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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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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솔직히 조금 걱정을 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는, 내 머릿속에 내재된 프랑스 문학에 대한 선입견들 때문이였다. 프랑스문학은 철학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므로 어렵고 지루해. 그러니까 읽기 어려워. 이게 내 머릿속의 전반적인 프랑스 문학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들이였다. 머릿속의 프랑스문학에 대한 부분들이 저런 꽁깍지들에 쌓인채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저 꽁깍지들을 다 벗겨낸뒤,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프랑스 문학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야심차며 똥꼬발랄한 생각은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급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책의 서문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서문이란 보통 작가가 독자들에게 앞으로 읽게 될 자신의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 것인데, 그 내용이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다니,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겐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칼을 빼들었으면 무라도 잘게 채를 쳐서 그 즙이라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법.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완독하리라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라? 이 책, 꽤 재밌는 것이 아닌가?! 

육식이야기는 총 14개의 단편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서문까지 하나를 더해 총 15개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내가 어렵다고 움찔한 그 서문 말이다. 처음 서문을 읽을 때는 철썩같이 작가의 말이자 주제라고 생각했으나, 서문의 끄트머리에 써 있는 사람의 이름을 읽게되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서문을 쓴 사람의 이름이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이름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글은 단지 이 책의 서문이자 누군자의 추천글이라고만 순진하게 생각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되면서 그 서문이 저자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이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대한 포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고 까다로운 내용을 비비꼬아 놓으며 번역문이라는 변명을 달아 독자들에게 일종이 "뻥"을 쳐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게 되는 사람들이 부디 그 뻥에 속아 이 책을 덮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서문이라는 무거운 대문만 꾹 참고 열어서, 일단 본문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이 책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버릴 될테니까.  

이 책의 작가 베르나르는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나치는 소재들에 주목하고, 그 소재들로 독특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덕분에 이 책에는 평범한 단편들 외에 콩트 형식의 에피소드 모음들과 편지글, 일기, 회고록, 희곡 같은 다양한 묘사방식이 존재하며, 이런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들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또한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묘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은 물론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그 즐거움이 밝은 햇살 아래 행복감의 느낌이 아니라,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짝은 으스스해진 미스테리한 느낌이 강하게 풍겨나왔다. 이런 느낌들은 환상문학과 단편이라는 특성상 자칫 가벼워질수도 있는 이 책의 이야기들에 무게감을 실어 주는 역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줬는데 나는 이런 특유의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과 발상에 감탄하며, 이 책을 시작할 때 했던 걱정일랑 저 멀리 집어던지고 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육식이야기였다. 제목과 표지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듯이 육식성 식물인 파리지옥이 주 소재로 등장한다. 한 나이 지긋한 괴짜 식물학자가 이 육식성 식물에 매료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첫 시작에서부터 이미 이 학자가 죽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에서 이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이 짐작 가능한 이야기의 전개를 베르나르 키리니는 참 맛깔나고 독특하게 짜나갔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는 내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보여줬는데, 그것을 읽는 순간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며 이 책의 제일 끝부분에 위치하게 됐는지 알게 됐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단 하나의 주제가 이 한편의 이야기에 모두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베르나르 키리니가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문득 이 책의 서문과 본문 사이에 끼여 있던 글 한자락이 생각났다.  

"이 놀라운 일들이 현실이라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상상의 것이라면 난 이미 미쳐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문구를 읽고 서문이 뻥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결국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었고, 난 이런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놓은 작가가 치는 뻥에 계속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뻥에 당하기 위해 기꺼이 이 책을 읽은 것은 나였고, 그 즐거움에 한껏 취할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때로는 이렇게 독특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책에 빠져드는 것도 독서의 한 재미니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베르나르 키리니는 간만에 만난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을  특유의 관찰력으로 찾아낸 소재들을 글로 옮길 수 있는 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하나만으로는 작가 소개문구처럼 이 작가가 마르셀 에메와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비견될만한 재목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책 한권만으로 그를 단정짓기엔 그에 대한 단서가 부족했다. 다만 이제 그는 갓 시작하는 풋풋한 새내기 작가이므로 그 싹이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과연 다음에 만날 그의 이야기는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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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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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사회 주류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혁명적 창녀라고 일컫어지는 한 창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설명이 책 표지와 소개글에 짧게 붙어 있었다. 창녀처럼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과 검은색이라니! 난 이런 제목을 붙인 이 책의 작가 그리젤리디스의 센스에 감탄하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꼭 맞아 떨어지는 제목을 만들어냈을까! 그런데 알고보니 이 멋진 제목은 아주 오래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이랜다. 이 제목을 붙인 것도 자신이 아니라 출판사라며 깔깔거리며 솔직하게 인터뷰했다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그녀의 성격 한부분이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본문으로 들어가자 이런 그녀의 솔직하고 담담한 성격이 책에 씌여진 글자 한자한자에서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홍보와는 조금 다르게 그녀 자신의 자서전이였다.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변화를 가져왔던 매춘이라는 일에 뛰어들게 된 시점으로부터 전후 2년간의 일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승전결의 극적인 이야기 진행보다는 시간의 순서에 따른 순차적인 진행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직업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은 거의 전체가 자극적이며 거칠고 숨가쁜 이야기들 투성이 일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삶을 담은 이 책은 오히려 일반 소설들 보다도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독자들이 이제 이 부분에선 좀더 격렬한 갈등이 나오겠지라고 짐작하게 되는 부분들에서는 오히려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로 유들있게 생략하며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녀의 험난한 인생을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면, 괜시리 불편해지는 마음에 이렇게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읽어 넘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그렇게 거친 이야기를 씹어야 한다면 아마도 내 눈과 머릿속은 너덜너덜 해졌을테니까. 

그러나 이런 그녀의 담담함과 달리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피어난 웃음은 본문으로 들어가면서 사라져버렸다. 책의 번역이나 편집이 엉망이라서가 아니라(오히려 번역은 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들은 내가 호감을 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였다. 처음에 그녀가 창녀가 된 계기가 된 것은 빌이라는 한 남자 때문이였다. 그녀는 그 남자 때문에 그나마 궁핍하지만 최소한 몸 누일 곳은 있던 삶을 던져버리고 무모하게도 생면부지의 나라, 독일로 떠나게 된다. 당시 그녀의 태도는 어떻게보면 낭만적이고 사랑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에 그녀가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라는 입장을 살짝 보태면, 내 입장에서 그녀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계획적이며 한심한 사람의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내내 이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났다. 결국 그녀의 눈에서도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빌이 멍청하며 폭력적이고 후안무치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버스는 이미 떠나버린 후 였다. 이미 그녀는 그날의 숙소와 배고픔을 걱정해야 하는 거리의 창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못돼먹은 빌이랑 헤어지고도 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한심하고 멍청한 남자들을 전전한다. 마치 폭력남편에게 매맞는 아내가 결코 폭력남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는 빌과 비슷한 남자들과 연인이 되는 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폭행을 행사하는 것이 사랑에 표현이라는 말까지 한다. 오 마이 갓! 그렇다면 그녀를 창녀로 내몰은 악몽같았던 빌은 너무나 사랑이 넘치는 남자였던건가? 그래서 그의 사랑에 온몸이 부러져 죽기 전에 그를 겨우겨우 쫒아낸 것인가? 아무리 그녀가 1930년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그녀의 의견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엔 창녀들의 권리를 주장한 그녀를 시대를 앞선 패미니스트 중에 한명이라고 봤지만 이 책을 완독한 후에는 이런 내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그녀의 사망후, 그녀의 무덤을 왕실묘지로 이장하는 것을 패미니스트 단체에서도 반대한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패미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매춘이라는 노동조합의 조합장일 뿐이였으니까. 그녀가 만약 패미니스트였다면 남자 때문에 자식들을 불안한 삶으로 내몰지도 않았을 것이고, 외딴 타국에서 창녀가 되지도, 또 그런 한심한 남자들 사이에서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지도 않았을 터이니.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은 매춘에 종사한 사람이 말하는 매춘이라는 일과 그 일을 업으로 삼은 여성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였다.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어찌보면 급진적인 패미니스트의 한 모습을 그리젤리디스 레알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와 이 책은 그렇지 못했다. 최소한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 그녀의 모습은 이런 내 기대와 많이 달랐기에 실망스러웠다. 책을 잡고 있는 내내 이 책의 어느 부분에 가서야 내가 기대한 내용들이 나올까 두근거리며 기다렸지만 결코 그런부분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부분은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비판은 그녀의 직업적 입장에 편향되어 있었고, 또 일반적이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을 조롱하는 내용이였기에 상당히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할 수 없었고, 이런 그녀의 태도에 마음까지 답답해졌다. 결국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난 사람은 혁명적 창녀가 아니라, 그냥 남자에 홀딱 빠져서 대책없는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이자, 4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무책임한 어머니일 뿐이였다. 

이 책을 다 읽고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기사와 사진을 찾아보았다. 내가 찾아낸 사진속의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그 미소는 생생한 장미처럼 신선했고, 그녀의 미모는 나이가 들었지만 아름답고 활기찼다. 이 글에서 내내 느껴지는 것처럼 삶에 찌들어 고통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사랑한 연인들의 사랑 덕분이였을까. 아니, 그 두가지를 모두 포함한 덕분이리라. 낙천적인 성격과 달콤한 사랑들로 인해 그녀의 삶은 찌들어갔지만, 그 미소만은 해맑게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바램대로 예술가로써의 삶을 계속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더 행복했을까? 이제 그녀의 육신은 검정색 땅속 저 밑에 있다. 아마도 그곳에선 그녀도 그렇게 사랑하던 연인들처럼 검어졌을테지. 그녀가 그토록 원하고 탐했던 것 같은 그들의 검은 피부색처럼. 부디 그녀의 삶이 그 영원의 세계에선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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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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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란 말과 같이, 사랑스럽고 해맑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세월이 흘러 쪼글쪼글한 말린 자두같이 변하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사실 사람들은 영원하다라는 말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다만 마음 한켠에 숨은 불안함을 애써 잠재우며, 영원하리라 믿는 자신의 환상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믿음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 받는 상처와 충격이 클 것임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영원하리라 믿었던 다리가 무너버렸다. 영원히 일어나리라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기에,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이 깨진 현실과 그 믿음의 다리위에서 유명을 달리한 다섯사람들에 대한 상실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파문을 남긴다.  

모든 사건이 양면성을 지니듯이 주니퍼 수사에게 이 사건은 마냥 슬프기만 한 것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신의 의지를 구체적인 결과로 도출하여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주니퍼 수사는 다리 위의 다섯사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곧 이 다섯사람이 묘한 인연들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1700년대 식민지 영토에서의 백인들에 사회가 좁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런 인연이 꼭 우연이나 운명같은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만은 흥미로운 요소로 다가온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딸에게 집착한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과 고독으로 힘들어 하던 그녀의 하녀 페피타, 쌍둥이 형제를 잃고 방황하는 에스테반, 여배우 페리콜을 헌신적으로 부정으로 사랑한 피오아저씨, 그리고 페리콜의 어린아들 하이메까지 이들은 모두 어긋난 사랑으로 괴로워했고,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조롱받던 사람들이라는 것까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비슷했다.   

사람은 죽어도 삶은 계속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인해 삶이 계속되고,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기억과 감정들 속에서 죽은자들의 삶 역시 지속 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삶이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속에서 반복적으로 내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서 함께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다섯 사람은 죽음을 통해 삶를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닐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자신들의 존재를 비로소 각인시키고, 부정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살아생전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들의 삶은 비로소 죽어서야 의미있는 것이 된 셈이다. 비록 그들을 기억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남은 사람들에겐 그들을 잃은 상실감과 가슴이 저릿한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 또한 삶의 또다른 모습이므로 가슴이 저릿해질 사람조차 갖지 못하는 삶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 붙은 수식어는 굉장히 화려하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인 점은 이렇게 훌륭한 평가를 받는 책이 어째서 이제서야 번역이 되어 나왔냐하는 것이였다. 이런 궁금증은 이 책을 읽고나서 자연스레 풀렸다. 아무리 원작이 훌륭하다 한들 그것이 번역을 하게 되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랄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우리네 민족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고, 입안에서 그 운율이 멋들어지게 맴돌지만, 그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되면 그저 빛바랜 그림같이 보이는 것처럼 이 책의 빛나는 수식어 역시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나니 밋밋함만 남아버린 느낌이였다. 번역도 썩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도 많아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또 고전으로 치기엔 고전만한 가슴의 울림과 필체의 진한맛도 없었고, 현대소설로 치기엔 너무 고풍스러웠다. 덕분에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꽤 재밌지만, 문학 그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했을 것 같다. 이런 까닭으로 이 책은 90년대 초반에 한번 번역되고 절판된 후, 거의 20여년만에서야 재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나보다. 

손턴 와일더는 아쉽게도 희곡을 주로 쓰는 작가였기에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번역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글을 한글로 접할 일은 앞으로도 요원할 듯 싶다. 물론 번역이 되어도 영문학계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그의 수려한 문장솜씨를 원문 그대로 맛깔나게 즐기긴 힘들겠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섭섭한 일이다. 이런고로 이 책을 편한 마음으로 한번 정도는 읽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덤으로 삶에 대한 여러가지 사유도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다. 한가지, 이 책의 편집에 세심함이 지나쳤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책의 앞뒤에 달린 추천사와 부록이였다. 무려 두개나 달려 있는 과도한 추천사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을 이미 읽기도 전에 스포일을 당해버렸고, 덕분에 마치 이 책에 대한 찬양일색의 감정까지 강요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때론 과도한 친절이 오히려 부담을 주는 법이라는 것을 출판사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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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도 괜찮아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그 두 번째 이야기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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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 대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우선 이 책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전작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전작을 읽지 않아도 이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기엔 아무 불편함은 없을 것 같다.(전작을 읽은 사람의 의견이니 믿어도 좋다.) 물론 작가의 전작과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에세이집이라는 성격을 띄고 있고, 작가의 개인적인 사생활과 그에 따른 통찰이 씌여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 작가의 에세이집들을 전작과 후속작이라고 나누지 않는 것처럼 이 책들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만 같을 뿐 두 책은 담고 있는 주제도 다르고, 작가가 처한 환경도 다르다. 비록 작가는 책의 시작에서 지난번의 책에 대한 후속작이라고 말하지만, 그냥 전작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놓아 유명해진 작가의 신작 정도라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제일 올바른 설명처럼 보인다. 또한 저자의 전작이 에세이와 여행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반해, 이 책은 에세이와 인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조금 다르다. 한마디로 전작의 소소한 여행담과 감동의 메세지를 생각하고 이 책을 선택했다면 조금 오산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펴고 끙끙대기도 했고, 당황하기도 했다. 내가 읽는 책은 분명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는데, 이게 왠 결혼에 대한 인문학적인 내용들이란 말인가! 게다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과 의견들이란! 이렇게 많은 이론들을 찾아내고 결혼에 대해 다방면으로 연구한 작가의 불타는 학구열에 감탄을 보내는 바이지만, 전작에 대한 기대로 이 책을 펴든 내게는 허를 찌르는 기습공격을 당한 것 같았다. 작가의 글솜씨는 여전히 유머러스하고 개성넘치는, 내가 사랑한 그 모습 그대로지만, 내용은 전작처럼 촉촉하고 잔잔함이 묻어나는 소소한 이야기가 아니였다. 어떻게 보면 딱딱하고 지극히 이론적인 내용들로 이어져 있었기에 전작의 후속작이라고 광고한 책의 소개문구가 야속할 정도였다. 나는 저자 특유의 글솜씨를 사랑했기에 이 책을 선택했고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내가 읽고자 하는 책이 인문학의 성격을 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은 많이 다른 일이다. 그래서 내 예상과 다른 이 책의 성격을 파악한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버렸다. 한순간 김이 팍 새버리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내 심리적 충돌들은 내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글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참을 수 있는 고난이였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녀의 글을 읽는 기회를 던져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글을 찬찬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전작에서 저자가 갈등했던 것이 자신의 자아를 바로 세우는 일에 대한 것이였다면, 이번엔 그 자아를 유지하면서 결혼이라는 합법적이지만 여성에게만은 지극히 폭력적인 제도를 수용하는 문제에 대한 갈등이였다.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저자의 연인이 미국 입국심사대에서 어느날 갑자기 입국을 거부 당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그녀의 연인인 펠리페는 미국에 입국이 영구히 불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어쩔수없이 둘이 결혼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두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두사람 모두 그동안 결혼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런 결정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심리적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는 엘리자베스가 결혼이란 제도를 본인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그에 대한 이론과 여러가지 의견들을 취합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며 추론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 사실을 다른사람들도 알아주고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는 느낌이랄까. 저자도 자신의 의견을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사람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단점이라고 말할정도이므로 이런 내 느낌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게다. 어차피 저자의 전작도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한 내용을 주로 써나가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럴뿐이다. 

결혼이란 제도와 그 자체에 대해 뜯어보자면 결국은 패미니즘이라는 사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제도에 대해 이리저리 뜯어보고 씹어보고 맛보며 해석한 이 책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그렇다고 미리 지레겁먹거나 알레르기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저자가 주로 말하고 싶어하는 건 제도권안에서의 비합리적인 결혼이라는 개념이지, 패미니즘이 아니니까. 저자가 결혼에 대해 알레르기를 갖게 된 것은 자신이 패미니스트여서가 아니라 이미 결혼에 한번 실패하고 그 후폭풍을 진저리나게 겪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계속 이런 자신의 경험과 상황을 주장하던 그녀가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전작에서 이렇게 자아를 확립한 자신이)이런 사회적인 구속에 순응해야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싫어서라는 대목에서 또 다시한번 한번 김이 팍 새버렸다. 그것도 책의 마지막장을 고작 몇장 앞두고서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펼쳐놓은 방대한 결혼에 대한 이론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의 첫번째 결혼과정에서 있었던 가벼운 생각과 그로 인해 야기된 갈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결혼을 튼튼한 토대위에 세우기위한 고찰의 과정이였다고 봐야할까? 그리고 결론은 자존심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끊임없이 결혼에 대해 끊임없이 초조해하는 이유가 바로 저 자존심 때문이였다니, 앞서 저자가 제시한 자신의 모든 결혼 이론들이 퇴색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서양인이다. 동양을 여행하고 경험하며 동양의 사상들을 많이 접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되는 그녀의 모든 이론과 의견이 옳다고 하기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 백퍼센트 동감하기는 힘든 부분과 불편한 부분이 존재했다. 그녀가 말하는 결혼제도의 주된 내용이 대부분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혼이 여성에게 몹시 불리한 계약관계라는 것은 백퍼센트 동감한다. 어째서 이 개념만은 인간의 수세기 역사동안 좀체 바뀌지 않았는지 미스테리할 뿐이다. 이 외에 이 책을 읽으며 결혼에 대한 흐릿한 개념들을 제법 꼼꼼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이 책을 만난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글솜씨가 여전히 맛깔났고, 덕분에 심각한 내용을 말하는 부분에서도 깔깔 웃으며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큰 수확이자 이 책을 읽는 제일 큰 기쁨이였다. 역시 난 그녀의 글이 너무너무 좋다. 그녀의 글만 보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니까! 이제 저자는 공식적인 기혼자의 길로 다시 들어섰다. 과연 결혼이라는 몹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제도가 그녀의 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진다. 부디 그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로 할 수 있길 마음속으로나마 열심히 응원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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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멋진 동네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꽤 멋진 남편과 괜찮은 직업을 갖고 그 직업에서도 인정받으며 사는 삶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꿈같은 인생이다. 그리고 몹시도 세속적인 나는 이런 삶이 참으로 부럽다. 덕분에 드라마나 영화에 이런 장면들이 나올때면 때때로 그 풍경의 주인공이 나라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엘리자베스는 이런 꿈결같은 삶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부터인가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고 만다. 스스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배부른자의 푸념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고통이란 개개인의 관점에서 고무줄과 같은 것이니까. 나에게는 그다지 큰 번뇌가 아니였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이제까지 자신이 쌓아온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심각한 고통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밤마다 욕실바닥에 이마를 대고 펑펑 울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이런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그녀는 남편과 이혼 후, 무너져버린 자신을 찾기위한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여행의 시작이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해서 이 이야기가 기행문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펴게 된다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1년여에 걸친 자아찾기에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서양인들의 자아찾기라는 주제에 대해 오글거리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미리 지레 겁먹고 이 책을 덮지 않으려 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만약 저자의 글솜씨가 내 마음에 쏙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진작에 덮어버렸을 것이다. 정말 엘리자베스의 글솜씨는 너무나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마치 종달새가 정답게 지저귀는 것처럼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가슴 찡하게 핵심을 찌르는 그녀의 글솜씨에 연신 미소와 감탄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한줄한줄 써내려가는 단어와 문장들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이런 멋지고 사랑스러운 글솜씨를 지닌 엘리자베스는 1년여간 이탈리아, 인도, 발리, 이 세나라를 순차적으로 여행하면서 자신의 시들어버린 삶을 회복시키고자 열심히 노력한다. 그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어찌보면 백인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때로는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편견없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하는 그녀의 태도는 본받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개방적인 태도와 사랑스러운 마음씨로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고 경험하면서, 보다 더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꾸려나갈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 끝에서 만나게 된 그녀의 모습이 처음과 얼마나 많이 달라져 있던지! 어둠속에서 눈물로 점철하던 그녀가 이제는 햇볕아래서 반짝거리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 내 마음도 덩달아 흐뭇해졌다. 아무래도 행복은 사람에서 사람으로만이 아니라 책으로도 전염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척릿소설의 실사버전처럼 보인다. 직장과 가정에서 잘나가던 여인이 고난을 맞이하지만 결국 그 고난을 다 물리치고 멋진 왕자님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진다는 기승전결 스토리는 이 책이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참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지구상의 모든 여성들이 어릴때부터 바라는 해피엔딩이랄까? 바로 이런 요소들 때문에 이 책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제작되었겠지만. 물론 그녀는 이 해피엔딩을 거저 얻지 않았다. 이렇게 빛나고 달콤한 열매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신데렐라와 콩쥐가 가만히 앉아서 해피엔딩을 맞이 한 것이 아닌 것처럼. 뭐, 그 왕자님이 동화속과 달리 대머리라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그런것쯤은 눈 살짝 감고 넘어가자. 

해피엔딩에 이르게 되는 과정의 주된 축이 조금 오그라드는 자아찾기라는 것만 빼면 이 책은 정말 내 마음에 쏙 든다. 이런 오점도 너그럽게 이해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절망에 빠진 사람이 으례 신비주의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는 모습과 그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엘리자베스의 태도는 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요강을 멋진 도자기라고 황홀경에 빠져 버린 서양인을 보는 기분이였으니까. 그래서 제2장인 인도에서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을 읽는 속도에 비해 조금 오래 걸렸다. 눈으로는 글자가 들어오는데 머릿속으로는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몇번이고 다시 읽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런게 저자가 말하는 만트라를 읽는 기분이려나. 덕분에 인도이야기는 저자가 인도에서 고행한 것처럼 나도 저자의 고행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이렇게 그 어려운 산등성이를 저자와 함께 넘어 왔다는 생각에 이 책이 더 재밌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난 저자같은 고행을 했을지언정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으니 문득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살포시 들었다. (하지만 저자의 애인처럼 대머리는 정중히 사양하련다.)

마음껏 먹고 기도하고 사랑한 그녀는 이제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읽게 된 나도 참 기쁘고 즐거웠다. 이 책을 다 읽고 아쉬움에 저자가 출연했다는 오프라 윈프리쇼와 줄리아로버츠가 나왔다는 영화를 찾아볼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즐거운 마음을 그냥 내 안에 품고, 그 간질거리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굳이 영상물을 통해 그녀의 모든것이 내 상상과 다르다고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와 함께한 이탈리아, 인도, 발리 여행을 정리하며 이 즐거움을 마음속에 가득담아두고 싶다. 그러면 나도 그녀의 반짝거리는 행복의 한조각을 살짝 맛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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