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과 신경숙에게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던 나에게 하성란은 상큼한 도발이었다. '선입견이 많은 사람'은 싫어하면서도 나같이 무수한 선입견을 짊어진 사람이 또 있을까. '예쁜 여자는 글은 별로다'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지, 겉장 안에 예쁜 작가의 사진은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선입견 덕에 글읽기는 더 감칠맛이 났다. 기대가 작았기에 기쁨도 컸다고나 할까. 20살 진명이의 내면 세계를 상황을 통해 들여다보게 만드는 글은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아침마다 가방을 안고 달리는 진명이. 결국 선명이 죽은 후 더 건강하고 성실해졌다는 그녀의 독백은 구구절절한 슬픔보다 마음을 묵직하게 건드린다. 그런데 끝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가 모자란걸까. 생각의 여지가 지나치게 많은 결말은 미국식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내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다른 글도 읽어본 후에, 꼭 한 번 다시읽기를 해야할 것 같다.
69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던 나는, 무라카미 류라는 이름과 제목을 보고 '이 사람, 또 시작이군' 하며 뜻모를 미소를 띄웠다. 토파즈로 그를 처음 접한 나에게는 무리가 아니었다. 또 적나라한 성 이야기가 판을 치겠거니 생각을 하자 책을 판매대로 들고 가는 것이 왠지 부끄럽기까지 했다. 헌데 이것이 다 오해였다. 이제껏 읽어본 류의 책중 가장 상쾌한 작품이었다. 음란한 상징인 69가 아니라, 69년을 얘기한 거라니...^^;;;(에구에구 부끄러워라)경쾌하게 전개되는 류의 학창시절을 넘보면서, 나는 왠지 '친구'의 달리기 장면이 떠올랐다. 폭력으로 물든 영화 한 가운데의 그 달리기는 얼마나 기분 좋고 유쾌했던가. 69의 느낌이 꼭 그렇다. '~한 것은 아니고' 하며 끊임 없이 궤변을 늘어 놓는 살짝 뒤틀린 특이한 주인공을 통해서는 류와 어린 시절을 공유하고 사적으로 친해진듯한 즐거운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69를 류의 대표작이나 역작으로 꼽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하지만, 내가 토파즈가 아니라 69로 그를 처음 만났다면 거부감과 선입견을 해소하는데 걸린 시간을 아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류를 아직 접하지 못했다면, 이 책으로 시작할 것을 권한다.
유시진다운 상상력에 유시진 다운 결말. 이제 무르익은 유시진의 '유시진 표 만화'이다. 미련한 나는 처음 이 만화를 빌려와서는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앞의 뒤'와 '뒤의 앞'이라... 대체 뭣부터 읽어야 되는거지? (정말 미련했기 때문에 해야하는 고민이었지만, 독자 중 한 사람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주기를 작가는 희망하지 않았을까? ^^;;;)시작은 굉장히 단조로웠다. 아빠와 아이. 어딘가 독특한 아이의 내면 세계. 그런 종류의 만화는 요즘 흔하다. 하지만 곧 이야기는 숨가쁘게 달려간다. 이상한 사람들이 나오고,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고, 또 다른 이야기와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그 이유가 밝혀지고......결말을 향한 이 복잡한 구성은 여러번 꼬인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스릴과 흥분으로 가득하다. 차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2권짜리 만화에 담다니, 대단한 실력이다. 유시진, 그 이름의 묵직함을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요즘 같은 때, 몸만 지치는 것은 아니죠. 어쩌면 지금 우리는 몸보다 마음이 더 피곤한지도 모릅니다. 호텔 아프리카를 보고 있으면 아주 파랗고 맑은 물이 떠오릅니다. 한 권 한 권 읽고 있노라면 그 물이 바싹 타버린 가슴을 천천히 적시고 찰랑찰랑 차 오르는 것이 느껴지지요. 박희정의 그림은 참 감각적이예요. 'cool'이란 단어가 이렇게나 어울리는 작가는 처음입니다. 게다가 기교나 겉멋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도 충실한 것 같아요. 순정만화에서 할머니나 아기를 그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만화광이라면 다 알겁니다. 그런데 제대로 그릴 뿐 아니라 그 나름의 느낌과 아름다움까지 뽑아 내는 걸요. 어린 엘비스와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배어나옵니다.엘비스, 줄라이, 아델라이드, 지요, 트란, 이지 그 밖에 많은 등장인물들. 그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과 진지하게 마주보는 사람들입니다. 보는 사람을 감화시킬 정도로요. 저도 만화는 주로 대여점에서 빌려보지만, 이 만화는 정말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유일한 단점은, 5권 밖에 안 된다는 거라구요. 10권이나 20권이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발간된 지 7~8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 책이 읽히고 팔린다는 것이 너무도 반갑습니다. 처음 나왔을 때, 시가 아닌 1회용 낙서로 폄하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몇 년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을 간지럽힌다면 낙서라고 쳐도 대단한 낙서지요. 스무 살을 앞두거나, 치르거나, 되돌아보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난해한 말로 이마에 주름을 만들지도 않고, 어이 없는 표현으로 창의성을 뻐기지도 않는 이 시들은 방대한 협연보다 피아노 소품이 빛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이후에 나온 그 어떤 시집보다도 이 시를 윗길에 둡니다. 노련하지 않은 참신함, 다듬지 않은 순수함이 원태연 시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