오고, 춥기도 많이 추운 새해다. 다음주면 설이니 새해라는 말도 무색하다. 무성할 것도 없는 계획들마저 어느새 되는 대로 넘겨 버리고 그날그날의 일들을 간신히 채워나간다. 그게 다다.  

타샤의 책을 읽으면서 늙음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세대는 늙음을 준비할 시간의 혜택을 받았다. 노령화 사회가 무엇인지 학습하기에 그렇다. 우리 앞세대들이야 "오래사세요."가 복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니 노후를 준비한다는 게 얼마나 가당치 않은 욕심이었을까? 그에 비해 우리 세대는 노후가 막연하지만은 않아서 고맙다. 두렵긴 해도 막연하기까지야.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완서님을 내심 부러워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좋을 때, 좋을 때 가시지 않았는가. 좀 춥긴 했어도 눈 내리는 날이었고, 그 전날들에 비하면 포근한 봄날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본인의 질병이 드러나고 얼마 안 되어 가신 것. 또 그 보다 좋은 것은 그 얼마 전까지 본인의 업인 글쓰기를 하셨다는 것. 그렇기에 그 분은 부러운 죽음의 주인공이다.  

내게도 늙음이 허락된다면, 신께서 내게 늙음을 허락하신다면 기쁘고 즐겁게 맞이하고 싶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내 늙음의 대부분을 겸손으로 채울 수 있게 하신다면 늙음의 나날을 오직 감사로 채우고 싶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언제부터 늙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흰머리가 검은 머리와 얼마쯤의 비율을 차지하게 되면 늙음을 자인하고 살 수 있을까? 내가 늙음을 소유하게 되는 날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까? 

나는 한가하고 싶다. 해야할 일이 하나도 없는 아침을 맞이해 보고도 싶고, 내 계획 외에는 누구의 돌발적인 요구도 없는 날을 살고 싶기도 하다. 쓸쓸하려나. 그리고 또 눈이 나빠지더라도 하루에 몇 시간을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고, 치매는 안 걸렸으면 좋겠다. 정말 그것만은 안 걸리고 싶다. 가족사가 없으니 위로를 챙겨둔다. 그리고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쓸모있는 노인이면 좋겠다. 책을 골라주든 읽어주든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에게든 가끔 찾아가 묻고 싶은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그리고 삶에 연연하지도 죽음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순리를 배우는 노인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타샤처럼 3만평의 땅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두 세평 짜투리 땅이라도 있어서 그 흔한 상추라도 길러 먹으면 재미날 듯하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하시고 이승에서도 상을 좀 주시겠다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신다면 진정으로 평화로운 늙음을 주십사 말할 것이다. 물론 전망이 좋지는 않다. 내 개인사는 놔두고라도 지구의 상태부터 심상치 않고 사람들 돌아가는 모습도 영 미덥지 않다. 그러나 어쩌랴 내게 늙음이 허락된다면 난 어떤 모양으로든 살지 않겠는가. 새해를 시작하는 1월에 이런 생각에 잡힌 것은 그 놈의 책들 탓이다. 역시 책이란 재미있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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