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엘리펀트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보러 간 최초의 영화. 한때는 개봉작과 무슨무슨 영화제 수상작들을 1등부터 줄줄이 꿰는 게 낙이었던 나의 과거는 흘러갔다. 친구가 보자고 해서 '응' 이란 말만 하고 코끼리를 보러 갔다. 영화 리플릿을 보고 나서야 내가 좋아하는 Gus VAn Sant의 영화라는 걸 알았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으니 이건 분명 횡재다.
스토리는 아주 간단하다. 미국 어느 고등학교의 총기 난사사건. 이 한 줄로 엄청난 스포일러라고 몰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극영화, 아이다호를 만든 감독의 영화다. 한 줄의 정보는 정보일 뿐이다. 영화의 재미는 뛰어난 구성과 아름다운 미장센이다. 보통의 영화 화면 분할과 다르기 때문에 화면상의 시각적 배치, 미장센에 반할 수 밖에 없다. 끔찍한 실제의 사건을 아름답게 찍었다는 건 역시 감독의 능력이자 장기다.
엘리펀트에는 엘리펀트가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코끼리 우화에 관한 영화다. 유명한 텔레비전 드라마 '거실의 코끼리' 에서 제목을 따왔다. 큰 골칫거리지만 너무 엄청난 문제라 해결을 못한 채 방치할 수 밖에 없다는 서양 우화다. 감독은 인도의 불교 설화를 떠올렸다고 한다. 장님 몇 명이 귀, 다리, 코, 상아 등 코끼리 몸의 일부만 만지면서 각자 자신이 만져본 부분이 코끼리의 참된 본질이라고 믿는다는 이야기. (영화 리플릿 참조)
왕따니 은따니 하는 은어는 학교생활에 필수 과목처럼 붙박혀 버렸다. 더이상 당할 수 없는 알렉스와 에릭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예견한 것 같다. 알렉스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피아노가 있는 집에서 늘 연주되던 오랜 레파토리이지만, 알렉스의 비장한 심리를 대변한다. 월광이 흐를 때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의 시선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때 하늘은 요즘 가을 하늘 처럼 파랬다. 카메라는 인물을 열심히 따라가다가 유인하기도 한다.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가 정적이었다면 산트의 롱테이크는 긴장이 배어있는 동적인 스펙터클을 포함하고 있다.
같은 순간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시간속에서 아이들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고 부딪치고 피한다. 어떤 전조도 변주곡도 없이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등장인물의 이름과 배우의 이름이 같다. 오프닝과 클로징의 화면도 수미상관. 영화와 실제를 구분하지 말자. 영화도 실제도 같은 것, 감독의 진실은 그거 아니었을까. 맨앞과 맨뒤가 같고, 그냥 나도 연기하는 나도 같고. 수많은 알렉이 수많은 에릭이 안팍에서 뛰어다니며 각자 다른 순간을 살고 있다. 히틀러를 신봉하는 사람의 맹세와 굳건한 표정, 그러나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맹세의 내용에는 전혀 관심없는 아이들. 내 시선 만큼만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거다. 우물안 개구리는 영원하다.
지인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점을 보러갔는데 지인이 태어나던 시간에 살인 사건이 벌어져 팔자가 드세다고.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세계는 넓고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같은 순간을 각자 살아간다. 만날 수도 있고, 만날 수 없을 수도 있다. 불교의 인연설을 상기해보라.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부터 이렇게 흘러와 만나고 헤어지고 있는거다. 순간. 사이. 찰나. 그걸로 이뤄진 세상이다. 장님이 만지는 코끼리처럼 내 믿음은 내게는 진실인 것.
마이클 무어가 생생히 그 현장을 전달했다면 산트는 좀 더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한다. 파인딩 포레스터의 따뜻함과 아이다호의 끝없는 길, 투 다이 포의 얕은 계략... 그 모두가 담겨 있다.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에 더 끌린다. 결국 그건 서로 꼬리와 머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