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최교수 > 앤티크로의 초대
서양골동양과자점 3
요시나가 후미 지음, 장수연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요시나가 후미의 서양골동양과자점은, 내가 신뢰하는 잡지 씨네21에서 소개를 받아 읽은 작품이다. 동인지 계에서는, 연예계의 박경림 만큼이나 발이 넓어 왠만한 일본 만화 매니아들에겐 이미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서양 골동 양과자점의 이름은 앤티크이다. 하나에 5만엔을 호가하는 글래스가 냉수를 담는데 쓰이는 이 가게에는 네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후줄근하고 수염난 아저씨 사장 타치바나, 타치바나의 충복이지만 할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약간 덜덜어진 치카게, 시건방진 파티셰 견습생 에이지, 천재 파티셰 오노. 하지만 이 네사람은 다들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을 벗기는 것은 각자의 몫. 분명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레시피 하나 하나가 엮이면서 만화는 처음의 옴니버스적인 느낌에서 하나의 완전한 구조를 이루게 된다. 치밀하고 촘촘하게 엮이는 이야기들은 잘 짜여진 견사를 만지는 느낌이다. 허술해 보이는 주인공들은, 사실은 각자 자신의 진면목을 따로 가진 사람들이고 그 진면목은 그들의 상처를 또 숨기고 있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가져오는 큰 재미에서 부터, 촘촘하게 엮인 것들에서 느끼는 짜릿한 재미, 그리고 컷 하나하나 사이마다 들어있는 작은 재미까지!! 온갖 재미와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에만 느껴지는 작은 감동은 작가의 역량 뿐만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준다.

독자를 주무르는 작가와 그 작가가 또다른 재미로 나를 점령하길 기대하는 독자. 나는 지금 앤티크에서 일어날 새로운 일들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설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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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최교수 > 따끈한 빵, 따끈해지는 기분
따끈 따끈 베이커리 7
하시구치 타카시 지음, 이지은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천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는 아주 많다. 특히, 스포츠나 음악, 요리 등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이 만화 따끈따끈 베이커리 역시, 예외는 아니라는 듯 천재가 등장한다. 주인공 아즈마는, 제빵사로서 아주 적합한 따뜻한 손(만화에서는 이것을 태양의 손이라 한다)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손이 아주 부드럽다. 즉, 섬세한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만화에서는 이것을 여신의 손이라 한다) 타고난 재능과, 제빵에 대한 열정. 아즈마의 꿈은 일본을 대표하는 빵, '재빵'을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빵, 독일빵 등은 있지만 일본빵은 없다는 것이 그 이유.

이만하면, 주인공이 미워질 만도 하다. 재능과 열정과 꿈이 모두 있는 데다, 조금 어긋나는 소리 같긴 하지만, 아즈마는 귀엽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즈마는 조금도 밉지가 않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스스로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데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그 대단한 아이디어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그 맛있는 빵들의 놀라움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년만화 주인공 특유의 꿈에 대한 열정과 따뜻함, 그리고 솔직함. 여러모로,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한다면, 빵 말고 다른 음식은 전혀 할 줄 모르는 점이나, 덜렁대는 것과 순진한 점도 나름의 '사랑스러운' 요인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주인공에 뒤쳐질까, 조연들도 대단한 개성들을 자랑한다. 머리모양만 바뀌면 아무도 못 알아보는 카와치, 뽀글머리의 근육맨 켄(참고로 점장), 불쌍한 '아가씨'이지만 언제나 밝은 츠키노. 아즈마와 함께 남동경지점을 이끌어 가는 식구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점점 잊혀지는'캐릭터도 한명 더 있지만, 생략이다. 대단한 라이벌인 칸무리와, 카이를 비롯하여 엽기 오버맨이지만 미각은 정확한 쿠로야나기, 마술로 정확한 맛의 점수를 측정하는 키리사키. 사랑스런 주인공, 화려한 조연에, 계속해서 쏟아지는 맛있는 빵들과 미처 알지 못했던 '빵'의 숨은 이야기, 그리고 기업경쟁이라는,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제법 잘 들어맞는 소재까지 끌어와서 갈수록 재미가 '창창'해 지는 중이다.

전에 <서양골동양과자점>을 보면서 입을 다셨는데, 이번에는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야할까? 빵만 '따끈따끈'한게 아니라 기분까지 '따끈따끈'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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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최교수 > 사랑스럼 그 도련님.
도련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일본 소설을 읽기 시작한 나에게,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은 정말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치, 영문학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들리는 것처럼 마치 일본의 세익스피어인양 그의 이름이 들렸고, 실제로 사람들이 그를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부르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제목처럼, 작품의 주인공은 '도련님'이다. 세상물정도 잘 모르고, 자존심은 세고, 생각은 엉뚱하며 나름의 정의감과 철학이 대단한 이 도련님은 그야말로 '도련님'이라는 하나의 완벽한 캐릭터 상을 구현하고 있었다.

이 도련님이 끌어나가는 이야기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것도 사회의 완벽한 축소판이라고 하는 '학교'의 '교사'가 되어 속을 알 수 없는 어른들과 어리고 골치 아픈 어린애들 사이에서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나름의 거대한 화두를 몸으로 겪는 과정의 그 이야기. 자신을 귀여워하는 식모 기요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와, 당고나 국수를 사랑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발끈하는 그의 모습. 빨간 셔츠, 거센 바람, 떠버리 등등 상상력과 그 나름의 상징성이 결합되어 교무실 안의 모든 교사들에게 하나씩 별명을 지어 가는 그를 보면 도무지 웃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만든다.

처음에는 큭큭 거리면서 웃다가 결국에는 박장대소하며 굴러다니게 하는 이 책은, 충고하건대 공공장소에서 읽어서는 안 된다. 주변사람들이 나를 주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련님'외에도 두 작품이 더 들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런던탑'이 인상적이다. 기도하고 슬퍼하는 형제. 희극 성이 강한 도련님과는 반대로 서정성이 물씬 풍겨서 일본 소설 특유의 섬세한 터치를 느끼게 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작에 속하는 이 작품들은, 확실히 그 뒤에 나오는 소세키의 이야기들을 접하는데에 나름의 바탕 역할을 톡톡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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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최교수 > 사진 같은 만화
미스터리 극장 에지 18
유마 안도, 아사키 마사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최근에, 에지를 다시 읽고 있다. 동생 녀석이 조르는 탓도 있지만, 역시 한번만 읽어서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는 만화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이코 메트리라는 특이한 능력이 있는 주인공이 나오고, 이 능력을 높이 사는 경찰이 등장해 사건을 풀어간다는 내용의 어떻게 보면 사뭇 간단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제목에서도 풍기듯 그야말로 '미스터리'한 내용도 제법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 경찰 수사물이나 추리소설과의 차이라면 차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주요한 관점으로 두는 것은 이런 이야기 구성의 틀도 아니고 주인공의 특이한 능력도 아니다. 가끔씩, 이 만화가 차갑게 나를 찌르는 그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이다.

일본 만화 특유의 등장인물, 그러니까 대단한 오타쿠라든지 혹은 변태적인 인물들이 이 책에는 다수 출연한다. 집착은 하지만 배짱이나 용기는 없는 인물들이다. 왜 갑자기 이런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냐면, 이 인물들은 주인공과는 대단히 다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에지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 정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마약 사범이 덤비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 정도 역시 기본이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100:2의 싸움은 에지와 그의 친구 강천이 어떤 실력인지 알려주는 데에 아주 적합한 예이다.

이런 주요인물 주변을, 혹은 주요인물의 주변인들 근처에서 배회하는 소심한 변태, 혹은 오타쿠들. 만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범인들의 이면, 사건을 저지르기 전의 모습들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뭔가가 뒤틀린, 혹은 뭔가에 뒤틀린 듯한 그런 사람들.. 고상한 사람들이라면 이 만화를 싫어하게 만들 만큼 많이 나온다.

유충에서 나비가 되는 듯한 변화의 과정이지만 그 과정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 아쉽다. 이와 비슷한 과정이 있다. 평소에 너무나 성실한, 혹은 착한 사람들이 잔인한 범죄의 죄인이었을 때, 이 때도 이런 기분이 든다. 결국 이 만화 에지는, 단순한 추리물의 영역을 조금 뛰어 넘어 내면에 대한 성찰까지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뭇 건방진 만화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읽을 때의 긴장감, 스릴감, 그리고 말 그대로 '재미'가 넘처나는 것은 유쾌하고 즐겁지만, 읽고 난 후의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같은 - 가슴에 추를 하나 달아주는 듯한 그런 만화. 그것이 바로 이 만화다. 봐선 안 될 것 같은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안쓰러운 재미와 회백색으로 칠해진 세상을 찍은 그런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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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퍼온글] 인간 플라시보

알라딘의 마태우스님이 저에대해 써 준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참 고맙기도 하고 (누군가 저를 이토록이나 관심을 가져 주신다는 것에 대해. 더구나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 아는 분인데..) 제가 반성할것이 많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 그리고 저를 아는 분이 생각하는 저는 조금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저'라는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게 아닌가 싶어 about me에 퍼 왔습니다. 이렇게 길게 써 주신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못난 인간인 저를 좋게 봐주신 마태우스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 서론

얼마 전 알라딘에 대박 이벤트가 있었다. 총 18명에게 책을 보내주는, 그러니까 대략 20만원 가까운 돈이 지출된 대형 이벤트, 댓글마다 번호를 붙여 추첨으로 당첨이 결정되는 방식도 상상을 뛰어넘는 거지만, 20만원이란 규모 또한 생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그 이벤트의 주인공은 알라딘의 별 플라시보님. 나 역시 이벤트로 책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녀의 이벤트를 보면서 맘 한구석이 아팠다. 그녀에게 20만원이 주는 의미는, 그 돈이 내게 차지하는 비중과는 또 다를 것이기에.


2. 그녀의 삶

새로운 사랑을 찾아간 어머님 때문에 계모 밑에서 자라야 했던 그녀에게 세상은 갑자기 차가운 것이 되어 버렸다.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처럼 그녀의 새엄마는 그녀를 탄압했다. 그녀의 증언이다. “학교에 돈 낼 일이 있으면 아빠가 출장을 가면 어쩌나 걱정하곤 했다” 대학에 가고 난 이후부터 그녀는 한번도 집에다 손을 벌려본 적이 없다는데, 자기 몸 하나를 건사하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닌 이 삭막한 정글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는 것밖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을게다.(얼마 전 ‘누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땡기나’라는 제목의 글을 쓴 걸로 보아, 그녀도 자신이 사자인 걸 아는 것 같다). 어떤 분의 말마따나 그녀의 글은 늘 치열하고, 그 치열함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녀 자신의 거울일 것이다.


“나는 애원했다. 인문계를 가게 해 달라고. 대학을 가지 못하는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모두들 모른척 했고. 마지막으로 아빠가 모른척 했다(1984년 겨울. 수능)”

결국 그녀는 여상에 진학했고, 책만 읽어오던 그녀에게 주산과 부기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내신이 15등급인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저런 생활을 하던 고3 10월, 그녀는 갑자기 수능을 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그녀에게 찾아온 ‘기회’였을테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때부터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서 수능치는 그날까지 하루 3시간 이상은 침대에 누워서 자 본적이 없었다...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정말 죽도록 공부를 했다”

그리고 수능날. 새엄마는 알람시계와 전화기를 모두 감추고 여행을 떠나버렸다. 많은 사람을 울린, 추천 20회에 빛나는 ‘1984년 겨울.수능’에서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대목이다.

“그 작은 손목시계 알람을 듣고 나는 기적적으로 새벽 6시에 일어났다...샌드위치와 우유 한병을 사고 따뜻한 캔 커피를 그 자리에서 마셨다. 어금니를 너무 꽉 물어서 이빨이 빠질것 같았다. 주먹쥐고 씩씩하게 택시를 탔다. 그리고 수능을 쳤다. 다른 애들은 집에서 싸온 보온 도시락을 먹을때 나는 울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차가운 샌드위치와 우유를 마셨다. 그렇게 시험을 치고 나는 비록 여상이지만 우리 학교에서 최고의 수능 점수를 받았고 내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합격을 했다....수능을 치던날 얼마나 춥던지. 교실에서 씹던 샌드위치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옆에서 밥을 먹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다. 하얀 김이 올라오는. 국까지 있는 따뜻한 밥. 저걸 먹으면 모르던 문제도 살살 떠 오르겠다 싶을 정도로 부러웠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엿한 직장인이다. 내가 그녀였다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다. 아마도 난 깊은 좌절감에 빠져 타락했을테고, 남은 인생을 도망간 어머님을 원망하면서 살아갔을 거다. 어느 정도 성공을 한 사람에게 과거의 고생은 그리 큰 상처가 아니다. “나는 매해 수능날 마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고 커피를 마시며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내가 자꾸 보인다(같은 글)”라고 하는 걸 봐서 그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어찌보면 그런 상처들은 현재의 플라시보를 훨씬 돋보이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녀가 여상 시절을 얘기하고, 내신 15등급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힘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에게 못사는 사람은 ‘게을러서’ 혹은 ‘노력이 부족해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 혹은 그녀만큼 노력할 수 있는 건 아니며, 어떤 이에게는 노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플라시보님의 글을 읽고 어떤 분이 내게 보내온 메일이다.

[삶을 치열하게 산다는 거, 결과적으론 전체 인생에선 도움이 될 수 도 있지만, 이걸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도, 해서도 안됩니다. 삶을 치열하게 살 능력이 안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까지 아둥거리면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 모두도 보호받아 마땅합니다..... 세상이 험해서 어린시절 그런 고생이 훗날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험하지 않도록 해야 할 몫이 남아있는데 사람들은 그저 지난날의 고생만 자랑스레 생각합니다. 저 역시 나이를 많이 먹지 않았지만 참 굴곡깊게 살았습니다. 우리시절에는 그랬죠. 아니 어렵고 고생하며 사시는 분들은 오늘날 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숫자라도 좀 줄일 때도 되지 않았는지요. 모두가 자기자신을 시험해 볼 기회라도 넉넉히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어린친구들이 공부하고 학교가는 데에 돈 걱정, 학군걱정없이 공부했으면 합니다.... 윗분의 따뜻한 글을 읽고, 시험날에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그런 기억조차 찾아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는 세상이 되길 바래봅니다]


나는 플라시보님을 존경한다. 그 위치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각을 보여줬으면 더 좋겠다. 지금 그녀가 그렇지 않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3. 서재인 플라시보

알라딘 서재질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내가 넘어야 할 벽이었다. 그것도 너무 높은 벽. 그리고 난 지금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명예의 전당 회원이고, 글도 나보다 훨씬 잘쓰고, 게다가 미녀니까 (알라딘의 구성원이 여자가 많으니 이건 유리한 게 아닐 수도 있는데, 그땐 몰랐다).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내는 능력은 아주 탁월하고, 주위 사람들을 소재로 한 글도 꽤 많이 쓴다. 그래서 한때 그녀와 경쟁하려고 했던-지금은 포기했다-나는 “왜 그녀 주위에는 특이한 사람이 저리도 많은가!”라며 길게 탄식하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좀 분발한다 싶을 때면 자기 사진을 턱하니 올려 사람들을 열광시키니, 내가 어찌 그녀의 경쟁자가 될 수 있겠는가. 더 놀라운 것은 글쓰기 능력이다. 만만치 않은 분량의 글을 그녀는 너무도 쉽게 써낸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겠지만, 문장 하나를 쓰는데도 이생각 저생각을 하는 나로서는 수다를 떨듯 써내려간 그녀의 글을 보면서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수다를 떨듯, 그렇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가 마치 내 앞에서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어떤 분이 그녀에게 물어봤다. “이 정도의 글을 쓰려면 얼마나 걸려요?” 그녀의 답이다. “한 20분쯤” 그 댓글을 본 사람은 전부 기절했을거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외에, 오자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그녀의 글이 갖는 크나큰 장점이다. 그렇게 워드를 빨리 치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루 방문객 163.7명(15일 평균), 즐겨찾기 숫자 450명(추정치), 인기의 척도인 두 항목에서 플라시보님이 모두 정상권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빅3 안에는 못든다해도, 그녀의 리뷰 역시 수준급이다. 내 생각에 그녀의 리뷰는 책이나 영화가 후질수록 빛을 발하는데, 그 표현력이 나로 하여금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필때는 화려하지만 지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장미꽃같은 소설이 아멜리 노통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아나스타샤, 아멜리 노통)

-만화를 가지고 사회 밑바닥을 건드리는 것은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렀을때 해야지 신인이 그냥 흉내만 낸다고 해서 다 되는건 아니라는걸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성찰과 진지한 고민이 없는 건드림은 정육점에 널린 고기들처럼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나른한 오후).


에쿠니 가오리가 쓴 소설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고난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물고기 가오리가 환생해서 쓴 소설 아닐까?’라고 하기도 하고, 바나나의 책엔 ‘이걸 돈주고 사느니 '바나나'나 한 두어개 사먹으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일침을 가했다(마이리스트, 읽으면서 왜샀나 겁나게 후회한 책들). 이런 표현력이 난 부럽다.  이것 또한 그녀가 매니아 군단을 이끌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녀가 서재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이 하나 더 있다. 하는 일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녀는 직장에서 일을 별로 안하는 듯싶다. 밤늦게까지 근무를 해서 그런지 낮 시간에는 꽤 편해 보인다. 요즘은 아니지만 전에는 낮잠잔 얘기도 심심치 않게 썼고, 글을 올리는 시각이 전부 남들이 일할 때다. “요즘 매일 11시 12시에 퇴근하는 관계로 너무나 피곤하고 정신이 없다”고 얘기를 하지만, 그 다음 대목을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출근하자 마자 졸리기 시작하길래 얼마전 장을 본 담요를 덮고 졸고 있었다”(누가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땡기나)

담요를 덮고 잘 수 있는 직장, 내가 알기에 별로 없다. 그녀가 글을 올리는 시각도 전무 근무시간인데, 예컨대 ‘서른이 되면’은 지난 금요일 오후 4시 40분, 리뷰는 같은날 오전 10시 56분, 사자의 콧털은 오후1시 20분이다. 하루 종일 글만 썼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널럴함도 능력일 수 있다는 걸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역시 그녀가 서재를 평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녀가 ‘실시간 리플의 대가’가 된 것도 다 그 덕분이다. 과거 앤티크님이 실시간 리플의 제왕이었다지만, 앤티크님이 사라진 지금은 플라시보님이 제왕이다. 오늘 올라온 ‘떡볶이’란 글에 작은미소님이 11시에 댓글을 달았는데, 플라시보님은 11시 8분에 댓글을 달았다. 그러니 그녀가 쓴 어떤 글에 댓글이 30개 달렸다면, 반은 자신이 쓴 거다. 나처럼 몇 개의 댓글에 몰아서 답을 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좋은 태도라는 건 백번 인정한다. 바쁜 척하지만 사실 나도 그럴 여력은 된다. 내가 게을러서 못할 뿐.


4. 다시 문제는 따뜻함이다

<파크 라이프>에 대한 리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쿨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게 내가 이 소설에 대해 하고싶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아는 어떤 알라디너보다도 쿨하며, 내가 아는 모든 여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는다. ‘쿨함’이란 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녀는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다. 자신이 남자를 덮친 것에 진배없는 첫경험 얘기, 열명이 넘는 사람이 나오는 연애담들을 담담하게 글로 쓸 수 있는 것도 그런 자신감의 징표가 아닐까.


그녀는 원리원칙주의자인 듯싶다. 다른 사람 같으면 참고 넘어갈 일도 그녀에겐 용납되지 않는다. 카드할인과 조조할인이 동시에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나선 영화를 안봐 버리고, 자기가 볼 때 수준이 안되는 경리의 얼굴에 커피를 쏟는다. 자기집 근처에서 사람들이 떠들면 창문을 열고 “다른 데 가서 떠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애인은 사귀지만 결혼은 할 뜻이 없는 여자가 바로 플라시보다. 그녀의 글에는 자신이 싸워온 숱한 경험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이겠지만, 너무 삶을 치열하게 살다보니 따뜻함을 상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서재질을 일년쯤 하다보면 서로 농담도 주고받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감히 농담 거는 사람이 없다. 어설픈 농담을 했다간 박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녀가 여간해선 서재마실을 다니지 않는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일 거다. 정말로 그녀는 마실을 잘 다니지 않는다. 그녀 정도 레벨 치고 즐겨찾기가 열 개 정도밖에 안되는 서재는 별로 없을거다. 그녀가 자기 서재에 와주지 않는다고 삐진 사람도 있지만, 그녀는 마실을 다닐 마음이 없는 듯하다. 100군데를 즐겨찾기 해놔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몇몇 서재폐인처럼, 마실을 나가다보면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그렇게 선을 그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또한 그녀가 견지하는 원리원칙의 하나일테고, 그러면서도 서재를 평정하다시피 한 것도 능력이겠지만, 따뜻함, 인간미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5. 결론

‘결혼할 뜻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임자를 만나지 못한 거다’

독일의 철학자 마이클 오웬이 한 말이다. 새엄마의 탄압을 이기고 알라딘의 제왕이 된 플라시보, 신데렐라의 행운은 거저 왔지만 그녀는 스스로 만들었다는 게 커다란 차이점이긴 해도, 난 그녀를 현대판 신데렐라라고 부르련다. 쿨하고, 센 척 하지만, 한달에 서너번은 집에서 소리내어 운다는 연약한 여자 플라시보, 그녀의 구두 한짝을 가지고 있는 왕자님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걸까.


* 이 글은 플라시보님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쓴 글입니다. 맘에 안드는 구석이 있어도 이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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