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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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평을 쭉 지켜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나는 베스트셀러를 좋아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는 독서 시장의 흐름이나 독자들이 선호하는 기호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 마냥 좋은 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홍보와 마케팅이 보편적인 시대인 만큼 베스트셀러 역시 질적인 내용보다는 과장된 광고, 자극적인 문구 등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알맹이보다는 껍데기가 화려한 속 빈 강정 같은 책들이 많다는 뜻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이하 지대넓얕) 시리즈를 처음 봤을 때에도 그랬다. 그저 그런 인문학적 지식을 파편적으로 나열해서 가볍게 설명한 입문용 책일 것이라고, 가볍고 얕은 인문학 개론서겠거니 하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지인이 구매한 책을 빌려서 봤는데, 생각 외로 내용이 괜찮았다. 저자는 어렵고 복잡한 지식들을 최대한 단순화하여서 설명하는데, 설명하는 방법도 소위 요즘 세대의 눈높이에 맞춰서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책을 조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려운 내용을 단순화하여서 쉽게 설명하는 것은 굉장한 노고와 실력을 필요로 한다. 수학으로 치자면 미분이나 적분 이론을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이럴 경우 가르치는 선생은 어려운 이론을 최대한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야 한다. 이토록 어려운 일을 저자인 채사장은 능수능란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책 서평에 앞서 우선 저자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채사장과 비슷한, 지적 소매상 포지션을 가진 작가들은 국내에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지적 소매상이라는 말을 앞세워 자신을 어필한 유시민이 떠오른다. 또 누가 있을까, 오늘날 인문학 열풍에 여러모로(?) 지대한 공을 일으켰던 이지성 작가도 떠오른다. 그 외 여러 인문학 작가들이 있지만 전범위적인 인문학 지식을 소화하는 작가, 그리고 밀리언셀러 작가라는 조건을 고려해보면 앞에 언급한 두 작가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먼저 유시민 작가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1세대 잡학다식 지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방면적인 지식과 해박한 논리, 그리고 위트 있고 재미있는 서술 등으로 고정 팬을 엄청나게 확보했다. 최근에는 알쓸신잡 등과 같은 통합 인문학 프로에 나오면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역사, 고전, 독서, 문학, 여행, 문화 등등 전범위적인 인문 분야에 책을 냈으며 정치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주관이 뚜렷한 작가다.


이지성 작가 역시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도서로 우리나라의 인문학 열풍을 선두 했다. 다만 유시민 저작과는 다르게 인문학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 책을 많이 발간했기에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첫 작품인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후 출간된 책에서는 반복되는 패턴, 그리고 얕은 깊이 등의 고질적 문제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독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등장한 채사장과 《지대넓얕》 시리즈. 채사장은 앞의 두 사람과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첫 번째는 숙성된 깊이와 단순화된 서술이다. 얼핏 봐서 채사장과 유시민의 저작은 인문학 개론서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심도 있는 깊이를 담고 있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서술 방법에 있어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다. 유시민의 저작은 글을 중점으로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반해 채사장의 《지대넓얕》은 서술이 단조로우며 그림 자료 등을 통하여 다방면적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텍스트 위주의 유시민의 설명보다는 그림을 곁들여서 단순화한 채사장의 설명이 훨씬 생생하게 와닿지 않을까. 두 번째로는 다루고 있는 지식의 범위다. 언급한 세 작가들 중 가장 다양한 범위를 소화하고 있는 작가는 채사장이다. 인문학을 넘어서 과학과 기술, 물리학과 우주, 종교 등등 책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는 무척 방대하다. 정리해보자면 《지대넓얕》은 방대한 지식을 다루는 종합 인문학서로, 바쁜 현대인의 흐름에 맞춰 각 분야의 지식의 고갱이를 추려 단순화하여서 쉽게 알려주고 있다. 타 소매상보다도 폭넓은 분야, 거기에 빠지지 않는 깊이와 단순화된 서술까지... 이런 다양한 장점을 가지기에 동종 인문 지식 소매상 가운데 채사장은 시대적 흐름에 걸맞은 탁월한 센스를 보여주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렇기에 나는 채사장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구해 보는 편인데, 이번에 나온 《지대넓얕 제로》 역시도 무척 기대가 됐다. 전작 1,2권에 이은 3권이 아니라 0라니, 이건 또 무슨 의도인 것일까. 굉장히 궁금했는데, 책을 완독하고 난 이후 이번 작 역시 굉장히 잘 만든 작품이고, 탁월한 기획이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제로라는 말답게 책은 《지대넓얕》 시리즈의 기본이자, 교양(인문학 + 자연학)의 기본을 다루고 있다. 다루고 있는 범위는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근세까지를 다루는데, 핵심은 바로 '일원론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자아'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의 전작인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와 《열한 계단》을 읽으면서, 채사장이 일원론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과 시각을 선호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번 《지대넓얕 제로》 편에서는 그런 일원론에 대한 시각을 구체화하고 깊이 있게 전개하고 있었다.


저자는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근세의 사상적 흐름을 차분하게 설명하는데 상이하고 이질적인 대륙에서 싹튼 위대한 사상들의 공통점을 깊이 있게 추적한다. 그 공통점은 일원론으로 내면의 자아와 외부의 세계가 떨어져 있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외부 세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얼핏 봐서는 처음 부분, 우주의 탄생과 문명의 탄생 이전까지는 인간을 강조하는 일원론과 관계가 없는 내용같이 보이지만, 팽창하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관찰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현대 물리학에서도 인간의 의식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후 세계 각지 문명에서 진리를 추구했던 사상 - 베다, 중국의 철학, 불교, 서양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관념들 - 을 재빠르게 살펴보는데, 상이한 사상들을 일원론이라는 관점으로 엮어서 설명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파편적으로 배웠던 인문학 지식들이 완전한 퍼즐처럼 하나로 완성됨을 느꼈다. 또한 내가 몰랐던 기독교나 힌두교, 그리고 물리학 지식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지만 특정 인문학 분야를 편애하는 나쁜 습성이 있는데, 저자의 말대로 좁은 세계관을 뚫고 다양한 세계관의 지식을 섭렵해야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채사장은 《지대넓얕 제로》를 책을 인문학을 처음 배우는 분들을 대상으로 저술했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책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점검하거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특정 지식이 가지는 의의, 개별적인 지식들의 연결고리 등등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새해를 따끈한 신간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책 읽는 시간 동안 매우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제목에 '얕은 지식'이라는 문구 때문에 책을 가볍게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여기서 얕은이라는 뜻은 방대한 지식을 단순화하였다는 뜻이지, 책의 깊이가 얕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나처럼 내용을 읽지 않고 제목만 보고 억측하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미 명성이 오를 대로 올라서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긴 하다만... 나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은 분들이나, 나와 외부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는 분들에게 강추하는 책이다. 물론 인문학에 대한 기본기를 쌓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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