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TV : 대장금 (일명 오나라)


나는 이영애라는 연예인을 좋아한다. 그의 인간성이나 사생활 등등은 잘 모르지만 그냥 화면에 비춰진 그녀의 비주얼을 좋아한다. 그리고 예전에 그녀가 쓴 책을 읽어보아 적어도 머리가 텅텅 비고 얼굴만 예쁘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 나름의 판단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녀가 사극에 출연을 한다고 해서 무척 기다렸었다.

처음부터 이영애가 나오지는 않아서 다소 실망을 했었지만 PD가 오죽 자신이 있으면 주연배우 없이 아역배우로 5회 가까이 끌고 나갈까 싶어 드라마의 완성도 면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믿음이 갔었다. 그리고 아역배우가 나온 회 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본다.

대장금의 성공 요인은 이영애라는 스타성에 힘입은바도 있지만 여태 다루지 않았던 궁중음식이라는 소재 역시 한몫을 했다고 본다. 웰빙족이니 뭐니 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대 화두로 떠 오른 요즘.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분명 존재했었고 또 100% 자연산으로만 만들어진 요리들은 요즘 불고있는 유기농 열풍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요즘 장금이는 음모에 의해 수랏간 나인이 아닌 의녀가 되었다. 제주에 관비로 쫒겨 갔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피나는 수련을 거친 끝에 장금이는 이제 칼 대신 침을 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장금이가 칼질을 하며 오색 찬란한 음식을 만들때가 더 재미났던것 같다. 비록 늦은밤 출출함을 이기지 못해 기름 뚝뚝 흘려가며 피자를 먹을 망정 장금이가 내어놓는 새로운 요리들은 내 눈과 맘을 사로잡았더랬다.

또 한가지만 더 불만을 말하자면 음식을 하던 장금이와 의술을 펼치는 장금이는 변했지만 주변 상황은 또다시 뻔하게 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한상궁 양미경의 역활은 다시 의녀 장덕인 김여진이 바통을 이어받았고 연생이는 연생이와 외모조차 흡사한 신비가, 홍리나의 악역은 이세은이 대신 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 하자면 장금이만 칼 대신 침을 들었을 뿐 주변 상황의 설정은 똑같다는 것이다. 여전히 장덕은 한상궁처럼 장금이에게 어머니처럼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고 신비는 연생이처럼 능력은 특출나지 않지만 심성이 고운 아이로 장금이의 절친한 친구가 되고 이세은은 홍리나가 그랬던 것 처럼 장금이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그녀를 곤궁에 빠트리려고 한다.

거기다가 나는 쉼없이 상황이 꼬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늘 장금이는 음모와 암투에 연결이 되어 있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과 노력은 복잡한 상황만을 만드는데 기여할 뿐인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장금이가 음식을 할때는 온통 음식먹고 평을 하고 또는 어선경합에 관심을 가지던 중전, 대비, 임금이 이제는 차례 차례로 아프기 시작해서 역시 의술을 펼치는 장금이를 심심하지 않게 해 준다. 물론 상황에 따라 그들은 음식을 먹고 평을 하는 것만 보여주고 또 아파서 시료를 받는 것도 보여줘야 하겠지만 그들이 다른일을 하는 것도 좀 보여줬으면 한다.

지금도 대장금을 열심히 보고 있지만 조금만 드라마를 덜 꼬으고 인물들의 성격도 우리편 나쁜편으로 나뉘어지는 단순함을 벗어났으면 한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친구가 장금이와 난정이는 동시대 인물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난정이 역시 문정왕후를 모셨고 장금이 또한 이제 막 문정왕후에게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또 여인천하에서 난정이가 문정왕후에게 맨날 찍어내야 한다던 조정암역시 대장금에도 등장한다. 장금과 난정은, 어쩌면 숱하게 서로 부딪쳤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플라시보 > Movie : 페이첵

필립 K 딕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스필버그는 원작에선 다소 뚱뚱하고 볼품없던 주인공 존 앤더튼을 미끈한 톰 크루즈로 바꾸었고 미래 사회 역시 별 무리 없이 잘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런 비주얼만으로 그쳤다면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비주얼 만큼이나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탄력있는 전개로 관객들을 몰입시켰다.

그렇다면 필립 K딕과 오우삼의 만남은 어떨까? 결과부터 말 하자면 스필버그쪽이 훨씬 더 궁합이 잘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등으로 아시아를 평정한 오우삼은 브로큰 애로우로 마침내 할리우드도 접수했고 페이스 오프, 미션 임파서블2 등으로 잘나가는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우삼은 딱 영웅본색 까지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인 특유의 뻥이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과 만나면 페이스 오프같은 택도아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오우삼은 비둘기 날리기와 슬로우 모션 액션의 남발로 느닷없이 촌발 휘날리는 장면을 집어넣기로 유명하다. (설마 했는데 이번에도 비둘기가 난다. 단 떼거지가 아닌 한 마리만 날리는데 비둘기 날리지 말라고 한소리 들은 듯 전작들과 달리 약간 주춤하는 비둘기 날기가 등장했다.)

컴퓨터 프로그램 계발자인 밴 에플렉은 프로그램을 하나 개발하고 나서 보안이 이유인지 뭔지는 몰라도 단발적으로 기억을 지운다. 즉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쓴 시간이 2주이면 2주간의 시간을 지우고 3주이면 3주간의 시간을 지우는 것이다. 하루는 그에게 거액의 제안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기억을 지울 단위가 주 단위가 아닌 년 단위이다. 그리하여 밴 에플랙은 3년간 기억을 지우고 뭔가를 개발한다. 3년이 끝나고 프로젝트 계발비로 받은 돈을 은행에 찾으러 갔는데 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전에 자신이 와서 돈을 다 없앴다는 은행원의 증언만 듣게 된다. 그리고 프로젝트 참여를 하기 전에 자기가 맡긴 시계와 선글라스대신 엉뚱한 스무개의 물건이 든 봉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이 봉투에 들어있는 물건들로 사건을 해결하면서 자신이 3년간 계발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게 되고 마침내 그 물건을 파괴하게 된다.

이 영화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보다 결정적으로 약한 이유는 훨 뒤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비주얼을 반도 못 따라 간다는 것에 있다. 이미 톰크루즈가 나와서 충분히 써 먹었던 손으로 화면 휘돌리기 쑈를 밴 에플렉도 하지만 톰크루즈처럼 드라마틱 하지 않다. 또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인공비와 인공천둥 번계(이게 실외라면 모르겠지만 실내에서 약간 꽈광 하면서 비 뿌리는 정도야 지금도 가능할듯 보인다.) 어설픈 미래 디자인 등등 곳곳이 헛점 투성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몇 년을 공들여서 아주 잘 만든 3D게임같다면 페이첵은 그 게임을 흉내내어 단 몇 주만에 후딱 만들어 치운 2D게임같은 인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우들이 충분하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배우였던 벤 에플렉은 여기서 적당하게 연기하기로 작정이나 한 듯이 돈주니 어쩔 수 없이 연기한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킬빌같은 영화를 혼자서 이끌어 나가기에 충분한 기력을 가졌던 우마서먼 역시 여기서는 쭉빵스럽지 못한 본드걸 정도로 보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스토리의 엉성한 배열이다. 오우삼은 싸나이 우정을 그린 영화의 기승전결은 기가 막히게 잡아 내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외의 영화들은 전부 막 찍어놓고 우루루 쏟아놓은 듯한 전개를 보여준다. 충분하게 설명을 해 주어야 할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그냥 넘겨야 할 부분에서는 폼을 잡느라 한참을 허비한다. 그래서 영화는 지루했다가 바빠졌다가를 반복하며 혼자 북과 장구를 열심히 쳐 댄다.

사실 오우삼 영화 치고는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비교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오우삼은 페이첵의 메가폰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영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차곡차곡 자신만의 비주얼 노하우와 연출력을 지닌 스필버그와 달리 그는 너무 급조되었고 날조되었다는 느낌이 가득한 영화를 만들었다. 차라리 페이첵 다음에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나왔다면 믿을 정도로 형만한 아우 없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플라시보 > Movie : 28일 후

인간은 언제나 한날 한시에 쫄딱 망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극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가장 흔하게는 세계 제 3차 대전이 일어나서 핵전쟁으로 번지거나 몇년 전부터 유행한 지구와 행성의 충돌. 그리고 오래 전 부터 영화속에 등장한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인류의 멸종. 외계 존재에 의한 파괴. 그 밖에도 기계의 반란에 의한 전멸. 혹은 하나의 존재가 막강한 어둠의 파워를 가지고 지구를 집어 삼키려는 것들이 있다. 대게는 용감한 인간 몇 몇이 저 위기를 간신히 극복해서 인류를 살린다.

내가 봤던 바이러스가 지구를 어쩌고 하는 영화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12몽키즈 였고 외계의 존재가 우리를 어쩐다는 것은 화성침공이 제일이었던 것 같다. 핵전쟁에 의한 것은 그날 이후가 단연 돋보였다. 그 밖에는 전부 그저 그랬다. 그리고 이제 여기 한개를 더 추가해야 겠다. 대니 보일의 28일 후.

이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던 퀵서비스 맨은 사고 당시로 부터 정확하게 28일 후 에 깨어난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병원은 물론 영국 전체가 텅텅 비어있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이 남자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원숭이에게서 시작된 분노 바이러스(미칠듯한 분노에 사로잡혀 미친듯이 상대를 공격함. 눈이 벌개지고 각혈을 함. 피를 통해 전염됨) 가 안간에게 옮겨가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서 죽고 죽이게 된 것이다. 남자는 감염자에게 죽음을 당할 뻔 하다가 도시에서 살아남은 남 녀 두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다. 감염이 되면 친구건 애인이건 가족이건 20초 안에 사살하지 못하면 엄청난 힘으로 공격하고 얼굴에다 피를 내뿜어서 감염자로 만든다. 이들이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고 찾아간 곳은 9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는 것인데 이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생존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결코 생존자를 안전하게 보호 할 목적으로 방송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가 떠 올랐다. 그 책 역시 종류는 다르지만 일제히 눈이 멀어버리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세상은 혼란속에 빠진다. 그리고 역시나 거기서도 강자는 존재하고 약자도 존재한다. 28일 후 에서 총 아홉명의 군인들이 방송을 하고 생존자를 찾은 이유는 바로 여자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에는 성적욕구 해소를 위해 그리고 좀 더 위대한 목적으로는 인류의 재건을 위해서 방송을 듣고 찾아 올 여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친절하게 안전을 보장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낸다. 결국 주인공은 그들을 다 사살하고 안전한 곳으로 여자 두 명을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결말이 존재한다. 하나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남자가 죽은것이고 하나는 남자가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세상 전부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니면 섬나라인 영국 하나만 이런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무엇이 목적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보이게 하려고 천으로 커다란 글씨를 만들어 평원에 펼쳐 놓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글자는 Help가 아니라 Hello이다.

영화를 보면 바이러스의 공포 보다도 더 한 것은 혼자 살아남은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온통 텅텅 빈 도시에 혼자 남아있고 가끔 감염자들이 미친듯이 공격 해 대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심지 약한 몇몇은 충분히 자살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감염되지 않은 자신 이외의 인간을 만났다는 것에 감격스러워 한다.

극한 상황에서 약자일 수 있는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늘 약자이다. 어른 대 아이가 그렇고 남자 대 여자가 그렇다. 암만 아닌척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여러가지 이성을 가지고 만든 규칙이나 법들은 서로 평등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평화로울때나 가능한 얘기이다. 당장 전쟁이라도 터지면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들은 가장 먼저 착취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나는 별로 남녀 평등을 부르짖지 않는다. 위기의 상황이 닥치면 언제건 뒤집어 질 수 있는 것을 얄팍한 이성의 막으로 아닌 척 한다는 것은 내가 볼때 눈가리고 아웅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은 상대적 우위인 존재들에게 무조건 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뭐랄까 암만 입으로 부르짖어 봐야 너무 쉽게 무너지고 깨어질 수 있는 구호가 허망하다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눈먼 여자들은 눈먼 남자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다. 그녀들은 자신과 또 남자와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강자인 남자가 요구를 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들어주는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28일 후 에는 여자 두 명이 9명의 군인을 상대할 뻔 한다. 그 중 한명인 흑인 여자는 감염자들을 때려 잡거나 살아 남기 위해 냉정한 면을 볼때 남자보다 백번 나은 모습을 내내 보여주지만 결국은 살기 위해 몸을 내어놓으라는 군인들의 요구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자기보다 어린 여자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약을 퍼 먹일 뿐이다.

영화의 결론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지만 그 두가지 중에서 어떤것도 희망적이지는 않다.  첫번째 버전은 남자가 죽고 여자 두 명이서 남는 것이고 두번째 버전은 남자가 죽지 않는 것이다. 왜 감독이 두 가지 결말을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두개의 결말 다 다를것이 없으므로) 어느것도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그들은 Hello라고 커다랗게 쓴 글자 위에서 손을 흔들지만 비행기는 그냥 지나간다. 그들은 마주보며 말한다. 이번에는 우릴 봤겠지? 봐도 그냥 지나치는 것 보다는 못봐서 지나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았겠지만 상황으로 봐서는 비행기가 다시 선회해서 그들을 구할것 같지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단순해 지는 것 같았다. 아웅다웅 거려봐야 저런 커다란 재앙이 닥치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플라시보 > Movie : 봄날은 간다.

랑이 변하니? 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응 변하더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 한 남자가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리고 이미 사랑은 변해 버렸다. 어쩌면 사랑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와 여자는 일로 만난다. 남자는 음향기사이고 여자는 라디오 방송국에 PD겸 DJ이다. 남자는 엄마가 없고 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함께 낡은 한옥집에 산다. 여자는 이혼을 했고 혼자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 그들은 어쩌다 라면을 함께 먹고 싶어 진다. 그리고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함께 잠을 자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러다 어느날 여자가 변한다. 남자는 여자를 잊는게 너무나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할머니 말처럼 지나간 버스와 여자는 잡지 않는 것이니까. 아니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고통스럽던 시간이 흐르고 남자의 상처가 아물었을때 여자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날까? 하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그녀가 할머니 주라고 선물한 화분을 돌려준다. 할머니가 이미 죽어서 화분을 받을 수 없듯이 남자의 마음속에 여자에 대한 사랑은 이미 죽었다. 눈감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를 기억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를 개봉했을때 나는 혼자 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참 잔인한 얘기를 예쁘게도 화면에 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소리를 따기 위해 다니는 대나무 숲과 바닷가 그리고 눈 내리는 절은 고즈넉하고 아름답지만 함께 하는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시궁창같은 도시의 삼류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도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반대로 그렇게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사랑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슬프고 추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볼 당시 나는 꾀 여러권의 영화잡지를 구독하고 있었으므로 봄날은 간다에 관한 수많은 평을 보았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평론가들의 평을 기억하기에는 내 머리가 지나치게 나쁘거나 아니면 내가 느낀 감정들이 너무 강해서 일 것이다.


 

 

 

 

 

 

 

 

 

 

 

 

군가는 여자가 남자를 버린 이유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사랑이 생겨서 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볼때는 처음부터 사랑은 없었다. 그냥 남자의 일방적인 짝사랑만 있었을 뿐이다. 여자를 반하게 하기에 그는 너무 감정적이고 약한 남자였다. 적어도 그 여자를 반하게 할 남자는 항상 선그라스를 쓰는 것멋 정도라도 갖추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에게 남자는 그냥 잠시 만난 사람이다. 같이 라면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일을 하고.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이기심은 어느날 불쑥 일하는데 찾아가서 그를 흔들어 놓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날 한달만 떨어져서 지내보자고 한다. 그러다 남자가 그녀를 찾아가고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고 울자 여자는 헤어지자고 한다. 그녀 집 앞에서 밤새 차에서 잠을 잔 그에게 그녀가 남긴 말은 우리 헤어지자 이다.

가 했던 사랑들은 전부 똑같지 않았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하거나 내가 그를 더 사랑하거나. 나를 더 사랑한 그들은 나에게 매달렸고 그러면 그럴수록 하찮게 느껴지고 귀찮아 지더니 이내 잔인하게 버리도록 했다. 전화기 너머로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걸레를 빨았고 먼길을 우산도 없이 찾아온 사람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고 다시 비를 맞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게 했다. 이미 모든게 끝나서 무의미한 나에게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괴롭힘 밖에는 되질 않았다. 그런 기억들을 까맣게 잊고 나는 다시 사랑을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매달리는 쪽이 된다. 나의 어떤 행동과 어떤 말에도 무덤덤한 그를 견딜수가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옆에만 있어 달라고 구걸하는 나에게 그들은 예전의 나처럼 잔인했다. 숨을 쉬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들은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런 기억이 힘들어지면 남는건 하나다. 마음의 문을 닫는것. 그래서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지 않는 것. 사랑하는 기쁨도 없겠지만 매달리고 잊어야 하는 일련의 구차한 과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자가 다른 남자와 콘도로 놀러가는 것을 본 남자는 유치하게도 여자의 초록색 차를 긁어 버린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자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면, 나처럼 아프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차라도 긁어야 하는 것. 사랑은 가끔 이기적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즈려밟고 고이 가시옵소서 하는건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다.

랑이 똑같지 않으니 어느 한쪽은 기울게 되어 있다. 결국은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 더 많이 상처를 받는다는 공식은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걸 머리로 안다고 해서 마음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뻔하게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 사랑을 하고 매달리는 것이겠지.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다시 남자를 찾는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주라고 화분을 선물한다. 남자는 내내 말없이 그냥 웃기만 한다. 서로 돌아서서 가려는데 여자는 다시 뛰어간다. '우리 다시 만날까?' 남자는 대답대신 화분을 준다. 아직 그녀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자기 상처에 소금을 뿌려가며 조금씩 단련 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아물었고 흉터는 남았지만 아프지는 않다. 그는 여자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냥 그냥 만났던 여자가 아니므로 아문 상처를 가진채 다시 그 여자를 스쳐가는 사람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자신이 치열하게 사랑했던 지난날에 대한 예의로 그냥 두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사랑하던 사람이 친구로 지내자고 했을때 내가 거절한 것 처럼 말이다. 친구로라도 옆에 두고 싶은 욕심이 그 남자처럼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을만큼 가슴을 쾅쾅 때렸지만 나는 결국은 거절했다. 그건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니까 말이다. 

목이 왜 봄날은 간다 인가 한번 생각 해 보았다. 봄날은 정말 짧다. 여름처럼 강렬하지도 겨울처럼 혹독하지도 않다. 하지만 아주 짧은 그 순간동안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흑백에서 다시 컬러로 세상이 바뀌고 옷이 얇아지고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사랑도 비슷한게 아닐까 싶다. 잠깐 세상은 컬러로 바뀌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씌웠던 두터운 가면도 벗게 하고 그로인해 마음이 따뜻해 지지만 결국은 가는 것이다. 봄날은 여름을 향해 가듯이 사랑도 이별을 향해서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플라시보 > 툼레이더 : 판도라의 상자

원래는 니모를 한 번 더 보려고 비디오 가계로 갔으나 니모가 없는 바람에 그냥 툼레이더를 빌렸다. TV에서 연말 시상식으로 지들끼리 상주고 받으며 잔치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툼레이더를 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방송사의 시상식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원래 툼레이더의 얘기가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1편에서는 라라 크로포드라는 여자애가 아버지가 남긴 유물을 찾아내고 어쩌고 하면서 악의 무리와 맞서고 했던 내용인것 같은데 2편에서는 1편과 거의 상관없이 내용이 진행되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1편을 보지 않아도 2편을 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달라진 점은 안젤리나 졸리의 가슴이 조금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가슴은 매트릭스 3편에 나오는 빨간옷의 모니카 벨루치 만큼이나 빵빵했었는데 전사에게 있어 수박만한 가슴은 나름대로 부담이었는지 이번에는 그나마 인간 같은 가슴 사이즈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신체적 변화를 빼자면 조금 더 유치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1편 역시 유치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었었다. 그런데 2편은 보다가 중간에 정지 스위치도 누르지 않고 담배를 피러 거실로 나가고 주방에서 핫쵸코를 만들 만큼 지루했다. 그래도 끝까지 본 것은 비디오 대여료 1,500원의 승리다.

예전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그 넓디 넓은 집구석에서 천정에 줄로 매달려 마치 발레같은 액션을 펼쳤던 씬이 가장 기억에 남았었는데 2편에서는 그런 기억에 남는 씬이 없다. 그냥 너무 오바하는 느낌 뿐이었다. 예를 들어 제트스키를 타면서 한번 뒤집지 않아도 될 장면에 뒤집어 주시고 봉을 타넘어야 하는 부분에서도 그냥 걸어가거나 기어가면 될 것을 굳이 덕수를 넘으며 가는 졸리를 보고 있자니 정말 졸릴 지경이었다. 감독이 바뀌었나? 예전의 졸리는 뭐 나름의 오바는 했지만 그래도 멋진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 졸리의 오바는 그냥 웃길 뿐이다. 얼마전 레골라스의 코끼리 씬 만큼이나 어이가 없다.

툼레이더나 미녀 삼총사 그리고 킬빌을 봐 주는 이유는 다른것도 있겠지만 머리는 비었어도 근육만은 꽉찬 남정네들의 액션이 너무 지겹기 때문이다. 람보, 브루스 윌리스 그리고 장 끌로드 반담, 반 디젤로 이어지는 액션 계보가 지겨워도 너무 지겨웠다. 그래서 여자들이 액션 히어로로 나오는 것이 보고 싶었었다. 대리만족이냐 묻는다면 굳이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가슴달린 여자들도 공기 저항을 받지 않으며 힘껏 내달리고 맨날 남자한테 따귀 한대만 제대로 맞아도 기절해 주시는 여자들이 아닌 남자랑 같이 때려패고 싸우는 여자들을 보고 싶었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킬빌이 가장 충실했다. 미녀 삼총사는 그냥 액션만 했으면 될텐데 그녀들을 두두두 하는 소머즈로 바꿔놓았고 툼레이더는 액션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졸리는 그저 이리 저리 휙휙 매달려서 장소 옮기기에만 열중했지 우리가 원하는 액션을 보여주지 않았다.

스토리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웃길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해도 너무했다. 뭔가를 찾으려는 졸리. 그리고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 과거에 심상찮은 사이였던 사내. 그리고 악당. 이게 전부다. 무대를 중국으로 옮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헐리우드의 시각에서 본 초라하고 시끄럽고 멍청한 중국일 뿐이라 이색적임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중간에 아프리카로 배경이 옮겨 가기는 하지만 피어싱을 환장하게 많이 한 흑인들만 등장해서 아프리카라고 막 우긴다. 한마디로 액션이면 액션 볼거리면 볼거리 어떤 것도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안젤리나 졸리가 위기에 처해서 어떻게건 물 위로 가려고 상어를 이용하는 장면이다. 정말 감독이 무뇌아구나 싶은 장면인데 상어를 유인하기 위해 졸리가 팔에 상처를 내고 그 냄새를 맡고 상어가 온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웃기는건 졸리가 주먹으로 상어를 꽁 하고 때리자 상어는 실 방향을 바꾸고(이빨한번 쫙 벌려보지도 않음) 졸리는 그 꼬리를 타고 손쌀같이 올라가서 물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다. 내가 알기로는 인간이 그렇게 빨리 물위로 올라오면 기압차인가 뭐시긴가 해서 고막이라도 뻥 터지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바다 저 밑바닥에서 위로 한번 숨 참을 동안 다 올라올 수 있다면 차라리 우리 제주도 해녀들을 시켜 탐사를 보내지 뭣하러 그 잘난 수중장비를 지고 이고 갔나 싶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