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법인 지음 / 불광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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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께

 

 

스님 안녕하세요. 저는 얼마 전에 스님을 독대한 사람입니다. 이번 템플스테이에서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을 꼽으라면 스님과의 차담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템플스테이를 통해 전국의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장기간의 템플스테이 과정에서, 제가 있는 곳으로 때로는 어머니, 아내, 아버지가 찾아와 템플스테이를 함께하기도 했는데, 해남 대흥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여행의 대부분은 저 혼자서 돌아다녔지만 종종 가족들의 합류로 인해 가족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길에서 수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그중 스님이 하신 말씀과 송광사 불일암에 덕조 스님의 법문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제 가슴을 뻥 뚫리게 한 스님의 법문은 '공'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 가장 높으면서도 핵심이라고 하는 공의 사상을 그토록 쉽게 평이하게 설명하시는 스님의 가르침에 저는 제가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공이라는 것은 무조건 비우고 텅 빈 것이 아닌 본래의 것 그 자체만을 남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나의 본질을 흐리고 유혹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세속에 살다 보니 내 몸에 걸맞지 않은 옷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더군요. 이를 하나둘씩 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본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제가 그토록 찾고 갈구하던 해답이었습니다. 마음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살아가기보다 내가 기준이 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익숙하다고 느꼈던, 그리고 내가 익숙하다고 자위하며 속여왔던 삶을 다시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렸다고 하셨으니, 저 역시 조금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이를 넉넉하게 품어안으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듯, 이성과 감성, 이성은 인문학으로 닦으며, 감성을 키우기 위해 악기와 다도 그리고 다양하게 놀 수 있는 것들을 만들며, 최대한 행복하게 살고자 합니다. 세상이 설정해놓은 물질적인 쾌락에 따르기보단 저의 가슴이 소리치는 정서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대흥사를 나오면서 절집 앞에 위치한 서점에서 스님의 책을 단숨에 구매해서 여행 내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버스나 기차를 타서 잠을 청하는 시간과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시간 외에는 대부분 스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스님께 가장 매력을 느낀 부분은 행동을 강조한 부분이었습니다. 몇몇 사찰의 템플스테이 차담 시간에는 스님들이 직장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물질적인 삶에 최선을 다해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씀도 하시던데,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물론 그렇게 산다면 자신의 인생은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러나 설사 그렇게 행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신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만약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더 각박해지고 인정이 메마르지 않겠습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세대와 우리 밑의 세대의 모습이 이런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습니까. 스님은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중심에는 타인과 함께하는 연대가 들어 있었지요. 나도 중요하지만 남과 함께 연대하자는 그 말씀! 그 울림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성으로 인문학을 배우지만, 인문학을 넘어 인문행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무언가를 행하여 대중을 구세할 웅대한 꿈을 품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베풀며 사랑하며 함께 손잡고 가는 삶. 남들보다 미련스럽고, 우직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스님과 함께 작은 부분이지만,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행동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글에서 제가 결례나 무례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남 대흥사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렇기에 쉽게 방문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스님께서도 바쁘시기에 암자에 자주 머무시는 경우도 없겠지요. 그래서 이번 만남이 더욱 뜻깊었습니다. 스님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스님과 다시 조용한 일지암에 앉아 독대하며 같이 차를 마시며 많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도 세속에서 마음 수양하고 선행을 닦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에 뵐 때 행복한 미담을 많이 들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끝으로 인사드립니다. 보통 세속에서는 건강에 대한 덕담을 하는 것을 최고의 인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자연스러움을 최고로 여기기에 구태여 건강에 대한 미덕을 드리기보단 다른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스님의 공부에 큰 깨달음이 가득하길, 더불어 행동을 강조하셨던 초심을 잃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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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리커버 양장 에디션) - 라틴어 원전 완역판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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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 나니, 기독교 3대 고전으로 꼽힌다는 《천로역정》과 《그리스도를 본받아》도 읽고 싶었다. 《고백록》이 한 인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묘사한 텍스트라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에 대한 계율을 논하고 있는 텍스트였다. 그렇기에 두 책의 내용과 분위기는 상이했다. 《고백록》이 감성적이며, 특정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텍스트라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바람직한 종교적 계율을 표준화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의도로 저술됐다.

 

책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당시의 수도사들을 교육하기 위해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일반적으로 그의 저서로 분류되지만, 원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불교 템플스테이를 하는 과정에서 읽었다. 빡빡한 템플스테이 일정을 마치고, 고요한 산사 안에서 작은 책상에 이 책을 올려두고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인 사찰에서 기독교 고전을 읽으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책을 읽으니,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종교인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와 이슬람교는 각각 상이한 교리와 계율이 있지만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평화, 화합, 단결, 수양, 선(善), 사랑, 수양, 명상, 내면 중심 사상 등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앞의 덕목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책에서는 당대의 젊은 수도사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런 계율들은 평화와 자비, 사랑과 헌신을 본바탕으로 두고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저자가 직접적으로 말하는 부분으로, 수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계율에 대해 전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제자와 그리스도의 문답법으로 구성된 부분으로, 독자와 저자는 제자의 입장을 취하여 절대자에게 물음을 갈구하고 있으며, 이런 제자의 물음에 그리스도가 따뜻하게 대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어릴 때부터 기독교는 나에게 커다란 거부감으로 다가온 종교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하교 시간, 기독교로 추정되는 사람이 포교 활동을 하면서 나에게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말을 하며 위협하였다. 그때 나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 때문에 엄청 겁을 먹었다. 그 뒤로 자라면서 나에 머릿속에는 기독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기독교 특유의 베타적인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고전을 읽다 보니, 어린 시절 자리 잡았던 편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며 만났던 기독교의 가치관은 인류 사회에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따뜻한 덕목들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평안했다.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거리감도 좁힐 수 있었고, 기독교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한 역사와 고전에도 관심이 생겼다.

 

태초부터 인간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믿으며 사회를 발전시켰다. 인간은 특유의 협동심으로 인해 문명을 일궈내고 지구를 장악했지만, 그런 군집 활동에도 불구하고 원초적인 내면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더더욱 깊어졌다. 그렇기에 고대에서 지금까지 사회가 발전하고 진보하더라도 인간의 외로운 내면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종교'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날 종교는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발전된 문명 아래에 '군중 속의 고독'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스한 손길과 사랑을 건네서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것. 이러한 일에 종교가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저서는 기독교의 계율을 논한 저서이긴 하지만,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읽힌 기독교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읽힌 고전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종교 활동에 대한 본보기와 영감을 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인이 읽더라도 편협한 시각보다는 너그럽고 사랑이 충만한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일독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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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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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까지 진실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솔직하고 떳떳할까. 각박한 현대 사회, 너도 나도 속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서 이런 물음은 어찌 보면 고리타분하고 현실감각이 없는 생각으로 치부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머릿속 한구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초중고 학창 시절에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과 사회생활의 규율을 교육받지만, 머리가 커가면 커갈수록 그런 원칙적인 방법보다는 변칙에 능숙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서슴없이 기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다. 그런 변칙과 기만을 자행하면서 우리는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라며 자조하고 합리화를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정상적인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내적인 갈등과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몇 번 사회물을 먹다가 보면, 마음속에서 울부짖던 양심도 무뎌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우리는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풍파에 젖은 스스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볼 때에는 바르게 자라고,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 호평하는 분들이 나름 있었지만, 그거야 피상적인 겉모습일 뿐이고, 나 자신이 나를 스스로 들여다봤을 때 나 역시 탐욕과 위선, 그리고 공명심과 허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표리부동한 자신 때문에, 10대와 20대 시절에는 방황을 했다. 마음 수양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세월의 풍파에 젖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종국에 가서는 그런 노력을 스스로 배신하는 모습 앞에, 나는 내적으로 스스로를 자학으로 몰아붙였다. 실망, 원망, 비난, 그리고 좌절로 이어지는 내적인 갈등의 연속,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계속해서 맴도는 느낌이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가. 역사서에 기록된 영웅들의 일대기와 선인들의 삶을 접하면, 같은 인간이지만 위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수양하며 달궈낸 그들의 강인한 멘탈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편으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에 휘둘려 오늘도 우리의 욕망을 스스로 자제하지 못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으니. 나는 왜 역사 속에 위업을 남긴 인물들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의 멘탈은 태생적으로 강한 것인가? 그들과 나는 아예 다른 인간이란 말인가? 그들은 삶의 풍파 속에서 과연 흔들린 적이 없었을까. 매번 마음 수양에서 패배한 나로서는 위인들과 선현들의 진솔한 고백이, 가식 없는 생생한 고백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그때 《고백록》을 만났다. 어느 날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 '종교가 과연 인간의 내적인 고민으로부터 구원을 내려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말없이 《고백록》 책을 주면서 한 번 읽어보라고 하더라. 종교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물씬 느껴나는 이 고전을 읽기가 망설여졌지만, 그거야 읽고 나서 판단하면 될 문제고, 일단은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초절정으로 더운 날씨에 시원한 이온음료를 삼키는 쾌감을 느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방황하던 내게 시원함과 통쾌함을 선사했으며, 책을 접한 이후 마음이 흔들릴 때 남몰래 읽던 고전이었다.

 

기독교의 성자로 추앙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고백록》에 녹아냈다. 성자였던 그가 방황하고, 무절제하고 이단을 배우며, 색욕에 탐하던 어린 시절. 그런 타락의 시절을 진솔하고 호소력 있게 고백하며,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한다. 그가 자행했던 타락의 기록들을 읽으며, 나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마음을 다잡는 것에 있어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성자나 위인들 역시 나와 똑같은 인간들이구나.'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반성하던 덕목들 위선, 자만, 오만, 정욕, 욕심, 탐욕... 이런 세속적인 덕목들은 나를 포함한 일반인들뿐만이 아니라, 성자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도 찾아볼 수 있다. 하긴 비슷한 예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수행을 하면서 색욕과 탐욕을 시험당했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인간이었다.

 

《고백록》의 후반부는 그런 타락스러운 덕목들로 가득 찬 자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통해 극복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과정으로 구성됐다. 사람마다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열렬한 신앙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했다. 특정 종교를 믿는 입장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법이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해답을 찾아 마음의 평안을 찾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성공한다. 신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토록 자신의 내면을 디테일하고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결점은 가리고,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중 출판을 목적으로 한 저서에서 스스로의 결점을 디테일하게 발가벗기듯 고백하고 있으니 이토록 용기 있고 진솔한 저서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싶다.

 

서두에서 말했듯 요즘 세상은 타인을 넘어 나 자신을 기만하는 시대다. 스스로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이런 내면의 진솔한 고백은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최근 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고전들을 접하고 있는데, 그런 일환에서 라틴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번역본 《고백록》을 다시 읽었다. 20대의 정신적인 방황 앞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내려주던 《고백록》을 이렇게 다시 읽으니, 그때 전율했던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다. 세월이 지나도 인간의 진솔한 마음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고백록》은 특정 종교적인 교리를 담은 책이 아닌 보편적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적 갈등을 경험하거나 정신적인 방황을 앓고 있는 지성들에게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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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사마광 지음, 푸챵 엮음, 나진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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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은 중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로, 전국시대에서 당나라 멸망 이후 오대 십국까지 1362년의 역사를 기록한 대작이다. 다루는 연도가 방대한 만큼 책의 분량도 엄청난 편인데 무려 294권으로 구성됐다. 그래서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를 완독하기가 쉽지 않고, 그렇기에 《자치통감》을 다룬 축약본이나 요약본 도서들이 최근 많이 발간되고 있다. 최근 나는 《자치통감》을 완독하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방대한 거작인 《자치통감》을 완독하기 위해 국내에 나온 《자치통감》 관련 개론서와 요약서들은 대부분 구해서 읽어봤다.

 

원전 완역본을 제외하고, 요약서와 개론서를 추려내보면 크게 네 가지 도서가 눈에 들어오는데 첫 번째는 원전 완역본을 펴낸 권중달 교수가 쓴 《자치통감 사론 강의》이다. 이 책은 《자치통감》에 쓰인 사학자들의 사평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데 중점을 둔 도서로, 사평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에 치우친 도서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도서는 장펑 교수의 《자치통감을 읽다》라는 도서인데, 이 책은 《자치통감》을 재구성하여 자기 계발서와 수양서처럼 편제하여 단권화한 책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자기 계발서에 가까운 책이다.

 

세 번째로 거론할 도서는 장궈강 교수의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 자치통감》인데, 이 책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시대적 흐름을 일목요연하고 현대적으로 정리한 도서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책은 오늘 리뷰의 주인공인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인데, 이 책은 방대한 《자치통감》의 분량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 58편을 뽑아내 이를 바탕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듯 《자치통감》은 워낙 방대한 저작이라서, 이를 요약하고 축약하는 과정에서 편저자의 의도에 따라 요약본의 성격도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의 특징을 분석하려면 앞서 나온 요약본들과 비교 분석을 할 수밖에 없다.

 

먼저 첫 번째 도서인 권중달 교수의 《자치통감 사론 강의》의 장점은 역대 뛰어난 사학자들의 사평을 중심으로 책이 전개되기에, 중국 역사의 흐름과 함께 순수한 역사학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역사서라기보다 역사 철학서라고 생각한다. 순수 사학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자치통감》이라는 명저를 탄생한 뛰어난 사관들의 생각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싶을 때에는 이 책이 굉장히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사평에 대해 관심이 없고 중국 역사의 흐름을 잡고자 하는 일반인들이나 초심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도서인 《자치통감을 읽다》는 《자치통감》이란 책이 현대적으로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최적의 책이다. 그렇기에 바쁜 와중에도 인문학적 자기 계발서를 원하는 분들, 혹은 조직이나 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치통감》을 통해 도덕성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이 책은 성격이 자기 계발서라서, 《자치통감》을 통해 중국 역사의 흐름을 잡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비추하고 싶은 책이다. 책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는 시간의 흐름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교훈과 관련이 있는 특정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록됐고, 그렇게 기록된 사건들은 시대적 구분 없이 뒤죽박죽으로 거론되기에(예로 우리나라 역사서로 치자면 조선과 고려 삼국시대의 사례가 뒤죽박죽으로 나오는 것을 연상하면 되겠다.), 중국사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읽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세 번째 도서인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 자치통감》의 장점은 책을 통해 중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의 두 책으로는 《자치통감》이 다루고 있는 방대한 역사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반해, 이 책은 저자가 역사의 흐름을 적절하게 편제하여 독자가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기 쉽도록 편안한 서술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앞의 두 책보다는 훨씬 대중적이다. 그러나 이 책의 치명적인 단점은 편파적인 편제에 있다. 원래 《자치통감》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시대는 당나라 시대고, 그다음이 한나라 시대다. 책에서는 한나라 시대와 유비, 조조, 손권이 군웅할거하던 삼국시대를 집중적으로 조망했지만, 그 이후 시대인 5호 16국,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 그리고 5대 10국 시대는 굉장히 간략하게 서술했다.

 

네 번째 도서인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지금까지 나온 《자치통감》 관련 개론서 중 가장 평이하고, 접근하기가 쉬운 도서다. 책은 《자치통감》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 58개를 뽑아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렇기에 이 책의 부제를 붙인다면 '58편의 이야기로 읽는 자치통감'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방대한 중국사를 풀어냈으니 접근성은 좋은 편이라, 《자치통감》에 관심을 가지는 초심자들이나, 동양 고전에 대해 익숙하지 않는 분들은 이 책으로 가볍게 《자치통감》을 접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반면 책의 단점을 꼽아보자면 방대한 통감을 58개의 사건으로 축약하다 보니, 중간중간 빠진 내용도 있으며, 무엇보다 이 책에는 《자치통감》을 쓴 저자들의 사평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리뷰를 쓰면서, 최근에 《자치통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과거에는 완역은커녕 축약본도 전무했고 《자치통감》이라는 책 자체가 매우 생소했는데, 최근에는 완역본도 접할 수 있으며, 이렇게 다양한 개론서를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자치통감》에 대한 대중의 관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장 최근에 나온 《한 권으로 나온 자치통감》은 기존에 출시한 개론서와 축약서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성격이 강한데, 이 책의 출간 배경 역시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들의 기호의 영향 덕이 아닌가 싶다. 어찌 됐건 이런 출간은 매우 환영이다. 이 책 덕분에 대중들이 더욱 쉽게 《자치통감》을 접할 수 있으니, 고전의 대중화라는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자치통감》을 두고,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한 책이라고 폄하한다. 물론 오늘날에 기준으로 바라볼 때, 구시대의 흔적을 기록한 책이므로, 시대착오적인 사상이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이런 냉소론에 입각하여 고전을 바라본다면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고전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고전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관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교훈을 담은 불굴의 역작에게만 붙여지는 칭호가 '고전'이다. 《자치통감》은 동양의 최고지도자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읽어왔던 명저 중에 명저다. 이 책에는 동양 통치학의 정수가 녹아 있으며, 그렇기에 세종대왕과 마오쩌둥 등의 위인들은 항상 이 책을 탐독했고, 역대의 명 제상들과 정치가들도 이 책을 거울삼아 정치에 임했다. 그러니 사소한 결점을 트집 잡아,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사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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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의 남회근 저작선 1
남회근 지음, 신원봉 옮김 / 부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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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유명한 고찰과 명찰들을 탐방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8대 적멸보궁 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그렇게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전에 읽었던 《금강경》을 다시 펼쳤다. 사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에는 각기 방법이 있는데, 나는 관련된 텍스트를 모조리 읽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한다. 어떻게 보자면 먹물 근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짧은 인생이지만 평생 들여놓은 습관이 이 모양이니 바뀔 턱이 없다. 그래서인지 20대에는 나름의 커리큘럼을 짜서 독서하는데 몰두했고, 30대가 시작되자 손에서 책을 놓고 책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하나둘씩 경험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교 공부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사찰을 답사하며 실천적인 배움을 이어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집에서 불교와 관련된,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을 탐독하고 있다.

 

불교는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종교다. 비록 나는 종교가 없지만(!!), 내 아내와 장모님은 불심이 깊고, 나의 외할머니와 아버지 역시 불교에 심취하신 적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성장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탐구하게 된 것은 20대다. 지적인 욕망에 허덕이던 이때에 나는 불교에서 유명하다는 경전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읽어넘겼다. 귀중한 경전을 그저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앞서 허겁지겁 읽어댔으니, 경전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금강경》도 그 시기에 처음 접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경전, 그리고 대승 불교가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 중에 하나인 《금강경》을 나는 너무나도 얕잡아봤고,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나갔다. 아무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서 속 뜻은 자세히 몰랐지만, 그래도 안 읽은 것보다는 나았다. 덕분에 나는 불교에 기본적인 사상과 철학을 대충이나마 알게 됐다.

 

내가 불교를 다시 접하게 된 계기는 장모님 때문이다. 장모님의 지병이 깊어지면서, 근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괴로웠다. 그러나 어찌하랴. 병을 대신 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장모님 문병을 매일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러나저러나 답답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때 장모님이 불심이 깊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장모님의 쾌원을 위해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순례하며 각각 108배를 올리자고 결심했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유는 종교의 교리 안에는 답답하고 비이성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내 생각이자 오만일뿐이고, 종교에 귀의한 타인의 입장이나,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랬기에 성당에 가서도, 교회에 가서도, 절에 가서도 각각의 예절에 따라 예배를 올리곤 하였다. 아무튼 그런 비종교인인 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며, 108배를 올리고자 했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매우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물불을 가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교 명승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맹목적인 순례를 하기보다는, 순례를 통해 불교 철학을 단단히 배우는 기회로 삼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인 《금강경》을 다시 잡았다. 시중에 《금강경》을 번역한 책은 숱하게 많다. 유명한 스님이 번역한 책, 그리고 학자들이 번역한 책, 《금강경》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 등등... 워낙 중요한 경전이다 보니 해석한 책도 무더기로 많았다. 그중 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 사상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남회근의 《금강경 강의》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남회근의 고전 해석본을 애호한다. 남회근의 글은 다소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의 서술은 깊이가 있었고, 해석에 있어서도 신선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논어》를 읽을 때에도, 《노자》를 읽을 때에도 남회근의 책을 곁에 두고 참고했다. 《금강경》 역시 마찬가지다. 《논어》와 《노자》에서 느꼈던 기대감을 그의 《금강경 강의》에서도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금강경》은 대승 불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경전이다. 유교에 《논어》가 있고, 도교에 《노자》가 있고, 기독교와 가톨릭에 《성경》이 있고, 이슬람에 《코란》이 있다면, 불교에는 《금강경》이 있다. 그 정도로 《금강경》은 부처의 사상이 응축된 경전이다. 《금강경》의 에피소드는 매우 간단하다. 석가모니가 소탈하게 공양을 마치고 발을 씻고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제자인 수보리가 석가에게 묻는다. '수양에 관한 최고의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이에 석가는 수보리의 질문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수보리에게 답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금강경》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얼핏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는 에피소드지만, 《금강경》의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석가는 수보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을 다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타인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이다. 수보리의 질문은 이어진다. 어떻게 말입니까? 석가는 말한다. 현상을 초월해야 한다고, 희로애락 그리고 보이는 현상계로부터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마음 수양이 이런 단계까지 오르면, 그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인간을 괴롭히는 수많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이런 상태에 마음이 다다른다면,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굉장히 선문답 같은 해답이지만, 부처의 말은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부처의 마음공부법은 유교에서 군자가 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수양과 비슷하며, 도교에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무위자연으로 귀의하는 것과 흡사하다. 과거의 학문과 종교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럼 점에서 《금강경》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느껴지기보다, 마음공부의 방법론을 역설하는 보편적인 수양서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석가는 부처의 단계에 오른 인물이기에 뒤에서는 빛이 나며, 번쩍번쩍이는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금강경》에 나오는 석가는 그 당시 보편적인 사람들과 비슷하다. 소탈하게 공양하고 발을 닦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 이런 묘사는 권위 있는 종교의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소탈한 동네 아저씨의 이미지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부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경전이며, 그런 인간적인 부처가 수보리에게 마음공부법을 제시한 경전이다. 석가는 《금강경》에서 수보리에게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원하는 해답을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던지듯 강타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응축된 석가의 해답을 수보리는 잘게 씹기 위해 풀어서 다시금 질문한다. 그래서 이 경전은 불교의 다른 경전보다 짧지만, 내용은 굉장히 어렵고 깊다.

 

인간적인 모습의 부처가 제시한 마음공부법은 사실 쉬운 방법은 아니다. 현상계를 초월하는 마음의 경지. 누구나 다 그런 마음가짐을 꿈꾸지만, 우리는 늘 세속에 굴복한다. 먹고사니즘의 압박으로 돈을 탐욕하고,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색을 밝히며, 다이어트를 부르짖으며 한편으로는 탐식을 자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과연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최소한의 마음 수양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반성했다.

 

책을 읽으며 다시금 느꼈다. 불교는 유신론이 아니라 무신론의 종교라고, 물론 불교 세계관에서도 신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유일신을 경배하고 받아들이는 개념은 아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예배를 드려도 나 자신이 예수가 되거나 알라가 될 순 없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석가가 《금강경》에서 제시한 대로 마음공부를 열렬하게 하여 해탈에 경지에 오르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부처'의 탄생이다. 고로 불심을 발휘하니 내 마음을 다잡는데 성공한다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장모의 건강을 위해 108배를 한다 하더라도, 석가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는 나의 기도에 반응할지 몰라도, 석가는 나의 108배에 관심이 없다. 석가는 《금강경》을 통해 말했다. 너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라. 모든 것의 시작은 나의 마음에서 시작한다.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퍼트려라. 그럼 세상은 구원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지금까지 내가 순례하며 예배를 드린 것이 헛된 일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을 바꿨다. 이전까지 108배는 장모의 쾌유를 위해 빈 것이라면, 앞으로의 108배는 나 자신의 마음 수양을 위해 하겠노라고. 그렇게 수양을 해서, 불심이 깊은 장모에게도 좋은 기운을 나눠드려야겠다고.

 

《금강경》에서 석가는 말한다. 그 어떤 보시, 수억 만금의 보시보다도 더 값진 것은 《금강경》의 이치를 세상에 퍼트리는 것이라고, 이 경전의 핵심인 마음을 다잡는 법을 세상 만방에 퍼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불교에 경전에 대해 깊이 있게 논할 지식을 가지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에 대한 나만의 서평을 꼭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서평을 보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모를 때, 《금강경》을 읽어보라고. 이 책에서 석가가 이야기하는 마음을 다잡는 방법론은 특정 종교적인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관점의 마음공부법이므로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나 종교가 없는 분들에게도 마음 수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금강경》은 어려운 경전이지만, 서점에는 《금강경》을 쉽게 해설한 책이 많으니 살펴보고 알맞은 책을 선택하면 되겠다. 내가 리뷰하고 있는 《금강경 강의》도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이 쌓인 분들께 권하고 싶은 도서다.

 

 

책을 덮으며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장모님 불교 믿는다는데 《금강경》은 읽어 보셨어?",

"잘 모르겠는데?"

"그럼 당신은 읽어봤어?"

"나도 경전은 안 읽었지."

"이 사람아, 이 책부터 읽어봐. 참 좋은 내용이니까. 그리고 장모님한테도 문병 갈 때 읽어드려. 그럼 부처님이 분명 좋아하실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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