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양장) -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4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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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나가기 전의 적막한 시간을 마음껏 느끼면서,

일찍 일어난 김에 생각해 둔 리뷰를 써 내려가보자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듣기 싫어도 듣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의미 있는 문학 고전이나 철학서들 등, 대체로 고전들이 그런 부류가 아닌가 싶다. <논어> 역시도 그런 책이다. 살아가면서 <논어>를 읽진 않더라도, 많이 들리는 책임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내게 있어 논어는 애증의 책이었다.  어린 시절같이 보냈던 외 할아버지께선 동양학에 조예가 깊으셨다. 난 어릴 때, 특별한 과외나 학원 교육을 받지 않았다. 대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짜증 나던 시간이 있었으니 외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동양고전 독서 시간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께선 나를 <천자문>부터 교육하려고 했었으나, 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타협을 했다. 즉 한자본 대신 한글 번역본으로 된 고전을 읽는 선에서 합의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명심보감>, <소학>, <동몽선습>, <예기> 등을 배웠다. 고백하건대 예기를 배울 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예기 책도 엄청 두꺼운데다 지루했으니깐,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자 할아버지께선 본격적으로 사서 삼경(주역을 빼고 예기 넣음)을 가르치셨다. 진짜 다시 한번 강조하며, 고백하건대 그 시간은 나에게 따분하고 의미 없고,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졸기도 많이 졸았었는데, 할아버지께선 끈기를 가지시고 나를 가르쳤다. 솔직히 초등학생이 뭘 알겠는가, 인성론에 대한 부분, 이상적인 도덕군자의 모습, 왕도정치, 군자... 그래도 그나마 편안하게 봤던 책이 <논어>였었다. 중학생 때까지 나와 함께 사셨던 외 할아버지는 중학생 때까지 나를 가르쳤다. 뭐 계속해서 듣다 보니, 괜찮았던 부분도 있었었다.

 

자왈,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 위정 편 중 -

 

중1 때는 나도 저 문구를 본 받아 공자를 본 받아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작심삼일이지만.. 아무튼 할아버지께서는 중 2 때까지 유가 경전만을 고집스럽게 가르쳤다. 중3 때는 내가 스스로 다른 제자서(보통 법가나, 종횡가, 병가와 같은 현실학적 사상)를 봤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정도로 할아버지께선 동양학을 고집하셨는데, 특히나 논어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셨다. (지금 고백하건대 그것은 정말 집착이셨다.)

 

 그래서 논어를 의도하지 않게 많이 읽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지 않아서, 사실 머리 안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었다. 오히려 중2 이후는,  병가 사상에 푹 빠져서 <손자병법>에 열독을 올리고 있었었으니.. 유가 경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리에 쓸리듯, 고리타분한 유가의 사상은 정말이지 역겨웠었다.

 

고등학교를 기숙사 학교에 배정을 받고, 할아버지께서 강원도에 집으로 내려가셨을 무렵, 나는 조용하게 나를 괴롭힌(?) 중학교 교과서와 논어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불에 태워버렸다. 특히나 논어가 타는 불꽃 속에서 나는 알지 못하는 희열감과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원래는 사서삼경을 다 태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까웠다. 그래서 나를 가장 괴롭힌 논어를 태웠었다. 그렇게 나와 논어는 작별했었다.

 

여느 20대 초반의 청춘과 같이 나 역시도 잉여의 시간을 보냈다. 공황적인 방황, 그리고 쓸데없는 반동 기질, 그러나 어느 것이더라도 행할 수 없는 무력감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고 있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리라, 그럴 때, 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 사건은 내게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할아버지께선 내 정신적인 지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내게 마지막까지 힘줘서 한 말은 <논어>를 본받으라고 하셨다. 그 일이 있던 뒤, 나는 논어와 화해를 했고, 가끔 읽어주고 있다. 

 

 나는 책에 대해서는 체계성을 가장 중요시한다. 특히 철학 사상 같은 책들은 체계가 잡히고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논어는 꽝이다. 논어는 체계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이다. 중구난방식의 구성, 이 주제를 말했다가 저 주제를 말하는 등, 전혀 체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볼 수 없는 마치 물과 기름이 뒤섞인 그런 책. 철학이란 학문이 그렇지 않은가? 물론 복잡한 형이상학적인 논리도 있지만, 궁극적으론 자신의 논리와 사상을 논리 정연하게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뭐랄까 마치, 마스터피스와 같은 그 깔끔한 논리성,

 

논어에겐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논어를 싫어한다. 하긴 그러고 보니 서양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의 대화편 역시도 중구난방이다. 한 대화 편에서도 이 주제 저 주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플라톤 대화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동양 철학도 마찬가지다, <관자>, <논어> 심지어는 <노자> 죽간본 조차도 중구난방이다. 선구자적인 위인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내가 생각하는 논리 정연한 철학은 후대에 완성된 관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논어에 비해 맹자가 더 논리 정연하고 유가를 아예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은 송대 이후니깐, 서양에서는 플라톤 이후 학문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적으로 학문을 분류하니깐, 

 

 하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해서 나쁜 책은 아니다. 체계성이 없다는 뜻은, 그나마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것을 뜻한다. 유가 경전을 두루 봐왔지만 논어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책은 보지 못 했다.(또 떠오르는 책이 <효경>이 있긴 하다.) 물론 논어에게도 복잡한 부분은 있다. 제사 형식에 대한 부분과, 가장 문제 되는 것이 공자와 그 주변 인물, 제자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제사 형식에 대한 부분은 지금에 와선 별 의미가 와 닿지 않아서 그냥 대충 읽어도 될 듯싶고, 주변 인물 역시도 솔직하게 말해서 몰라도 된다. 그냥 텍스트에 집중해서 논의만 따라가도 논어 독법은 성공이 아닌가 싶다.

 

서양과 비교를 해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논어>에 비견되지 않나 싶다. 근데 솔직하게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좀 논의 전개 방식이 좀 어려운 편이다. 그에 반해 공자의 <논어>는 뭐랄까 그냥 읽어도 읽을만하다. 이것이 논어의 큰 장점이 아닐까,

 

 내가 볼 때 공자는 성현임엔 틀림없지만, 뭔가 모순적이고 불쌍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특히 모순적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점은, 확실히 논어 어디를 봐도 말 잘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말을 잘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동양의 명언들은 죄다 공자가 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공자는 말을 엄청 잘 하는 달변가다. 그런 공자가 <논어>에 남겼듯, 언어를 잘 하는 것보단 행동을 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공자는 <논어>를 남기지 말았어야 했단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리뷰에서 봤던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러셀,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 물론 게으름이라는 뜻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게으름이 아닌, 산업 사회에서 의미 없이 부품처럼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유를 가지라는 뜻으로 게으름을 찬양했었기 했지만, 나는 그 제목에서 나타나는 느낌으로는,  참 모순적이라 느꼈다. 러셀 자신은 엄청 노력파였고, 열심 파였으니까,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공자의 언어에 대한 관점이 모순적이듯, 유가 사상 역시도 모순적이다. 확실히 유가사상은 동양 사상의 뿌리를 만든다. 실제로 우리는 유가사상을 이상적인 사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초기 유가는 현실론적 사상이다. 대체로 중국의 사상사는 남방 계통의 도가 사상과 북방 계통의 유가와 묵가 사상이 주류를 이뤘다. 남방은 아무래도 북방에 비해 평화롭고 기후도 덜 추우며,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이상적인 도가 사상이 발전했다, 북방에서는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과, 전쟁이 주류를 이뤘고, 기후적으로 추웠으며, 엄격한 분위기와 엄숙한 분위기가 요구됐다. 거기서 체계적인 위계질서와 도덕을 강조하는 현실론적인, 유가사상이 발전했다. 그리고 여기에 반발하는 사상이 묵가 사상이었다. 도가는 이 때까지만 해도 사이드 사상이었으며, 공묵의 시대에서 결국 이긴 것은 유가였다. 통치자가 보기에도 보수적이고, 위계를 강조하는 유가가, 반골의 기질이 다분한 묵가 사상보단 더 유용했으니깐,

 

 그런 현실론적인 입장에서 출발한 유가는 세대가 거듭할수록, 형이상학적으로 바뀐다. 도덕군자에 대해 너무 이상론적인 관념을 제시하고 따르라는 종용은 내가 볼 때, 거의 종교적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나온 사상이었으나, 속을 보면 인생의 실패자인 공자의 정신승리적 이상론이 바로 유교였다. 그리고 그 모순의 중심에 선 것이 <논어>다.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죽어서 성현이 된 그는 어찌 보면 참 불쌍한 인생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플라톤도 마찬가지고... 선구자적인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아닐까...

 

나는 고전을 추천할 때, <논어>, <군주론>, <손자병법>을 추천한다. 내가 생각하는 고전은 너무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비교적, 현실론적이여야 하며, 대체로 언어가 간결해야 하며, 배경지식이 없이도 이해가 가능해야 하며, 비교적 분량도 짧아야 한다. 그랬을 때는 위의 3개로 좁혀졌다.(노자도 넣고 싶은데 솔직히 노자는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뺀다) 물론 위의 3가지 책이 내가 요구하는 조건을 다 만족시키진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근접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손자병법>은 대체로 군사에 대한 책이지만, 심리학적, 경영적, 철학적으로 여러 시각으로 책을 볼 수 있다. 책 자체도 분량이 얼마 되지 않으며, 언어적 표현 역시도 아름답다. <군주론>의 경우 인간의 악적인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책이다. <한비자> 역시 훌륭한 책이나, 분량 면에서 봤을 때 <군주론>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것에 반대되는 인간의 이상론적인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낸 책은 <논어> 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읽겠다면 추천은 하되,

굳이 <논어>를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읽을 가치는 있는 듯싶다. 어쨌든 <논어>는 동양 사상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동양에서 발간된 '가장 오래된 자기 계발서' 란 점도 있으니깐,

이 책을 덮고 나니, 이젠 기억에서 흐릿흐릿했던 할아버지의 육성이 선명하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논어>에 있는대로만 살아도 어긋나지 않을거다.'

 

다만 그게 힘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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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 / 어드북스(한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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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저자 : 황윤

쪽수 : 461쪽

출판사 : 어드북스

가격 : 18000

 

 한국사의 전쟁영웅 중, 가장 대표적인 장군은 이순신이다. 우리는 국가적인 성웅으로 이순신을 추앙하고 있으며, 이순신을 다룬 강연이나, 책, 자기계발에 응용 등, 여러 가지 범위로 확장해서 이해를 하고 있다. 확실히 이순신은 임진전쟁 때 국가적인 성웅이였었다. 그런 이순신과 함께 거론되는 장군이 김유신이다. 이름 말미에 신자가 같아서 묶어 외우기도 편하다. 그러나 이순신과는 다르게 김유신은 덜 유명하달까? 김유신을 주제로 한 강의나 책들은 전무하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만 보던, 김유신은 크면서 점점 잊히는 장군이었다. 최근 고구려 사관이 열풍을 불어, 신라는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특히 그 중심에서 비판받는 사람은 무열왕도 문무왕도 아닌 김유신이었다. 물론 이순신 역시 국가적 성웅으로 너무 추앙시켜 국가주의의 표본으로 삼기도 했었지만, 김유신은 전혀 다른 입장이다. 대체로 이순신이 너무 추앙을 받았다면 김유신은 양날의 검과 같이, 극단적인 추종과, 극단적인 비판을 가진 영웅이었다. 어릴 때에 항상 위인전집에 같이 있었던 이순신과 김유신, 그러나 그런 김유신의 삶을 조명하는 책은 만나보기가 힘들었었다.

 

이 책은 그런 김유신에 대해서 조명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오프라인 교보에서 만났다. 신간 코너에 있어서 눈에 들어와서 별 기대 없이 책을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게 내용을 풀고 있었다. 이 책은 크게 이런 장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유신을 다룬 역사서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가 있다. 여기서 <화랑세기>는 솔직히 학계 간 논쟁이 치열하여 아직까지는 사료적으로 쓰기엔 조금 조심스러운 감이 있다. 하지만 기존에 출판된 김유신에 관한 책들은 하나같이 다들 <화랑세기>에 입각한 서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재 김유신에 관한 평전은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까치에서 나온 <김유신 시대와 영웅> 이란 책이며 두 번째가 조선일보에서 나온 <김유신 무덤에서 뛰쳐나오다> 라는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책이 이 책인데, 나는 3권의 책을 다 가지고 있고 다 봤었다. 개인적인 비평을 해보자면 <김유신 시대와 영웅>은 출판사가 까치라서 굉장히 기대를 하고 샀었으나 엄청 실망을 했다. 저자는 언론계 출신이었다. 내용 면에서는 <화랑세기>를 진서로 규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특히 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발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저자는 발해가 우리나라 민족이 아닐 수도 있고, 남북국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대목을 보며, 나는 저자의 사관 의식이 의심되기 마련이었고, 결국 이 책을 덮어버렸다.

 

두 번째 책인 <김유신 무덤에서 뛰쳐나오다>는, 사기에서 인용문이 나왔는데,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사실인 것 마냥 기록했던 부분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사기 열전과 본기까지 뒤져 가며 그 인용문이 맞는가를 확인했는데, 저자가 틀렸었다. 여기서 신뢰성을 잃었으며, 더불어 더 실망했던 점은 점점 읽으면 읽을수록 정치적인 색깔이 다분하게 드러나는 대목들이 거슬렸다. 물론 평전과 역사서는,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쓴이의 주관적인 입장이 당연하게 포함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래도 가치 중립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인물에 대한 행적 등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 공유할 순 있어도, 그걸 넘어선 오늘날의 사회 비판을 적나라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도가 지나쳤다. 그건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역시도 덮어버렸다.

 

두 권의 책은 이제 구하려야 해도 구할 수도 없다. 절판된 책이니까. 기존의 김유신 평전들에게서 실망감을 얻은 나에겐, 김유신이란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잊히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찰나 이 책을 발견했다. 일단 이 책의 저자는 무명의 작가다. 황윤이라는 분이 썼는데, 책에 약력이 없다. 다소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는데, (워낙 김유신 평전에 당한 게 많으니깐) 예상 외로 보물을 건진 기분이었다. 저자는 <화랑세기>의 기록은 저술하지 않으며 오로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정사들을 기준으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학계에서 검증이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편향되지 않는 시선으로 그 시절 김유신에 대한 소상하고도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 시절에 대해서 배경 설명과 국가적인 입장 등을 고려하며, 조곤조곤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김유신에 생애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으며, 그의 내면의 생각까지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보통 신인 작가들이나, 재야 사학자들의 경우는 감정적인 국수주의에 의거하여,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고, 담담하게 공인된 사서들로만 김유신의 생애를 풀어낸다. 이 책은 앞의 두 책들의 아쉬움을 일거에 날려버린 책이었고, 신인이자 무명작가가 객관적 관점을 가지고 썼다. 신인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역사적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저자에 객관적 태도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더구나 내용 역시도 허접스럽거나 허술하지 않아서, 이 책의 가치가 빛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은, 아름다운!! 편집적 구성이다.

 

평전과 역사서를 자주 읽어와서 아는데, 사실 평전의 가장 큰 적은 지루함이다. 대체로 평전의 구성은 글이 압박적으로 많다. 거기다 쪽수도 거의 400쪽은 기본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기존 평전류의 단조로움을 탈피하려고 애를 썼다. 책에는 간간 삽화가 있는데, 저자의 친구인 만화가가 이 삽화를 정성스럽게 그려냈다. 책과도 썩 잘 어울리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글을 읽다가 그림을 보는 재미도 선사한다. 더불어 저자 역시도, 한 챕터가 시작되는 부분에 흥미를 유발시키려고, (이 책은 초년기, 중년기, 원숙기, 말년기로 구성됐다.)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보여준다. 과도하게 길지 않고 3~4장으로 도입부만 장식을 한다. 과하지 않을 정도로, 애피타이저와 같은 깨알 같은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하고 배려하는 부분은 기존의 무거웠던 평전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시도였다.

 

또 하나의 장점을 굳이 말하자면, 독자가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이 책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는 점이다.

 

그냥 보통, 삼국시대에 신라가 통일했고 김유신이 앞장서서 통일했다. 이 정도의 무난한 지식만 가지고 있더라도, 이 책은 상세하게 배경 설명과 필요한 지식들을 조곤조곤 알려준다. 기존의 국내에서 사학자들이 쓰는 평전들은 대부분 이런 난이도 조절에 실패를 한다. 너무 학구적인 범위와 대중적인 범위의 설정을 잘 못 하여서 일어나는 일인데, 저자는 탁월하게, 그 둘 사이를 친근하게 잘 풀어낸다. 무거운 역사 책이나 평전에 흥미가 없었던 사람들도, 편안하게 책을 독서할 수 있는 데다, 깊이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점도 존재하는데, 가장 큰 아쉬운 점은 지도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유신이 진격을 할 때나 여러 가지 군사들이 이동하고 공격하는 부분을 서술상으로만 나타내는데, 지도를 활용해서 설명한다면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참 아쉽게 느껴졌다. (이 책에는 지도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특히나 김유신이 처했던 현실적인 상황들, 서라벌 출신이 아닌 변방 출신, 거기다 가야계와 신라 왕족의 피가 섞인 모순적인 존재, 보이지 않는 차별 등을 조곤조곤 분석하며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베타적인 신라 사회의 귀족주의에 안타까움을 느꼈으며 (어느 고대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러한 차별들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오류는, 김유신이 왕가의 핏줄이라서 출세가 빨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김유신이 낭비성 전투에서 앞장서서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을 때가 35살이다. 이때 군의 사령관도 아닌 아버지를 수행하는 역할로 출전하는데, 고대의 나이로 본다면 출세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더불어 이 전투를 끝으로 김유신은 48살에 압량주(경산) 군주가 되기 전까지의 세월은 사서에 기록조차 없다. 이 10년에 걸친 시간 동안 김유신이 공적을 세웠다면 사서에 기록이 분명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에서는 낭비성의 영웅을 중용하지 않은 듯싶다.

 

 김유신은 언제나 스스로 앞장서서 싸웠다. 첫 전투인 낭비성 전투에서 스스로 옷깃과 벼리를 칭하며 자살특공대로 돌격을 하여, 사기를 끓어올린다. 그래서 당시 최강인 고구려군을 무찌른다. 그 뒤 김유신은 자신의 경험했던 것처럼, 전투에서는 항상 사기를 세우기 위해 부하의 희생을 종용했다. 특히 황산벌에서는 자신의 조카인 반굴과 김품일의 자식인 관창을 희생시키며 진군했다. 적장 계백도 가족을 다 죽이고 전장에 나섰다. 극도로 비정한 처사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부른 비극적 선택이 아닐까.. 전장에 나서서 장군은 패배할 수 없으니까, 쓸데없는 인도주의에 휩싸이는 것만큼 장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김유신은 병법을 잘 알고 있었고, 희생을 통한 사기진작의 심리전에도 능한 장군의 면모가 보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선택임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을 하는 김유신 역시도 개인적으론 마음이 아팠으리라,

 

사회적인 차별과, 무시에 능숙하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잘 알았던 김유신은, 나당 연합군에서도 무시를 당한다. 나 역시도 김유신에 대해서 극단적인 권력지향적 모습의 편견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유신을 당나라의 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김유신은 나당 연합군에 불평등한 부분에서 항거한다. 그는 당나라의 은밀한 회유에도 신라에 대한 지조를 지켰으며, 당나라의 불평등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대놓고 분개했다. 당시 중국은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런 당나라에 꿋꿋하게 항거하는 김유신의 모습을 보며, 세간의 평가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을 쓴 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앞으로 저자의 저작 역시도 기대된다. (무명인 저자를 격려하고자 했던 의도도 있었다.)아마도 이 책의 저자 역시도 글을 써가면서, 김유신의 길었던 무명시절을 본받았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고, 차별이 있고 성공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고대의 차별보다는 더 개방적 사회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꿈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에 책 보호지를 씌웠다. 책이 그 만큼 마음에 들었고, 나 역시 김유신을 본 받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을 통해 김유신 평전에 대한 두 번의 실패와, 긴 기다림을 한 번에 보상받는 쾌감을 느꼈다, 더불어 이 책을 일독하면서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고 ,깊이 있고 ,유익한 영웅을 만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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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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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상실의 시대> - 원제 <노르웨이의 숲>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 민음사

쪽수 : 495

 

*. <상실의 시대>라고 썼지만, 사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한국에선 <상실의 시대>가 익숙하여 올렸습니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나는 기숙사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밤마다 내 룸메이트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누워서 뭔가를 봤다. 궁금하던 차, 룸메가 보는 책을 보니 <상실의 시대>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그 친구에게 어떤 책이냐고 물어보자, 완전 광신도처럼, 청춘의 상징, 방황하는 영혼의 어쩌고 하며 추켜세웠다. 당시 내 좁은 안목으로는 그저 여자들이나 관심 가질 만한 시시한 연애 이야기로 치부하고 그 친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세월은 지나 20대 초반, 짝사랑하던 여자가 자취를 하기로 했고, 이사를 한다고 도와달라고 했었다. 어장관리 호갱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짝사랑을 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사를 도와줬다. 짐을 다 옮기고, 정리가 끝나고, 청소가 끝나고, 그 아이와 나는 점심을 중국집에서 시켰다. 그 배달 오는 시간 동안 초조하고 뭔가 말을 리드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안절부절 못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마침 <상실의 시대>가 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난 이때까지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고딩때와는 다르게,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인지하고, 대충 내용 정도는 알았다. 그 친구도 가장 좋아하는 책이 <상실의 시대>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식사가 올 때까지 계속됐고, 나의 어색한 초조함을 한 번에 제거했었다.

 

  두 번의 하루키와의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점도 있다. 아무래도 하루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뭔가 방황하는 청년이라면 하루키를 읽어야 할 것만 같은, 강요받는 압박이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참 싫었다. 뭔가 하루키를 들고 다니거나 알지 않으면, 방황하는 성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 거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그 당시 문학보단, 사회나 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나의 방황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은 철학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렵고 사변적인 철학책을 붙잡고 답을 갈구했었다.

 

  그런 하루키를 이제야, 만나게 됐다. 참으로 오래 끌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영화도 봤었기 때문에 대체적인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대체적으로 인물 간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다. 스토리는 정말 간단했다. 어느 누구나 겪을 법 했던 대학생들의 방황 이야기를 현실적인 시대적 묘사와, 조금은 과장적인 인간관계들의 조화, 두 가지 측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포커스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배경 묘사에 대해서 정말 공감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머무는 기숙사의 환경은 마치, 평범했던 남자아이들의 기숙사 생활을 떠올리게 했고, 심지어 자취했던 추억마저도 떠올렸다. 거기다 어느 대학에서나 있는 기득권과 운동권의 대립적인 이야기, 알코올에 취한 주말의 거리 등등..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기즈키라는 절친이 있다. 둘은 고등학교에서 만났으며,기즈키의 여자친구인 나오코와 셋이서 그렇게 추억을 쌓아왔다. 그러니 기즈키는 자살을 하게 되고,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도쿄로 대학을 가게 되고, 기숙사를 가게 되고, 그리고 나오코를 다시 만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을 확인할 무렵, 나오코는 병의 치료를 위해 와타나베를 떠난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라는 선배와 함께, 채워지지 않는 방황감을 여자들과의 미팅과 원나잇으로 풀고 다닌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와타나베에게는 미도리라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치료받는 곳으로 가서 나오코와 나오코의 지인인 레이코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와타나베는 갈등한다.연애의 밀당을 주고 받는 미도리와의 관계와 순애보적인 나오코와의 관계를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모호하지만 분명한 주제를 나타내며 마무리 짓는다.

 

  책을 읽으며 와타나베에 공감했던 부분이 있다. 첫 번째로, 외동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외로움에 대해, 어느 정도 내성을 지닌 그의 내면에서 나와 비슷한 면을 봤었다. 두 번째로, 스스로 평범하다는 설정과, 튀지 않고, 순응적인 부분, 그리고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그의 정신관을 보며 깊은 공감을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외골수적인 부분이다. 나도 그와 같이 한 곳에 빠지면 깊이 있게 알아나가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은 아예 신경을 꺼버린다. 이 부분은 와타나베가 사회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그가 좋아하는 취미마저도 닮았다. 수영, 독서, 음악 듣기...

 

  그러나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의 설정을,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끌 수 있는 인물로 설정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설정은 이 소설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대중이 깊이 빠져드는 이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범한 주인공이지만 역시 소설은 소설이다. 그의 인생은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평범하지 않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 그리고 첫사랑인 여자와의 떨어진 정신적인 사랑,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은 적극적이고 음란한 이야기를 하며, 대시를 하는 미도리와의 우연스러운 만남,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판타지적으로 열광할만한 매력을 지닌 나가사와 무려, 헌팅률 99%에 달하는!! 그의 능력(나도 이런 선배 좀 있었으면 했다.)... 주인공의 모습과 배경이 현실적이고 친숙하게 다가갔다면, 작가는 인물 간의 설정과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절묘하게 잘 섞어놨다. 이 절묘함이 한 쪽으로 지나치면 위화감이 조성되고 싸구려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루키는 적절하게, 그리고 아름다운 언어로 잘 조화시켰다.    

 

 기즈키와 나가사와는 주인공의 남자 인연의 두 축을 이룬다. 둘 다 뛰어난 인물이지만,

기즈키는 그 뛰어난 역량을 와타나베와 나오코와의 관계에서만 발산한다. 나가사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매력을 한 쪽으로 집중시키지 않고 확산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소 거만하고 무례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거기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의 기본적인 시각 차이도 나타나고 특히나 가장 돋보였던 부분은 나오코를 둘러싸고, 죽은 기즈키와 와타나베의 대립이 눈에 들어왔다. 대답 없는 기즈키에게 와타나베는 책임지지 못한 그를 원망하면서도 자신은 삶을 선택했고 나오코와 같이 살아가겠다는 책임을 역설하는 부분에서, 남자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여자들과의 인연도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가장 중심이 되는 나오코와 미도리, 둘은 성격도 다르고, 발산하는 매력도 다르다.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사랑은 죽음을 상징하듯, 어둡고 암울한 암시를 계속해서 나타나는 반면, 미도리와의 사랑은 생명을 상징하듯, 발랄하고 현세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나오코의 회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소설의 끝은 미도리의 전화로 끝이 난다. 이것은 결국 처음에는 슬프고 방황하는 인간이더라도, 삶을 선택한 자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인생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 만 같았다.

 

  인물들이 다양하고 개성 있게 나오는데 가장 큰 공통점은, 정상적인 인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등장인물이 다 부정확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보일 법한, 아무 부러움이 없을 것만 같은 엄친아 나가사와조차도, 그 자신의 무례함과 오만함, 뒤틀려버린 힘의 논리에 굴복한 모습, 광적인 일그러짐 등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상인이 아닌 나오코와 어울리는 정상적인(겉으로 보기엔) 와타나베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 역시 청춘의 시기에 들어서면 불완전한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청춘의 방황엔 어떠한 모습도 어떠한 해답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숙명론적인 관점도 보이는 듯했다.

 

  이 책의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음악인 노르웨이의 숲을 땄다. 극중 나오코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레이코가 기타로 치던 음악. 네이버 지식인에 알아보니 이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은 1960년대에 극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 부산물인 프리섹스, 마약, 알코올 등으로 점친 그 시대의 덧없는 사랑을 노르웨이의 쓸쓸한 겨울 숲에 비유해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처럼, 혼란스러운 학생 운동 시기와 더불어, 방황하는 청춘, 그리고 방황하는 사랑 관념 등의 부분들과 얼추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노래 가사에서도 나오듯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나는 혼자였어.')

 

 라는 이 대목은,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상실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굉장히 즐겁고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일본 소설 특유의 가벼움, 그러면서도 잔잔한 분위기, 거기다 평범한 주인공과 현실 속에서의 기묘한 만남이 주는 조화, 등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많았다. 특히 어떻게 묘사하면 굉장히 외설적이고 상스러운 부분까지도 하루키는 그 특유의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예전 모습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청춘의 모습은 , 미도리와 같은 그런 자극스러운 말을 하며 적극적이게!! 다가오는 여자도 없었고, 엄친아 나가사와와 같은 구세주(?) 도 없었지만... 아마 와타나베와 같이 방황하고 길을 잃은 모습만큼은 일치했었다. 그리고 이런 방황의 모습은 정도가 다르겠지만 어느 청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춘들은 이 소설에서 자신의 방황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 편의 수채화를 본 느낌이다.

가볍게, 하지만 즐겁게, 부담 없이,

그러면서도 회상에 잠길 수 있게,

 

다만, 작가가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죽음이라는 부분에서, 뭐랄까, 과한 부조화를 느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즐거웠던 독서인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숙사에서 동창이 생각난다.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틀며, 그 친구의 페이스북에 가서 오랜만에 글을 남겼다.

 

'이제야, 나도 <상실의 시대>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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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제목 : 인간실격

쪽수 : 267

출판사 : 시공사

가격 : 9500원 

 

 

*. 책의 구성은 인간실격 외, 여러 단편들 수록집인데, 여기서는 인간실격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텍스트나 작품을 읽을 때, 나는 최대한 객관적인 마음과 비평적인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쓸데없이 과도한 감상주의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요소로 적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책을 읽어나가는데, 그게 쉽지 않은 책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책이 나에게 너무 어렵거나, 흥미가 없거나 와 같은 경우가 있고, 반대로 나도 모르게 작품에 동화되어 비판적인 사고의 끈조차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인간 실격>은 나에게 있어서 후자에 작품에 속했다. 나는 이 책을 붙들고, 꽤나 오랜 시간을 끌었다. 사실 분량만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책인데도, 계속해서 끊어서 읽다가, 3번째 수기를 접하는 순간 그 거부할 수 없었던 무언가의 필력에 사로잡혀, 단숨에 책장을 넘겼었다. 책을 다 읽고 만화책인 김전일을 보는데 만화가 집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책의 후유증은 강대했다. 결국 보던 만화책을 덮고 단숨에 2독을 속독으로 마쳤다.

 

 이 작품 역시도 전에 리뷰를 했었던 <몰락하는 자>와 너무나도 닮은 책이었다. 제목의 상징성, 그리고 부정적인 세계관, 의식의 흐름의 기법 등으로 많은 부분이 비슷한 소설이었다. 소설의 스토리도 아주 간단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소설은 구성적으로 액자식 구성을 사용하고 있다. 서두의 1인칭 화자는 독백적인 어체로 담담하게 사진 3장을 묘사한다. 어느 소년의 어릴 때의 사진- 여자들이 많은- , 그리고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의 미소년의 사진, 마지막은 백발의 머리의 무표정한 특징 없는 사람의 사진에 대해 묘사한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이 바로 주인공인 '요조'의 사진으로, 각 사진들의 상징적 의미는 요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게 만들어줬다.

 

첫 번째 수기로 넘어가면, 첫 번째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본격적인 소설이 시작된다. 이때 소설의 화자는 요조를 1인칭으로 내세우며,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 적용된다. 대체로 1장에서는 어릴 때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배경이 지방 부호의 막내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설정이다, 핵심적인 부분은 요조가 세상에 대해서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조는, 마음으론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과 의문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완벽하게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연기를 하는, 기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함과, 일상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는 시작했으므로, 거부감 없이 볼 수 있었다. 특히 1장에서는 앞으로 요조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암시하는 부분이 나오며 독자의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두 번째 수기는 역시나 두 번째 사진 시기를 설명하는데, 요조에게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자신의 집을 벗어난, 청춘기(고등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슬슬 이 수기에서부터 인간의 추악성을 조금씩 선보이기 시작하는데,  고등학교 청춘들이 겪을 만한, 이성에 대한 사랑과, 평생의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우정, 그리고 시대적인 반항을 그리고 있다. 잘 생긴 외모의 요조는 여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호리키라는 친구 같지도 않은 친구와 만나게 된다. 그 뒤 사회주의 사상에 빠졌다가 운동 자체에 실망을 하고, 도피하듯 도망 나온다, 부정적인 사고관으로 방황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쓰네코라는 유부녀와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지만, 여자만 죽고 요조는 살아남는다.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세 번째 수기는, 그동안 절제했던 작가의 인간에 대한 추악성과 부정적인 내면 심리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기가 물 풍선에 물을 넣는 작업이었다면, 세 번째 수기는 그 물 풍선을 유감없이 터트리는 장이라고 느꼈다. 만화가라는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애가 있는 여자를 알게 되고, 그 여자에게 경제적으로 의탁하기 시작하면서, 그 모녀의 생활에서 어울릴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 요조는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결국 방황하는 삶을 살고, 알코올에 중독되는 삶을 산다. 그런 요조에게 삶의 희망을 가지게 해 준 요시코라는 연하의 여자, 그녀와 요조는 결혼을 하게 되고 요조는 희망을 가지고 소시민적인,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요조는 요시코 역시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준, 절대적 순수를 상징하던 요시코가 상처를 입자, 정신적인 충격과 정신적인 방황으로 요조는, 알코올 중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결국 그 알코올 중독을 마약으로 대체한다. 구제할 수 없는 요조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그 뒤, 큰 형의 힘으로 풀려나와서, 결국 폐가와 같은 집에 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요조는 이 때 27살을 앞둠에도 불구하고 흰머리가 늘어 마흔 대에 사람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작품의 비극성을 더욱더 심화시키고 있었다. 메인 이야기였던 액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후기로 넘어간다.

 

후기에서는, 서두의 화자가 등장하며, 이 3가지의 수기와 사진에 대한 배경 설명을 끝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은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 소설이다. 그런 성격인 만큼, 주인공인 요조는 다자이의 인생 그 자체를 축소시켜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다자이는 주인공 요조와 거의 흡사한 인생 - 대지주의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점, 사회주의 운동에 잠시 가담했다는 점, 실제로 여인과 함께 바닷가에서 동반 자살 결과 여자만 죽고 자기는 살았다는 점,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점, 그 사이에 아내가 배신한 점- 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자전적인 기록에 적절한 허구를 붙여서,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간에 대한 부조리를 한없이 내보이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몰락하는 삶>에서 비판하는 것과는 비교해볼 수 있는데, 몰락하는 삶에서 베른하르트는 크게 두 가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상은 배경적 비판으로, 그리고 그와는 별개적으로 인간의 내부적인 부분은 광기적인 질투와 경외를 비판으로, 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비판이 조율되어서 극한의 웅장하면서도 엄중한 비극적 분위기를 도출하는데, 다자이의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다자이 역시 당시 시대의 일본 사회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를 비판하면 비판할수록 인간 내부의 심리를 극한까지 파고들었다. 

 

 사회가 부정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더욱더 내면적인 인간의 부조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은 이상적인 다자이. 그러나 그 이상적인 사상 만으론 극복할 수 없었고,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부조화에 대해 다자이는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였다. 그 결과 사회주의 운동의 참여와 그 운동의 실패로 인해 길을 잃은 다자이의 모습은 소설 내에 요조를 통해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다자이는 적극적인 사회적 개입보다는, 내면의 심리의 부조화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다자이의 문학은 그런 면에서 상승 지향적인 성격(외향비판적, 출세적, 이상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하향 지향적인 성격의 문학(내면의 깊숙한 모습을 끝까지 파고드는)이라고 평하고 있다. 주인공 요조는 결국 3류 만화가의 인생을 걷고, 그 만화도 나중에는, 공허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자이 역시 <인간실격>을 쓰기 전, 여러 가지 다작을 했었다. 그는 정신병원을 다녀온 뒤, 새로운 사람이 되어 여러 가지 작품들을 발표했고, 성공했다. 시대적으로 전쟁에 패배하는 일본의 사회상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관을 정립해나간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런 다자이가 외향적 가면 내부에선 평생을 준비했던, 한 방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자전격 소설의 <인간 실격> 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연인과 함께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작 활동을 한 다자이는 독자를 위해 보여주기 위한 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한 내면적 자괴감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공허함의 표현을 <인간 실격>에서 3류 만화가로 지칭한 요조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의 형식적인 면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수기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으나, 세 번째 수기로 가면 갈수록 비극의 강도는 극적으로 높아진다. 마치 <인간실격>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다자이의 집념처럼, 세 번째 수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수기를 합친 양보다도 더 많을뿐더러, 더욱더 비극적이다.

 

<몰락하는 자>와는 다르게, 이 소설에서의 배경은 특별한 비판적 상징 없이, 음울한 분위기만을 조장해주고 있다. 그리고 액자 내부의 이야기에서 요조는 극존칭과 존대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데, 이런 기법에서 나는 처음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갔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기묘하고도 괴이한 느낌과, 잔잔한 공포감마저 느꼈던 것 같았다. 비교하자면 <몰락하는 자>는 웅장함과 거창한 비판이라면, <인간 실격>은 잔잔하면서도 피를 말라 죽이듯 비판하고 있달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그런 느낌?

 

보편적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요조의 행위는 절대 용서할 수 없고, 그의 사상 자체도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다자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요조의 마음에 동화되기 시작하고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내면에 잠든 또 다른 이타심이란 부분이 다자이의 소설을 보는 순간 응답하고, 그 마음이 커지면서 인간 본연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소설에 공감하게 만드는 기묘한 마력. 이게 바로 다자이의 힘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인간의 내면적 부조화의 모습, 그 자체를 극한까지 폭로하며 이겨내고자 한 다자이. 그런 그가 아니면 감히 '인간실격'이란 단어를 붙일 수 없었으며, 이런 소설을 쓸 수도 없다. 단언컨대 한 평론가의 말처럼, 다자이는 '인간실격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틀림없었다.

 

이런 마력을 지닌 책이라면 독서에 취미를 잃거나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쉽게 빠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리뷰를 마치고, 책을 권해달라는 지인들에게, 조용하게.. <인간실격>을 권했다.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이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만큼 나에겐 굉장히 매력적이었던 작품이었고,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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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최근 역사서와 평전, 철학서만 줄곧 읽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왔었다. 특히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1 독한 뒤로 멘탈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문학으로의 도피를 생각했고, 추천받은 도서가 <몰락하는 자>와 <인간실격> 이였다. 오늘의 리뷰는 <몰락하는 자>에 대해서 써내려가볼까 한다.

 

 일단 이 책은 2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 번째로 배경적인 상황은 디스토피아 사상(부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술상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서사적 흐름이 아닌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내겐 이 책은 쉽게 읽혔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는 저자의 생각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읽기 시작하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배경과 여러 음울한 분위기 역시도 책을 몰입시키는데, 공헌했었다. 쉽게 읽히지 않는 법 역시도 이 소설 내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있었다. 일단 나의 경험으로는, 주말에 즐겁게 책을 일독했었는데, 개인 사정상, 토, 일요일을 친구와 약속으로 인해서, 책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월요일 책을 다시 보는데, 책에 몰두하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었고, 특히 이 책의 서술상 특징이,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한 번 집중력이 끊어지면, 다시 몰두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는 점도 있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나'와 인간의 절대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글렌 굴드' ,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메인인 인물 몰락하는 자를 상징하는 '베르트하이머' 이 셋의 이야기다. 다른 외국 소설들과 다르게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이 3명의 인물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스토리는 진행된다. 나와, 글렌, 그리고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당시의 부유층 출신이며 재산이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 설정되어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음악에 미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집안으로부터 도피적인 선택과 반항적인 선택으로 음악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은 잘츠부르크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 수업을 하는 모차르테움에서 거장 호로비츠의 수업을 같이 듣게 된다.

 

 셋 모두, 공통적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굉장한 재능을 보여줬었으나, 글렌 굴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으며, 천재적인 모습에,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경외감과 상실감이란 애증의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두 주인공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나는 철학의 길로 도피를 결심했으며, 베르트하이머 역시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 뒤, 베르트하이머는 점점 몰락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의존하던 여동생에게 버림받고, 글렌 굴드의 죽음을 접하고, 자결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베르트하이머의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사적인 소설의 구성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지만, 책의 서술은 내가 베르트하이머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현재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회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부분들을 나타내고 있다.  

 

 글렌 굴드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글렌 굴드를 작가는 적절한 허구를 뒤섞어서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극한의 노력과 완벽주의로 인해, 높은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다. 전지적인 인간으로 그리는 그였으나, 작가는 나를 통해서 글렌을 '피 나는 노력을 통해 이룩된' 재능이라며(물론 천재성 역시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타고난 인간의 절대적 완벽성을 부정해버린다. 극 중에서 그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연주를 하다 뇌졸중으로 죽는데, 포기하지 않는, 극단적인 완벽을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대비되는 베르트하이머 역시 천재적이고,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글렌을 만난 뒤로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는 인물로 묘사한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글렌의 포스가 상당함) 점점 책장을 넘길수록 존재감을 발휘하는데, 특히 극한의 의존적인 성격과 줏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팡질팡 고뇌하며, 합리화를 찾는 어쩌면, 강한 멘탈을 가지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 역시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물론 글렌보단 떨어진다), 충분히 부유한데도 전혀 만족을 못하고 모든 것에 불평을 한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연주에 충격을 먹고 진로를 바꾸는 '나'를 보고서야 자기도 따라서 정신과학으로 도피를 감행한다. 그 뒤 여동생에 광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글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지탱하는 글렌과 여동생의 상실 후에, 의존적인 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체적인 결심을 하는데, 극단적인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걷는다.

 

 작품의 나 역시도, 베르트하이머와 비슷한 부류인데, 베르트하이머가 극한의 공황과 방황, 의존으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면, 나는 체념적인 긍정을 통한 합리화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 자신은 베르트하이머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글렌의 천재성을 빨리 알아차리고 단념했다는 자위를 하며, 베르트하이머를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글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으며, 그 글 역시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도 체념적 긍정을 통해서 글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 스스로 글을 많이 남겼지만 죽기 전 모두 불태워버렸고, 나 역시 글렌에 대한 글을 예전부터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 했다. 대상만 달랐을 뿐 도피한 진로에서 그 둘은 뭐 하나 이룬 것 없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 책의 구성은 대립과 대립의 축으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축은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이며, 여기서 나아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대립적인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서 베르트하이머와 내연 관계였던 여인숙의 주인(하류층 계급)과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상류층 계급(베르트하이머를 포함한 나와 글렌 굴드까지)의 대립을 통한 계층적인 대립도 선보인다.

 

 특히 암울한 배경 묘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조국(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과감하고 파괴적인 언어로,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직설적인 돌직구를, 작품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통해 내던진다.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 스위스 등 더불어 모차르테움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여러 배경 묘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있다. 뒷부분에 베르트하이머와 관계를 나눴던 여인숙의 주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작가는 퇴폐한 오스트리아의 법제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설 자체가 인물의 행동도 그렇지만 배경의 비판을 통해서 상징하는 것들이 유난히 많았다.

 

 음울한 분위기, 인간의 고질적인 모습인 질투와 경외를 적절하게 섞어서 다룬 이 소설을 보며, 나 역시도 지난날의 뛰어났던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느꼈던 박탈감과 상실감, 그리고 경외심을 떠올리게 만들었었다. 작가의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얼마나 조국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느낌이 왔으며, 음울한 배경 묘사 속에서 던진 돌직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어쨌든, 책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시점과 서술 방식, 그리고 대립되는 상징으로 전혀 간단하지 않게 만든 작가의 표현력에도 대단한 경외심을 느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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