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8. 25

마가복음 6장 53절 - 56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자신의 목적으로 가지고 열심으로 나아왔습니다. 병을 낮기 위해서요. 오늘 성령님은 두 가지를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내게 나아오느냐?"

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내게 나온다. 그런데, 나를 아는 너는 왜 그런 열심조차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너는 내게 왜 나아오느냐?"

나오는 목적을 물으십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자신이 잘 나보이기 위해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꾸짖으십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함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있는 나의 자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나의 생활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인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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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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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꿈을 잃어버린 시대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가진 꿈을 대신 꾸도록 위안된 문화이다. 그 문화속에서 대신 펼쳐진 꿈을 보며 많은 이들이 울고 웃는다. 그 꿈을 모두 자신이 이룬 꿈인양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모두가 최면에 걸린 사람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모두 그 문화에 잘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일뿐이다. 문화뒤에 숨어있는 경제논리의 대상일 뿐이다. 돈벌이의 대상일뿐이다. 그것을 가리고 세상 삶의 주체인 듯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이다.
이 대중 문화는 계속 거짓된 정보를 현대인에게 흘리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시청률에 의해 TV프로그램이 바뀌거나 재편성되는 일들, 사람들의 여론 조사에 의해 정해지는 인기가요 등등. 이런 것들을 통해 대중들은 자신들이 문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기획되고 마케팅된 광고에 의해 사람들이 끌려다니는 것일 뿐인 것이다. 참여가 아니고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소외의 현실이기에 사람들은 대중 문화에 더욱 환호한다. 자기가 그 속에 참여하고 있다는 강한 착각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더욱 몰입한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 교사들의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TV프로그램이나 가수, 영화 등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인간 서로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대상들이 얼마나 멋있고, 예쁘고 잘 났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삶에 울고 웃는다. 완전히 그들을 나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광고에 의해서 더욱 조장된다.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살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그린다.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살아야 현대인인 듯한 강한 인상을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고에 나오는 것만을 걸치고, 먹고, 여행다니고, 살고, 취한다. 그것을 통해 더욱더 자신의 삶과 일치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현대에 맞게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안도한다. 그것에 뒤쳐질까봐 기를 쓰고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따라간다. 그리고, 주인공인양 살아간다.
경제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 대중문화에 휩싸여 그것을 최상의 가치로 알고 있는 학생들의 의식을 어떻게 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는 현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본다. 결국 대중문화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목표는, 최고의 가치는 돈으로 한정지어진다. 행복의 필수품이 바로 ‘돈’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돈만 있으면 미디어에 그려진 아름다운 행복을 모두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없이 ‘돈’을 숭배한다. 사람에 의해 문화가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돈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에 사람들이 끌려다니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꿈을 꾸게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신의 본연의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비전에 의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책읽는 훈련이 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사고력 훈련이 된 뒤에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에 접근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발신하는 능력을 키우는 미디어 리터러시(매체해독)교육이 이루어져야한다. 그것이 학교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되어야 주어지는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질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이 대중문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진정한 꿈을 잃어버린 시대에 진정한 꿈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식시킬 것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대중문화에 의해 제시된 행복은 위장된 행복임을 인식하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참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중문화를 성경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할 것이다. 끊임없이 말씀에 조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단순히 주어진 문화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문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나니’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헛된 거짓된 꿈을 우리가 꾸지 않도록 결단해야 한다.
세상과 예수님 중 선택해야 한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쫒는 사람은 두 마리 다 놓칠 뿐이다.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거짓된 꿈을 쫒을 것인가? 진정한 꿈을 쫒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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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35-44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는데 삶의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시편 27: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게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볼때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걸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선이 주님에게서 떠나 풍랑(현실적문제)으로 옮겨졌을때 베드로는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문제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본 풍랑은 우리의 현실적 문제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수렁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내가 발버둥치며 빠져나가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더욱 깊게 빠져듭니다. 나중에는 목숨까지도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고요히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을 바라보면서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물위를 걸으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저에게서 나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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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생님 최고 동화는 내 친구 10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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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기발성을 생각해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참으로 어른과 다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눈엔 아이들의 세상이 사라져 버렸다.
  어른의 세상에 아이들을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이들에게 최선이라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자위하면서. 빨리 빨리, 목표와 목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달성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이 아이들의 눈엔 5급 훈장을 자랑스럽게 달고있는 위선적인 빡빡감자 아저씨(육성회 회장)이 아닐까? 아이들이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그 종이 위에 그려진 모습으로 느껴진다.
  아이들의 삶을 놓쳐버린, 그들만의 세계가 있음을, 아니 있어야 함을 애써 외면하는 나의 모습이 되어 있다.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현실에 쉽게 안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다 그렇게 사는데 뭐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다쿠보 선생은 아이들의 행동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힘을 가진 존재다. 비록 자신의 삶이 명확하고 잘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힘든 삶을 통해 자신이 힘들어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어 내고 있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아이들도 어른과 동일하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사고의 방법과 틀만 다를뿐 동일하게 삶에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다투고 싸우고 문제도 일으키지만 서로의 고민을 나눌줄 알고, 또 해결해 낼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이 모두 새롭게 느껴지고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는 아침. 학교길을 향해서 신나게 뛰어가던 나의 모습. 친구들과 장난치고 뒹굴고 뛰어다니던 시절. 그때 나는 어른들을 어떻게 느꼈던가? 좀 이상한 존재였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던 이야기를 오랜 시간 우리를 세워 놓고 따분하게 해대던 교장선생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자면을 계속 외치던 아침조회시간. 무조건 공부해야 한다라고 외치시던 선생님, 부모님. 왜에 대해선 잘 이야기가 없었다.
  신기하고 알고 싶은 것은 많던 어린 시기에 별로 궁금하지도 않던 내용을 끊임없이 외워야 했던 우리. 공부는 원래 재미없는 거구나를 그 공부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 어른이 되는 건 이렇게 별로 필요없는 내용을 머리 속에 잔뜩 집어 넣는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어린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덧 그 어른이 되어 있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것을 중요한 척하며 강요하는 허울좋은 어른이 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왜 예전에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어른이 모습이 되어 있을까? 왜 어른 시절의 그 호기심 많던 나의 맑은 눈망울을 잃어버렸을까? 왜 아이들의 말과 전혀 다른 삭막해진 말을 사용하는 어른이 되어 있을까?
  짧은 동화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되었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예전에 나의 모습임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대상을 바라보는 그 순수한 마음이 아이들에게는 있다. 그 순수함을 계속 유지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어른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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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변혁시키는 책읽기
한기채 지음 / 두란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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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생활화를 위한 책읽기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신앙의 의식화와 생활화가 이루어져 있는가? 아님, 신앙과 생활이 별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지는 않은가를 고민하게 만든 책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보다는 나의 지식(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결국 말씀이 내 내면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롯은 결정적(시험, 선택) 순간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선택했다. 아니 자신의 뜻을 택했다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소돔의 풍성함을 보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저렇게 아름답고 풍성하니, 저 땅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야. 반대쪽 들을 봐, 황량하고 식물 하나 자라지 못하는 땅이야, 그런 땅에 좋은 것이 뭐가 있겠어.’ 아마 롯이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하나님, 좋은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 이렇게 풍성한 땅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넉넉하니 참 좋네요.’ 이렇게 감사기도까지 올렸을 것이다.
이 롯의 선택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롯은 없다. 롯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롯의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은 따라와 도와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참 어리석고 교만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는가? 이런 고민의 시기에 이 책은 나의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한 여름의 시원한 소나기로 다가왔다.
저자는 성경읽기는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실천해야 되는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실용적인 책이요, 실천적인 책이다. 그렇다면, 일반책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일반책은 성경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서 선택과 결단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신앙과의 조화 여부를 평가해야 한다. 저자는 독서와 생활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쓰고 있다. 독서를 글만 읽는 행위가 아니라 생활속에서 독서한 내용이 실천되어야 한다. 독서는 곧 살아가는 행위이다. 예수님도 살아가면서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실천했다.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 육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을 읽는 우리 또한 생활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독서시 중요한 것은 저자를 아는 것이다. 저자를 안다는 것은 저자의 의도(생각)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내용의 설계도를 찾아야 한다. 글의 목록을 통해서 전체적인 내용의 윤곽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온몸으로 읽어야 한다. 읽어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해석해 내기 위해서는 건전한 자아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독서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당했다. 주로 내가 읽는 이유는 일반적인 이론을 습득하고 지식을 축적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삶을 살기위해 읽은 것이 아니라 읽는 맛에 길들어 있었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읽더라도 생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져 있었다. 결국 나의 의와 지적인 교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말씀 읽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기뻐서 하는 행위였다. 그것을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제 변화되어야 한다. 말씀이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내 삶을 성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령님의 지혜를 간구하는 심령이 되어야 한다. 간절함이 필요하다. 눈을 돌려야 한다.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에서 세상의 영광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셨다.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말씀을 실천하셨다. 나는 이것을 지식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했었다. 과연 나는 실천하고 있는가?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눈에 거슬렸던 부분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도 독서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교재연구를 하고, 필요한 책에서 정보를 찾고, 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했다가 활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를 동일한 방식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일까? 몇 년전에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을 모아서 설정된 주제에 맞게 배열하다니. 이렇게 준비하면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니?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나님이 전하지 말라고 하시면 전하지 않을 때도 있지 않을까? 왜 모든 목사(설교자)들이 강의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강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강의와 설교를 동일한 것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나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가야한다는 말과 성경 외에 모든 책들은 말씀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사고는 나의 독서태도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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