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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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실질적인 기행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한다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기행산문이 아니라 필자의 머릿속 여행이다. 작가의 머릿속에 남겨진 풍경에 관념의 옷을 입히고 있다. 그러기에 풍경은 없다. 아무리 읽어도 작가가 이야기하는 풍경은 나의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아무런 이미지가 남지 않는다.

  기행하는 사람과 같이 걷는 듯한 느낌 없이 대학 교수가 강의실에서 미술 작품을 하나 하나 슬라이드에 띄워 놓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은 시평론집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연이 해석의 대상이듯이 시 또한 해석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머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실(풍경)들을 하나씩 순례하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관념과 의미들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여행지의 정보나 여행자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다.  그냥 머리가 아프다. 지루한 설교를 한참이나 듣고난 듯한 기분이 강하게 든다. 왜 자연을 아니 여행지를 관념으로 해부해야 할까?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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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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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행문은 바다에서 시작되고 바다에서 끝난다. 왜 끊임없이 포구(바다)를 찾아다닌 것일까? 무엇을 찾기 위해 다닌 것일까? 바다는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끝나버린 막힌 곳이다. 그곳을 끊임없이 다닌 이유가 무엇일까?

  이 의문에서 찾은 답은 바로 필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필자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여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잇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는 여행지의 모습이 남는 것이 아니라 곽재구라는 사람의 인상만이 남을 뿐이다. 그 사람을 오랫동안 알아온 듯한 느낌만이 남는다. 그 곳에 사는 사람의 냄새는 깊이 묻어나지 않고 필자의 냄새만 짙게 풍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곽재구라는 시인의 몸부림을 읽게 된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다니는. 끊임없이 헤매는 그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나의 고민의 시발점은 어디일까? 어디를 찾아 나서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까?

  현재에 안주해서는 나의 모습을 객관적을 볼 수 없다. 떠나야 한다. 그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아브람이 자신이 거주하던 곳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때 아브라함으로 불려지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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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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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욕은 대부분 성적인 욕과 동물에 빗댄 욕이 있다. 성적인 욕은 인간의 금기(터부)를 깨뜨리는 행위를 빗대어 인간답지 않는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면, 동물(대부분은 개)에 빗댄 욕은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에 빗댄 욕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런데, 그런 개를 이 책에서는 긍정하고 있다. 왜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머리로써 사변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치며 살아가는 그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살아있음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살아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나 대상들에 대해 진정한 애정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본다. 개는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모든 것에 대해 애정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 죽어가고 본인이 버림받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소중이 여기던 대상에 대해 애정을 드러낸다. 우리네 삶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런 개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인간다와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개는 몸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로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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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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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상자>를 읽으면서 순종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책에 이어 계속해서 나에게 순종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하는 책이었다.  진정한 순종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묻고 있다.  책을 읽은 와중에 계속적으로 내가 이해하고 또 행하고 있는 순종의 모습이 자꾸만 드러나서 마음이 씁쓸했다. 타인을 향해서 성경의 원리대로 살지 않는다고 질타했던 내게 '잠잠하라'라는 메세지를 던져왔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원하시는 방향을 알기위해서는 타인들을 의식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으로 나의 모든 의식이 집중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의 필자도 주변의 상황과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과의 밀착되는 관계로 변화되는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내게 예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되는 방법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었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무엇을 부여잡아야 되는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 목적과 자기위안, 자기 인정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을 내가 믿는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선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자기중심적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내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내 일이 잘못되면 사탄이 방해해서 그렇다라고 여기며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끈질기게 구한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나의 일이 잘되고 안되고에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결국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중심이고 하나님을 나를 도와주는 존재의 모습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일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럴때 나의 중심성은 조금씩 고쳐질 수 있을 것이다.

 '내려놓음'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과 동등된 존재자이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려놓으신 예수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인정하셨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그 영광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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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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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게바라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약자들이 서로의 힘으로 강자의 억압을 배제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이것을 많은 혁명가들이 꿈꾸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 철학가들 혁명가들이 존재했었지만 그러한 사회를 아직까지 만들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특히 체게바라는 혁명을 통해 인간성까지도 혁명적인 인간으로 바뀌어서 진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인간이 의지만으로 그렇게 변화가 될까?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결과였으리라.  체게바라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은 도덕적 순수성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사회를 위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 선을 행할때 조차도 그 대가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 무엇에 의해 기뻐한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깊은 천착없이는 새로움을 줄 수 없다.

 체게바라가 원하던 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꿈꾸었던 사회는 여전히 우리가 꿈꾸는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여기에 바로 우리의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내가 되어야한다. 나의 변화에서 작은 변화를 불러 내어야 한다. 나의 아집과 집착을 여전히 갖고서 그런 사회를 향해 매진해 나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변화하지 않고 타인을 변화시킬 수 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셉이 꿈꾸었을때 자신이 변화되었다.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꿈을 믿었기에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도 꿈을 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을. 예수그리스도의 꿈을 꾸어야 한다.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려놓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를 꿈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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