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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죽이기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유향란 옮김 / 문이당 / 2004년 6월
평점 :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비극적인가? 더군다나 그런 존재가 인간만큼이나 많다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2003년 세계 환타지상 수상자인 조란 지브코비치의 <책 죽이기>는 비극적인 삶을 살던 ‘책’이 세상을 향해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생각지도 못한 녀석이 사람흉내를 내며 우리 곁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책이 사람 행세를 한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하지만 <책 죽이기>는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다. 책을 여성으로 의인화시킨 <책 죽이기>는 저자의 기발한 소재만큼이나 내용 또한 기발하다. 또한 구성도 튼튼하여 단숨에 독자들의 시선을 빼앗는 흡입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많이 데려가는 곳은 침대이다. 최소한 어울리는 장소이긴 하지만 침대에서의 기분을 말하라면 무시당하고 있는 마누라 같다는 게 딱 맞을 것이다. 피곤해 지친 무뚝뚝한 남편이 얼른 제 욕심만 채우고 마누라쟁이를 이내 싹 잊어버리는 꼴이다.(…)우리는 밤새 또는 다음 날까지도 활짝 펼쳐진 채 - 이 얼마나 채신머리없는 자세인가 - 읽던 자리에 내박쳐져 있어야 한다. 가랑이를 찢어져라 벌린 채 몇 시간씩 혹은 종일 버티고 있다고 상상해 봐라.”
...
“더 몹쓸 경우가 있으니 이름하여 세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책이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는 형국이다. 비록 얽매인 신세이기는 하지만 자존심 강한 우리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비싼 가격이라 해도 값이 매겨졌다는 그 자체가 상처이다. 출판업자들이 우리의 가치를 고작 이 정도 밖에 안친단 말이지?”<책 죽이기 中>
수난, 학살, 망신, 임신, 진통, 착상, 출산, 죽음 등 7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책 죽이기>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소외받는 여성의 삶에 책을 의인화시켜 진행하고 있다. 서론은 기발한 착상으로 경쾌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서관을 사창굴이라고 지적하거나 헌책방을 양로원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허를 찔린 듯한 기분으로 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 죽이기>는 그저 웃자고 쓰여진 책이 아니다. 사소한 행위들, 이를테면 도서관 책을 찢거나 침을 묻히거나 과시욕으로 책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들부터 돈을 위해 책을 만드는 황금만능주의까지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이 <책 죽이기>를 통해 책이 사람흉내를 내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기발함도 기발함이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책들의 항거와 비분강개 때문인지 제목은 ‘죽이기’이지만 실상은 책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를 상대하는 예의까지도 톡톡히 알려준다.
21세기의 오늘날 노골적으로 수난당하는 ‘책’들의 탄식과 하소연 그리고 분노를 담아낸 <책 죽이기>는 <동물농장>만큼이나 기발한 착상과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어렵지 않게 독자들을 붙잡고 있다. 더군다나 저자가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부담 없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낮은 자세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연령층이나 독서량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책 살리는 재미’를 톡톡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